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에버가 두 사람을 동행시킨 이유는 그들이 첫 번째 파견대로서 대삼림 내에 있던 각성자의 마을에 가 본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잃은 걸인 무리가 그 마을에서 쫓겨난 이들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맞다 한들 정작 마을에 가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지만, 에문과 핀은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다행히도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대삼림 내의 마을에서 본 이들이 거기 있었던 게 확실했나?”
키시아르의 질문에 에문과 핀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께서 그 마을의 각성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셨을 때 말입니다, 일이 다 끝나고 나서도 넬라른 기사 분들이 떠날 준비를 하느라 잠시 시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그때 그분들의 부탁으로 저와 핀, 그리고 가케인이 마을 내부에 다시 한 번 다녀왔었던 것도 기억하십니까?”
“체포한 범죄자가 남겨 둔 흔적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었던가?”
“네. 마을에 사는 각성자들을 자극하지 않고 일을 끝내려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었지요.”
그것은 칸나가 요약하여 이야기해 주었던 부분만 알고 있던 유더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넬라른의 기사들은 에제인 왕자를 배신하고 도망치다 각성자 마을에 숨어 있었던 시종 젠을 체포한 뒤에도 그자가 머물던 곳을 꼼꼼히 확인하고 싶어 했다. 하룻밤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문과 핀, 가케인은 그 일을 돕기 위해 키시아르가 에제인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한 번 더 마을 내부에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별다른 사항이 없어 일은 빨리 끝났는데, 그때 다녀온 곳이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머무는 구역이었습니다.”
“저희를 보고 엄청나게 불안해했죠. 서로 싸우는 모습도 잠깐 봤어요.”
핀이 불퉁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는 대삼림에 힌을 두고 떠나온 뒤부터 늘 그런 상태였다.
“네. 뭐,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기억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워낙 특이한 만남이었다 보니 몇몇 이들은 머릿속에 아직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제 감옥을 스쳐 지나가다 보는데 갑자기 기억이 나더군요.”
“그 정도라면 확실하겠군.”
키시아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타이누 기사단 측에는 무어라 말했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관심을 보이는 죄수들이 있다는 걸 알면 수상하게 여길까 싶어 단장님께 보고를 드린 뒤 행동할 생각이었습니다.”
“좋아. 가서 직접 보도록 하지.”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핀나드 광장에 도착했다. 그 옆에는 오래된 양식을 그대로 보존한 치안 관리단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문을 열어 둔 채 수많은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방만하게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펠레타 공작이 탄 마차가 들어섰다는 말에 깜짝 놀라 눈을 의심했다. 그건 뒤늦게 뛰어나온 타이누 기사단장 제이머 필 또한 마찬가지였다.
“펠,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의 차림새는 기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허리춤에 검조차 없고 허리띠만 덜렁이는 모습을 보면 낮잠이라도 자다 뛰쳐나온 게 분명했다. 유더는 이마가 넓게 벗겨진 중년 사내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에버의 평이 정말 정확했다고 생각했다. 근무 시간임에도 제 할 일조차 하지 않는 자가 감히 누구를 무시하는지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송구하오나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어제 이곳에 보냈던 나의 유능한 부단장 에버 벡과 단원들이 지하 감옥에서 수상한 자들을 본 듯하다는 말을 하더군. 사안의 시급성을 고려하여 직접 확인해 보러 왔네.”
“예?”
기사단장의 시선이 키시아르와 그의 등 뒤에 선 단원들에게로 바쁘게 움직였다. 병사들 또한 어이없어하는 시선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상한… 자들이라니요? 어제는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자세히 말하기는 조금 그렇군.”
“하지만 전하. 이곳은 타이누입니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렇게 오시면…….”
기막힌 티조차 감추지 못하고 키시아르의 말에 세 번이나 얼빠진 소리를 한 작자를 여기서 더 참아 줄 필요가 있을까?
유더가 손을 올리자마자 그들의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싸고 있던 제이머 필과 병사들의 발밑이 일제히 위아래로 벌컥 흔들렸다. 본래 낼 수 있는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으나 그 정도만으로도 방심하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지기에는 충분했다.
“지, 지진?”
“아. 자꾸 앞에서 얼쩡대는 벌레가 보여 혹 단장님께 해를 입힐까 힘을 조금 쓴다는 것이 그만 불편을 끼쳐 드렸군요. 제 불찰입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유더를 본 제이머 필이 몇 번 눈을 꿈벅이다가는 분노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무슨. 감히 어디에서……!”
“유더. 부상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힘을 쓰면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타이누의 기사단장보다 먼저 나서서 엄한 목소리를 낸 건 키시아르 쪽이었다. 제이머 필은 말을 가로막히고 어설프게 입을 다물어야 했다.
“벌레 정도로 일일이 힘을 낭비해서야 어떻게 몸이 나을 수 있겠나. 대체 왜 이리 말을 안 듣는지 정말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되어 살 수가 없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단장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이머 필을 상대로는 한없이 재수 없는 눈빛을 보이던 사내가 키시아르의 앞에서는 곧바로 머리를 숙였다. 어울리지도 않게 주인의 앞에서 배를 까뒤집는 맹수의 변화라도 보는 듯했다. 키시아르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는 이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 사내의 뺨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누가 보아도 의미를 오해할 수 없을 눈빛으로 온화하게 속삭였다.
“여기서 그걸 방패로 삼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그런 귀여운 말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예.”
“조심하게. 넘어진 이들에게도 사과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이머 필은 그제야 유더의 사과를 받았다. 여전히 성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목소리였으나, 그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설마, 저 남자가 그 소문의…….’
의욕 없는 타이누의 기사단장의 귀에도 펠레타 공작과 그가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는 남자 단원에 대한 소문은 이미 어느 정도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제 눈으로 보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는 빌름 남작의 저택에서 은밀히 흘러나왔던 소문들을 떠올리며 경악에 숨을 삼켰다.
“필 경. 미안하게 되었군. 보다시피 내 보좌가 나를 너무나 걱정하여 가끔 이런 일을 벌이곤 한다네. 아까는 심지어 손바닥만 한 고양이를 암살자로 오인하고 싸우려 했었지. 정말 귀엽지 않나?”
“……예?”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말고, 다음부터는 앞길을 잘 살피게.”
분명 달래는 말 같으면서도 자세히 들어 보면 하나하나 모욕적인 표현이 아닌 게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이의 미소와 목소리가 너무나 티끌 한 점 없이 맑았던 탓에, 제이머 필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씰룩대다 포기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지하 감옥은 저쪽입니다.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와 주십시오.”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펠레타 공작과 그의 단원들은 막 들어왔을 때와 전혀 다른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각성자가, 그것도 마병단이 능력을 제대로 쓰는 모습을 처음 본 이들은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어쩔 수 없이 미약한 두려움을 느꼈다.
우습게 보는 시선보다야 꺼리는 쪽이 더 낫다. 유더는 그렇게 생각하며 당당히 어깨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이들이 그와 시선이 닿을까 흠칫대며 멀어지는 와중 같은 마병단원들만이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웃음을 꾹 참았다.
지하 감옥 1층은 생각보다 그리 어둡지 않았다. 지하이기는 해도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바깥의 땅을 반쯤 파내어 창문을 만들어 둔 덕이었다. 기사단장과 함께 들어온 심상치 않은 이들의 등장에 간수와 경비들은 일제히 눈치를 보았다. 주변을 메운 긴장 속에서 제이머 필이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상한 자들이 대체 누구이며 어째서 찾아오셨는지, 이제 말씀하여 주실 수 있겠군요. 이번 일과 관련된 사안입니까?”
“아니. 그것과는 관련 없네. 갇혀 있는 이들 중 각성자의 능력으로 피해를 입은 듯한 이들을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지.”
“예?”
제이머 필이 어리둥절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여기에 각성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어디까지나 평범한 이들일 거라네. 단지 능력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뿐이지. 필 경은 각성자의 능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갑작스레 바뀐 화제에 제이머 필은 불쾌한 눈빛을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저는 잘…… 모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어제 이곳을 방문했던 내 단원들은 모두 각성자야. 그리고 마병단은 각성자와 관련된 사건에 대해 우선 수사할 권한이 있지. 더 이상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우선 그들을 찾고 싶군.”
요약하자면 각성자가 아닌 이상 자세히 설명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제이머 필은 기막힌 숨을 토해 내고는 간수 한 명을 불러 안내를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