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유더 님. 오늘 아침에 드디어 한 분이 차도를 보였어요!”
루산이 감격한 얼굴로 속삭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밥을 떠서 먹여 드리는데 여기가 어디냐고 묻더라구요. 여긴 안전한 곳이고, 제가 태양신의 사제라고 말해 드렸더니 눈물을 흘리며 울었어요. 탈진할까 싶어 잠깐 신력을 부어 진정시켜 놓은 덕에 지금은 자고 있지만, 곧 깨어나실 거예요.”
넓은 방 안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멀쩡해진 이들이 앉아 있었다. 멍해 보이는 건 여전했지만 이전처럼 이상한 소리를 지르거나 벽을 긁지는 않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 낸 쾌거였다.
“유더, 왔어?”
“차도를 보였다는 사람은 어디 있어?”
“저쪽에.”
루산을 돕고 있던 에문과 핀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차도를 보였다는 이가 누운 침대는 연결된 다른 방 안에 있었다. 유더는 구불거리는 잿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하고 짙은 머리색을 지닌 이들이 많은 서부에서는 보기 힘든 머리칼 색이나 이목구비 생김새에서 타국의 느낌이 진하게 느껴졌다.
“깨울게요.”
루산이 긴장한 얼굴로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잠시 후 그녀가 조용히 눈을 떴다. 루산과 에문, 핀을 보았을 때는 조금 안도하는 듯 보였던 이가 낯선 유더의 얼굴을 본 순간 긴장감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누, 누구.”
“걱정 마세요. 안심해도 좋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시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예요.”
그녀는 루산이 부드럽게 몇 번이나 위로를 건네며 안정시킨 뒤에야 겨우 숨을 가라앉혔다. 유더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나름대로 상태를 살펴보았다.
‘정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 같군. 대화도 가능해.’
루산이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감격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 표정은 딱딱한 편인데 서서 내려다보기까지 하면 더욱 위압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으니 최대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야 했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합니까?”
“이, 이름. 나, 나. 아니, 저, 는.”
여자는 한참 동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댔지만 아무도 닦달하거나 추궁하지 않자 천천히 상태가 나아졌다.
“제, 이, 이름은. ……마티, 예요.”
“그 외에 또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나이나 고향 같은 것.”
“나이. 나이……. 스물… 둘. 고향은, 멧사리아.”
멧사리아라는 곳은 유더가 알기로 사라인 대삼림에 맞닿아 있는 넬라른의 국경 지역이었다.
‘역시 제국인이 아니었군.’
이름과 나이, 고향까지 말하고 나자 슬슬 좀 더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는지, 마티라는 여자의 눈빛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변을 좀 더 둘러보고는 두려움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긴 대체 어디죠. 신전 같지는 않아요.”
“여긴 타이누입니다. 당신은 이곳 주변을 헤매다 발견되었습니다. 이전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타이누?”
입을 벌린 마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 그래, 맞아. 타이누에… 간다고 했었지. 아니, 왔었어. 그런데……!”
잠시 후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루산이 황급히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신성력을 부었다. 유더와 에문, 핀은 그사이를 틈타 빠져나왔다.
“저 사람, 괜찮을까?”
“일단 정신을 차렸으니 금방 더 회복할 거야. 다시 깨어나면 나를 불러 줘. 단장님을 모시고 올 테니까.”
“으응……. 그럴게.”
에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티는 키시아르를 데리고 오기도 전에 급속도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세 마병단원을 만나기를 원했기에 그들은 재차 침실로 들어가야 했다.
“이제 기억이 났어요. 당신 두 사람, 대삼림에 온 적이 있었죠? 당신들은 그때 용병이라고 했었지만 사실은 수도에서 왔다는 위험한 사람들이잖아요.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어요.”
놀라운 눈썰미로 한 번 보았을 뿐인 에문과 핀을 알아본 마티의 눈빛은 멍하기만 했던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분노와 좌절로 얼룩진 시선이 마병단원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가 누군지 알아보고 데려와 주었겠군요. 그것만은 정말로 감사해요. 아니었다면 전 이미 죽었을 테니까요.”
사실 그들을 구해 주기 전 이미 죽은 이들도 제법 있었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우릴 구해 주신 건 단지 불쌍해서만은 아니죠?”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한 루산과 에문이 동시에 유더를 흘긋 쳐다보았다. 유더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네. 저희는 당신이 지내던 마을의 흔적을 쫓고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지요.”
“역시 그랬군요. 역시, 역시 그랬어.”
주먹을 꽉 쥔 마티가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었다.
“제게서 정보를 원하시나요?”
이야기가 빨라 좋았지만, 유더는 일단 ‘지금 당장 말해 주기 힘들다면 천천히 말해 주어도 좋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마티는 바로 사납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당장 말해 드리고 싶어요. 정확히 뭐가 알고 싶으신 거죠?”
“그렇다면 뭐든 좋으니 당신이 그 마을에 합류하게 된 이유와 기억을 잃기 전까지 기억하는 일들을 듣고 싶습니다.”
“좋아요. 어차피 제 출신을 아셨을 테니 그리 놀라운 이야긴 아니겠죠.”
마티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 넬라른 사람이에요. 1년 전쯤 저와 남동생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제국에 가려고 했죠. 그때는 대삼림이 그리 위험한 시기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운 나쁘게 몬스터를 만나 남동생은 죽고, 저는 부상을 입고 죽을 뻔한 것을 마을 사람들이 구해 주었어요.”
마티는 각성자 마을 사람들을 통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각성자를 보았다. 처음에는 각양각색의 생김새를 지닌 그들이 몹시 두려웠지만 조건 없이 보여 준 호의 덕분에 겨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부상이 나은 뒤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일을 도왔다. 낫는 동안 마을의 한 사내와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도 그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는 마을에 정말 좋은 사람들만 있었어요. 저 같은 사람들을 호의로 구해 주고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죠. 그런데, 마을에 머물던 각성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고 바뀌면서 분위기가 점차 달라졌어요.”
마을에 머무는 평범한 이들이 늘어날수록 각성자들 또한 두 패로 나뉘기 시작했다. 마을의 안전을 위하여 평범한 이들을 받지 말고 내보내야 한다는 파와, 모두 같은 처지이니 함께 지내는 게 뭐가 나쁘냐고 주장하는 파였다.
그리고 그 갈등은 몬스터가 이상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쯤 절정을 이루었다. 위험한 대삼림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평범한 이들도 다 같이 데리고 가야 할지, 각성자들만 이동해야 할지 확실하게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파로 나뉜 각성자들은 점차 서로 얼굴을 붉히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마을의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그러던 중 마병단이 나타났고, 사라인 대삼림 전체를 위험에 몰아넣을 뻔했던 거대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일은 다행히 누구의 희생도 보지 않고 끝이 났지만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야 몬스터를 죽인 이가 마병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병단에게 그들의 마을을 들킨 이상 정말로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처음 보는 이들이 나타났어요. 그중에서도 얼굴 한쪽에 끔찍한 흉터가 있는 남자를 마을 각성자들은 두려워하면서 따랐죠. 그가 마을 이동과 관련한 마지막 결정을 도우러 왔다고 했어요.”
인상착의만 들어도 그 사내가 나한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남자가 나타난 뒤로 비각성자를 싫어하는 각성자들의 기세가 높아졌어요. 그런데 그 남자는 의외로 저와 같은 이들도 일단 모두 임시 거처에 데려가는 쪽이 좋겠다고 했죠. 전 그가… 소문과 달리 참 친절하다고 생각했어요. 멍청하게도 말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오랫동안 숲에서 지내다 사람이 많은 임시 거처로 오니 다들 정신이 없었어요. 어떤 이들은 몸을 사렸지만, 또 어떤 이들은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죠. 그 남자는 그 모습을 며칠간 지켜보다가…….”
말을 잇던 마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각성자 중 누군가가 외부에 정보를 발설했다고 했어요.”
물론 정말로 그랬다면 큰 잘못이었겠지만, 애초에 비각성자들은 마을 각성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들이 무엇을 그리 발설할 수 있었겠느냐고 항의해 보았으나 나한과 뜻을 함께하는 각성자들은 그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한을 등에 업고 그동안 마땅히 했어야만 했던 일을 한다는 듯 굴었다. 비각성자들이 각성자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심하게 반발하던 이들은 본보기로 큰 상처를 입거나 죽임당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
“잘못을 저지른 이만 처벌해도 되지 않느냐고 몇 번이나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이 모든 건 사실 시험 기간이었고, 마을의 모든 각성자들이 동의했다고 하더군요. 믿을 수가 없어 제 연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들어 주지 않았어요.”
“……연인요?”
잠자코 듣고 있던 에문이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아까 마을에서 만나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던 그 남자가 제 연인이에요. 전 그 사람이 그런 일에 동의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네요.”
유더는 분노와 좌절로 불타던 그녀의 눈빛을 그제야 이해했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군.’
“절 넬라른으로 돌려보내시든, 제국 감옥에 가두시든 이젠 상관없어요. 다만 그자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