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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57화 (357/805)

357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속내를 드러낸 빌름 남작은 키시아르와 마병단에 대한 보고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머리가 아프니 나머진 됐다. 프루엘레 1공자께선 어떠냐. 돌아갈 생각은 아직 없어 보이시던가?”

“예. 슬쩍 여쭈어 보니 좀 더 시간을 두고 돌아가야 갑작스레 이곳으로 온 일에 대한 타인 공작 전하의 진노가 가라앉으실 거라 말씀하시더군요.”

“그건 그렇지. 과연 피가 통하신 분답게 공작 전하의 성정을 잘 아시는군.”

심드렁하게 대답한 빌름 남작은 공작이라는 말에 무언가 떠오른 듯 안색을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쪽은 어떻게 되었느냐. 가능하면 매일 만나 친분을 쌓아 두라고 말했는데 잘 되어가고 있는지 물을 정신이 없었군그래.”

빌름 남작은 이전부터 프루엘레와 제 딸들을 기회가 올 때마다 자주 만나게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타인 가는 외부 가문보다 방계와 결혼하는 사례가 더 많았다. 잘만 한다면 제 딸들 중 누군가가 다음 타인 공작 부인이 될지도 모르고, 못 되어도 최소한 본가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을 테니 그도 나쁘지 않았다. 현 타인 공작과 그 부인은 자식 문제에 관심이 없으니 결혼할 당사자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된다는 점도 그가 프루엘레에게 눈독을 들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몇 번 뵈러 가기는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요즘 들어 ‘그런데’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진 빌름 남작이 날카롭게 물었다. 보고를 하던 집사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1공자께서 이번에 데려온 고양이를 돌보시는 데 여념이 없어 아가씨들을 방에 초대하지 않으신다는군요. 게다가… 고양이를 찾아 주신 뒤로 안면을 튼 펠레타 공작 전하와 자주 식사를 함께하시어 아가씨들께서 찾아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무어? 고양이?”

빌름 남작의 눈썹이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그는 어렴풋이 프루엘레가 고양이를 잃어버려 본저의 하인들이 애를 태웠던 날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그건 핑계겠지, 이 멍청한 놈 같으니. 두 사람이 그리 자주 만난다는 말을 왜 먼저 하지 않았어!”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남작님께서 요즘 타이누를 위하시느라 좀 바쁜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1공자님의 사소한 주변 보고까지 드렸다가는 몸이 상하실까 이놈이 주제넘게 걱정을 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바빠도 그렇지!”

역정을 내기는 했지만 빌름 남작은 집사의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타인 공작의 모욕적인 언사를 담은 연락이 쏟아지고 타이누에서는 불온한 움직임이 가라앉을 새가 보이지 않는 이때, 제 사정을 알아 주는 이가 하나는 있다는 것이 그를 흡족하게 했다. 그러자 열이 올랐던 머리가 식으며 평소처럼 잔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으음, 아니… 생각해 보니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타인 공작은 요즘 타이누에 숨긴 ‘물건’들을 안전하고 비밀스럽게 옮기는 일과 불온한 움직임을 뒤쫓는 건으로 빌름 남작을 밤낮없이 못살게 굴었다. 그렇게나 애가 탄다면 직접 타이누로 와도 될 텐데, 죽어도 오지 않고 역정만 내는 것이 참으로 그다웠다.

때문에 본래 먼저 처리하려 했던 펠레타 공작의 조사와 대삼림에서 업적을 세운 마병단원의 회유도 제대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는데, 그들의 상대를 프루엘레가 대신하고 있다 생각하면 이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1공자는… 확실히 후계가 될 의향이 있어 보였지. 가문의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펠레타 공작에게 접근하는 이유도 분명 단순한 뜻만은 아닐 것이다.’

프루엘레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빌름 남작에게 넌지시 비밀 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에둘러 물었을 때, 남작은 내심 몹시 놀랐다. 그는 여태까지 가문의 일에 관심이 없기로 유명했던 프루엘레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후계 자리를 위한 발판을 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타인 가의 사람이라면 이번에 그들의 세력권에서 일어난 사라인 대삼림 사건을 모를 수 없으니, 1공자가 스스로 그에 대한 정보를 쥐려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빌름 남작은 제 짐작이 하나부터 열까지 틀렸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바빠 제대로 신경을 써 드리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길을 찾으셨으니 참 현명하시군. 그분을 만나 뵙고 펠레타 공작의 신검 건과 그 건방진 마병단원 놈의 회유를 도와주실 수 없는지 여쭈어야겠다.”

“과연 남작님께서는 앉아서도 모든 판을 읽으십니다.”

“이놈, 혓바닥이 참으로 매끄럽구나.”

빌름 남작은 간만에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머리가 아파 미루어 두었던 진짜 일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타이누 기사단장 쪽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느냐?”

“네. 폭발 사건 때 다친 이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범인의 외형조차 모른다고 합니다.”

“게으르고 한심한 놈. 무슨 정신으로 발을 뻗고 자는지! 생긴 것을 모른다고 못 잡으면 끝이라더냐? 그러면 다른 수단이라도 써야지. 새로운 방법을 찾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매번 검문만 반복하고 있으니.”

타이누의 기사단장 제이머 필을 향해 아낌없이 욕설을 퍼부은 빌름 남작이 이마를 짚었다.

“하기는, 붉은사슴 상단에서 털린 게 뭔지 모르니 그딴 식으로 구는 거겠지. 그 안에 있는 정보를 천한 놈들이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타인 공작께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야!”

빌름 남작은 붉은사슴 상단에서 몰래 보관하던 금고가 침입자들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아찔함을 떠올렸다. 기사단장이나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던 서류에는 타인 공작이 추진해 온 새로운 무역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오고 간 장부가 보관되어 있었다.

온갖 복잡한 숫자와 암호로 대신 지칭한 명사들이 난무해 보통 사람의 눈에는 평범한 상단 장부로만 보이겠지만, 내용을 알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만 제대로 읽어도 서쪽에서 대삼림을 거쳐 타이누로 온 물건들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놈들은 분명 타인 공작께서 하시는 무역 사업을 노리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게야. 그러니 다음 목표는 분명 중간 거점이겠지. 그것을 찾으려 상단과 치안 관리단에 침입했을 테고…….”

“대체 그 천한 놈들이 그 짓을 해서 무엇을 얻기에 이 난리인지 저는 도무지 짐작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집사의 말에 빌름 남작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천한 놈들이 무슨 생각이 있겠느냐? 그 뒤에 있을 그림자를 봐야지.”

“그림자라면…….”

“타인 공작 전하의 사업을 탐탁지 않게 보던 이들 말이다. 가문 내의 움직임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밖일지도 모르지. 그 부분까지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답이 뻔하지 않느냐.”

“아, 그렇군요.”

“그들이 각성자 놈들을 고용하여 우리를 어지럽히려 드는 게 틀림없어. 그런 이들의 비호가 있으니 그 많은 놈들이 이 타이누 안에 쥐새끼들처럼 잘도 숨어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남작님께서는 앞으로 어찌하시렵니까.”

“타인 공작께서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어제 말씀하셨다. 물건을 이 이상 타이누에 두는 건 너무 위험해. 그러니 오늘부터는 그놈들을 잡는 데에만 신경 쓰기보다는 일단 짬을 만들고 물건을 옮길 방도를 생각해 봐야겠지.”

빌름 남작은 대삼림에서 타이누 기사들을 죽이고 감히 여기까지 와 폭발 사건을 일으킨 각성자들 무리를 찾기 위해 그동안 순찰을 배로 늘리고 불시에 검문을 시행했다. 그러나 놈들은 어디로 꺼졌는지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며칠을 허비해도 성과는 없고 타인 공작의 욕설을 읽기만 해도 머리가 멍멍할 지경이니, 이제는 그 일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다.

“일단 게을러 빠진 기사단장 놈을 불러서, 여태까지 뒤지지 않았던 곳들도 전부 뒤지라고 명해야겠다. 이미 검증된 상단, 용병단, 여관을 비롯하여 최근 낯선 이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라면 어디든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이곳 태생이라도 전부 잡아들이라고 해야겠어.”

그건 그렇지 않아도 얼어붙은 타이누의 분위기를 지금보다 더욱 경직시킬 만큼 거친 대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해야 나도 숨 쉴 짬이 생기지.’

남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고려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타인 공작을 상대하며 일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 하나라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내일쯤은 정말로 타인 공작에게 암살자라도 받을 기세니 이런 짓이라도 하여 그의 분노를 풀어 주어야 했다.

“남작님! 방금, 방금 전 필 기사단장께서 소식을 보내셨습니다.”

그때, 하인 하나가 문을 급히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멍청한 놈이 이제야 일어나 보고서를 작성했나 보군. 들라 해라!”

그러나 제이머 필 기사단장이 보낸 소식은 단순한 보고가 아니었다.

“송구하오나 방금, 붉은사슴 상단의 창고 여러 개가 모조리 박살이 났다고 합니다!”

“뭐?”

빌름 남작이 순간 얼어붙은 채 입을 멈추었다.

“사상자와 재산 피해는 현재 계속 살피는 중이라 하며, 때마침 그쪽에 가 계셨던 글레힘 빌름 자문께서도 크게 다치셨다 합니다.”

“글레힘이?”

빌름 남작은 몇 번이나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하다가는 희게 질린 채 벌떡 일어섰다.

“당장 앞장서라! 내가 직접 봐야겠다. 어서!”

***

“오늘따라 별저에 드나드는 하인들 수가 참 적은걸. 그렇지 않나, 보좌?”

“그렇습니다.”

유더는 응접실에 늘어진 채 문을 열어 둔 창밖을 바라보는 키시아르의 곁에 앉아 담담히 대답했다.

“뜨거운 시선 속에서 공놀이를 하는 게 참 재미있었는데, 관객이 없어지니 영 의욕이 안 나.”

빌름 남작의 하인들이 듣는다면 눈물을 흘릴 만한 말이었지만 키시아르는 그저 장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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