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한 나한의 시선이 온건파 각성자들을 훑었다. 그들은 나한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환상에 당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지정된 범위 안에서 가능한 능력이기에 눈을 마주치든 말든 능력 발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나 나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아까 타이누의 모든 각성자 형제자매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나는 무얼 하느냐고 물었지.”
“…….”
“타인 공작과 연결된 상단에서 가져온 서류를 읽고 정보를 찾았어. 이제 거의 끝나 가는 중이지.”
나한의 시선이 옆에 쌓인 종이 뭉치를 향해 보란 듯 움직였다.
“이 순간에도 우리의 형제자매를 물건처럼 가두어 두고 팔아먹을 생각으로 가득한 이들이 거기에 있어. 그런 이들을 언제까지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할까? 외면하면 할수록 에르시와 같은 피해자들이 더 생길 테고, 손도 쓰지 못한 채 죽어갈 텐데 말이야.”
물 흐르듯 매끄러운 목소리에 온건파 각성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 또한 살던 곳을 떠나 도망친 끝에 나그란의 별에 들어온 이들이기에 동료들이 겪어 왔을 고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작은 불편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곧 에르시와 다른 형제자매들이 나서서 타인 가에서 감추고 있을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구출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
언뜻 흠잡을 곳 없이 느껴지는 말에 온건파 각성자들은 기세를 잃어버렸다. 반대로 나한을 따르는 각성자들은 든든한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싸움의 결론이 난 듯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 온건파 사이에 끼어 있던 한 청년이 입술을 떨며 입을 열었다.
“말은 좋네. 참으라고? 대체 뭘?”
“…….”
“함께 살던 이들을 쫓아내고, 사람을 죽이고… 이렇게 해 봤자 결국 감추려 했던 우리 존재만 더 드러날 뿐이잖아. 내 눈에는 타인 가에 복수하려는 에르시를 네 마음대로 동료들의 힘을 모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여. 이렇게 일이 커진 걸 현자께서는 알고 계셔?”
“그, 그래, 맞아.”
분노 섞인 외침에 겨우 힘을 얻은 온건파 각성자들이 웅성대며 동의하는 목소리를 냈다.
“내가 뵌 현자님은 우리들에게 조용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시려 했던 분이었어. 너희가 여기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걸 그분이 아신다면……!”
“글쎄. 알면 무언가 바뀌나?”
잠자코 듣고 있던 나한이 반문했다. 열심히 말을 토해 내던 온건파 각성자들이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뭐?”
“형제들. 아무래도 안식처에 머문 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인데, 생각해 봐.”
화상으로 얼룩진 한쪽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형제들은 저절로 이곳을 찾아 들어왔나? 우린 모두 같은 형제자매들의 손에 구원받아 들어왔을 거야. 나그란의 별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된 곳이지.”
너무나 침착하여 오히려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그리고 형제자매를 구하기 위하여 일어난 거야. 지금도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뿐, 딱히 달라진 건 없어.”
“…….”
“현자가 내게 이번 일을 맡겼으니, 나는 내 방식대로 처리할 뿐이야. 그게 잘못된 건가?”
그러나 젊은 온건파 각성자는 나한의 말에 수그러들지 않았다.
“네 말은 늘 그렇게 교묘하지. 피해를 입은 동지들을 구출하여 함께하는 게, 무고한 비각성자들까지 죽여 가며 타인 가와 전쟁을 치르려는 너희와 똑같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너희들은 그냥 복수귀일 뿐이야!”
나한은 드물게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모든 이들은 그가 처음으로 다른 각성자에게 화를 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래, 형제. 많이 힘들다면 안전한 남부 거점으로 가 있는 편을 추천하지. 나도 모든 형제자매들이 나와 함께 움직일 순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
나한은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온건파 각성자들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방에서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젠장!”
울분에 차 벽을 두드린 젊은 온건파 각성자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항상 저렇게 교묘한 말뿐이야. 저 혓바닥에 당해서 마티를 잃었는데…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더 하려고……!”
“진정해, 로벨.”
다른 온건파 각성자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마티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 거야. 저 녀석들도 그들을 죽이진 않았다고 했잖아.”
“나한이 능력을 쓰면 멀쩡했던 사람도 스스로 벽에 머리를 처박고 자살을 한다지. 그런 끔찍한 능력에 당한 채로 쫓겨났는데 당장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로벨이라 불린 사내가 벽을 몇 번 더 두드리며 분노를 삼켰다.
“치안 관리단에도 없다면 우린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
“저, 로벨. 차라리 남부로 가서 현자께 이 일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떨까.”
곁에 있던 온건파 각성자 중 한 사람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커지고 있다는 걸 모르실 가능성이 높으니 도와 달라고 하면 분명 도움을 주시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게 바로 나한이 노리는 거야. 한 번 당해 보고도 몰라?”
로벨이 거세게 소리치며 부정했다.
“저 녀석들은 우리가 여길 떠나길 바라. 그래야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으니까!”
“…….”
온건파 각성자들이 힘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비각성자들 중 배신자가 나왔다는 말과 함께 빠른 ‘정리’ 작업이 진행된 뒤로 본래 온건파에 가까웠던 동료들 중 많은 이들도 나한이 옳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쫓겨난 비각성자들을 찾으려는 이는 로벨을 포함하여 대여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로벨처럼 쫓겨난 이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었다.
뒤늦게나마 겨우 정보를 모아 치안 관리단까지 가 보았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로벨, 로벨!”
그때, 누군가 달려와 로벨의 등을 두드렸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어. 어쩌면 쫓겨난 사람들이 우리 예상과 전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몰라!”
“뭐?”
절망에 차 있던 온건파 각성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달려온 이는 상기된 얼굴로 정보를 알려 주었다.
“마병단 일부가 지금 여기 와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우리가 치안 관리단에 가기 바로 전에 마병단 몇 사람이 그곳에 방문했었대!”
“그게 정말이야?”
로벨이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잡아채며 물었다.
“마병단이 거기에 갔었다고?”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었던 것 같은데, 정문에서 떠드는 병사들의 목소리를 감청하다가 알게 되었어. 그 사람들이 떠날 때 굉장히 많은 마차가 뒤를 따라갔대. 거기에 타고 있던 이들이 혹시… 쫓겨난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잖아.”
각성자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로벨 또한 이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복잡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인해 볼 가치는 있겠네.”
“너무 위험해. 숲에서 봤던 모습을 벌써 잊었어? 혼자서 집채만 한 몬스터를 죽이는 놈들이라고!”
“봤어. 하지만 그 힘으로 몬스터만 죽였지 우릴 공격하진 않았잖아. 직접 이야기해 봤을 때 그렇게까지 말이 안 통할 이들로 보이진 않았어.”
“그놈들이 우릴 쫓는다는 걸 몰라서 그래?”
다른 이들이 무어라 해도 로벨은 이미 마음을 단단히 정한 상태였다. 그는 깊이 숨을 내쉬고는 동료 각성자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은 없어. 일단 마병단이 어디서 머무는지 알아보고, 그곳에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갈 수 있는지 살필 거야. 하루에 한 번씩 연락을 넣겠지만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면 너희는 날 찾지 말고 남부로 가.”
“로벨…….”
“나한 쪽 놈들에게는 내가 화가 나서 뛰쳐나갔다고 말해. 되도록 함께 있지 마.”
로벨은 방금 전 보았던 나한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는 제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간접적인 방식으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였다. 그가 온 뒤로 시작된 마을의 분열과 현 상황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치가 떨렸다.
로벨은 동료들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등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
며칠이 더 지나는 사이, 빌름 남작의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은 키시아르의 방탕함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남작이 아끼던 술을 가져다 탑을 쌓으며 놀고, 식사 예절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며 남자 애인과 노닥거리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몰상식한 부하들과 더불어 응접실을 놀이 공간으로 꾸미고 공을 던지며 웃거나, 술에 취해 테이블 위에 드러누워서는 보좌에게 물을 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을 보며 수많은 이들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내놓은 황족이라지만 다섯 살짜리 귀족 아이조차 하지 않을 사고를 태연히 치고 있으니 지켜보는 이들만 죽을 맛이었다.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늘 새로운 짓을 저지르시니, 별채 하인들이 그곳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합니다.”
“그것뿐이냐? 계속 놀고만 있다고?”
“예.”
눈 밑이 새카맣게 변한 빌름 남작은 텅 빈 수집장을 바라보며 지끈대는 머리를 눌렀다. 본디 그 안에는 그가 어릴 때부터 모아 온 귀한 술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키시아르의 손에 모든 것이 작살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폭발 사건이 일어나든 말든 하나도 관심이 없어 다행이라지만, 이래서야 내가 식충이를 기르는지 귀하신 몸을 모시는지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