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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48화 (348/805)

348화

참으로 키시아르다운 위로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말 속에서 유더가 무슨 서투른 연기를 해도 감당할 수 있다는 듯한 자신감이 느껴져 약간 미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마음을 다잡기는 편해지는군.’

어차피 그가 이 역할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은 건 모두 키시아르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 보았자 키시아르가 원하는 대로 그 혼자 모든 추문을 뒤집어쓴 채 끝날 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마따나 잘할 수 없다 해도 할 수 있는 한은 해 볼 셈이었다.

‘하다 보면 뭐든 나아지겠지. 늘 그랬듯이.’

생각을 정리하고 키시아르의 곁에 붙어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키 작은 관상용 나무가 별안간 비정상적으로 바스락거렸다.

“단장님, 조심하십시오.”

반사적으로 키시아르의 앞으로 나서며 능력을 쓸 뻔했던 유더는 잠시 후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 한 마리를 보고 멈칫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양이……?’

“이런. 저런 작은 고양이에게서조차 날 지키려 하다니. 두근거릴 만큼 멋졌지만 부디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좀 더 기억해 주지 않겠나?”

키시아르가 작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동안 고양이는 두 사람을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느릿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 코끝을 움찔거렸다. 가슴과 배는 희지만 얼굴과 등 부분은 적색이 도는 길고 노란 털을 지닌 녀석이었다.

“죄송합니다. 나한 같은 이도 타이누에 있으리라 생각했더니 조금… 지나치게 경계했습니다.”

대답하는 동안 유더의 발밑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고양이가 다리에 몸을 슬쩍 비볐다.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이번에는 반대쪽으로도 몸을 비볐다.

“아무래도 그 녀석은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그냥 배가 고픈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제 프루엘레의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고양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쩐지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프루엘레의 동생이 혼자서 이런 곳을 돌아다닐 리 없는 데다 그들이라면 이제 곧 본채에서 만나게 될 터였다. 유더는 자꾸만 몸을 비비는 고양이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고양이는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계속해서 유더를 뒤따라왔다.

“…….”

“털이 깨끗한 것을 보면 이곳에서 기르는 고양이일 확률이 높겠군. 아무래도 본채 하인들에게 일러 주인을 찾아 주어야겠는걸.”

키시아르가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유더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리자 이번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다가왔다.

“그거참 취향이 확실한 녀석인데.”

키시아르의 웃음 속에서 결국 유더는 키시아르 대신 고양이를 안아 들고 본채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본채 쪽은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하인들이 몹시 많았고,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분위기였다.

“펠레타 공작 전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산책을 하던 도중이었네. 그런데… 평소보다 밖에 나와 있는 이들이 많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그것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하인들은 펠레타 공작이 이 상황에 불쾌해한다고 생각한 듯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누군가가 한 발짝 뒤에 물러나 있던 유더를 발견하고는 상황조차 잊은 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잠깐. 고양이! 저기 고양이가!”

“고양이다! 고양이를 찾았다!”

주변 하인들이 일제히 유더에게로 몰려들었다. 고양이가 불쾌한 듯 털을 세우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이를 드러냈지만 유더가 한 발짝 물러나자 도로 얌전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고양이를 찾았다고? 어디냐.”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하인들에게 묻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달려온 이는 어제도 보았던 익숙한 붉은 머리칼의 타인 1공자였다.

프루엘레는 유더가 안고 있는 고양이를 보자마자 희게 질린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는 뒤늦게 숨을 몰아쉬며 키시아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프루엘레 반 타인이라고 합니다.”

그의 머리칼과 옷차림새는 어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정신이 없을 텐데도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사이임을 잊지 않고 행동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키시아르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타인 공자. 왔다는 말은 들었었지. 이 고양이가 자네의 고양이인가?”

“…전하의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여드려 송구합니다만, 그렇습니다.”

당연히 아니리라 여겼던 가정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유더는 제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의 무게가 몹시 무거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떨떠름하게 내려다보았다. 동물로 변신한다 해서 행동이나 습성까지 동물화되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고양이는 어디를 보아도 본래 인간이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고양이로 있는 쪽이 더 편한 이라 듣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키시아르 또한 고양이를 오랫동안 바라보다가는 다시 프루엘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몹시 많은 의미를 담은 눈빛이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갔다.

“그랬군. 어쩌다 잃어버렸나?”

“제 고양이는 경계심이 무척 많아서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아침을 방으로 가져다주기 위해 문을 연 하인을 보고 놀라 문틈으로 도망쳤는데, 이후 지금까지 찾지 못해 애태우던 중이었습니다.”

“글쎄……. 사람을 두려워한다기에는 내 보좌를 대단히 따르던데 말이야. 산책하던 도중 마주쳤는데, 이후 떨어지려 하지 않아 상당히 애를 먹었어. 혹시나 싶어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데려오길 잘했군.”

프루엘레는 고양이를 안고 있는 유더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셨군요.”

유더는 프루엘레에게 고양이를 도로 건네주었다. 여태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고양이는 프루엘레의 손에 넘어가고 나서야 처음으로 아주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프루엘레는 작게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감사의 인사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제 고양이를 찾아주신 은인이신데 어찌 대접도 하지 않고 그냥 보내드릴 수 있겠습니까. 잠시 올라가 차를 드시고 가심이 어떠실지요.”

본래 예정했던 상황에서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답은 어차피 이미 정해져 있었다. 키시아르는 ‘때마침’ 할 일이 없으니 그렇게 해도 괜찮겠다는 심드렁한 답을 한 뒤 유더와 함께 프루엘레가 머무는 본채 내부의 손님방으로 향했다. 프루엘레는 직접 우린 차를 대접하고 싶다는 이유로 하인들을 모두 물린 뒤에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맙소사, 니폴렌.”

하인들의 앞에서 평범한 귀족가의 자제답게 꼿꼿한 자세를 지키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니 그토록 조심하라고 했잖아. 공작 전하께서 너를 발견해 주셨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는지……!”

저가 잘못한 것은 알았는지, 고양이는 프루엘레의 시선을 피해 앞발을 핥았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키시아르가 의자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

“그 고양이가 정말 자네의 막냇동생인가? 보고도 믿기가 어렵군.”

“예. 맞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제 동생, 니폴렌 반 타인입니다.”

“지금 여기서 인간 모습으로 돌아올 순 없는 건가? 궁금한 부분이 있어 직접 묻고 싶은데.”

“조금 진정시킨 후에 말해 보겠습니다. 니폴렌은 어제 말씀드렸듯 가문 특유의 질병을 타고난 터라,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몸이 좋지 않은 건 아닌 듯한데… 정신 쪽의 문제인가?”

“네. 맞습니다.”

프루엘레는 그렇게 말한 뒤 고양이를 한참 동안 쓰다듬다 드디어 그 ‘가문 특유의 질병’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알려주었다.

“타인 가에서는 아주 가끔 사지와 의식이 멀쩡한데도 입을 다물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거부한 채 평생을 사는 이들이 태어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안에 가라앉은 채 보내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외부의 자극은 무시하거나 혹은 두려워하지요.”

프루엘레는 그 병증이 하나의 관심사에만 집착하는 타인 가의 보편적인 형질을 짙게 타고난 이들에게 나타나는 증세이리라 짐작했다. 그리 생각하면 형질이 좀 더 짙느냐, 아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타인 가의 인간이라면 모두 니폴렌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니폴렌의 경우는 병증이 아주 심하지 않아 타인과 간혹 의사소통을 나누고 제 뜻을 외부에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이는 형제들밖에 없었다.

“직접 만나보면 병증이 있다 하여도 함께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부모님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지요.”

도박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보다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가 훨씬 낫지 않느냐고 프루엘레는 말했다.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던 프루엘레의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법했다.

프루엘레는 고양이를 위해 작은 물그릇을 가져다주었다. 고양이가 물을 마시고서 털을 핥으며 안정을 취하는 동안, 세 사람은 본래 해야 했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젯밤 본채로 돌아온 뒤 빌름 남작을 만나 보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가문의 정보를 토대로 이것저것 묻다 보니 생각보다 쉽게 비밀 무역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더군요. 그가 다음 공작이 제가 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빌름 남작은 타인 공작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이였으나, 그것이 진정한 충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타인 가의 자비가 없으면 언제든 타이누의 영주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연히 다음 타인 공작이 될 확률이 높은 1공자 프루엘레의 말에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

“남작의 말에 의하면 대삼림에서 죽은 기사 3인은 그곳의 거점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새로운 투자 사업과 관련한 정보를 소거하는 임무를 맡았던 듯합니다. 저는 그 투자 사업이 전하께서 말씀하신 ‘비밀 무역’이리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진행했습니다. 그랬더니….”

프루엘레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타인 공작이 가문의 일원들에게도 대부분 비밀로 한 채 1년여 전부터 진행 중이었던 새로운 투자 사업은 대단히 더럽고 구역질 나는 구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서부에 위치한 타국의 세력가들과 손을 잡고 본래 수입해 올 수 없는 것들을 들여오는 일에 많은 돈을 대신 듯합니다. 그것들을 더 은밀하게 잘 들여오기 위해서 1년 전쯤부터 거점을 새로 뚫느라 고생했다는 남작의 말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들을 들여오는지도 말해 주던가?”

“한둘이 아닌 듯했지만, 가장 까다로운 건… 사람이었다고 말하더군요.”

프루엘레의 암적색 눈동자 위로 어두운 기색이 일렁였다.

“그보다 자세한 부분은 시간 관계상 더 듣지 못했습니다만 남작의 가신 중 어린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잘 아는 이들이 있어 연락을 취해 둔 상황입니다. 내일 안으로는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키시아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루엘레가 말해 준 정보 중 아주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뢰를 높이기에는 충분했다.

‘시험에 통과했군.’

“고맙네. 짧은 시간 동안 의심을 살지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알아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애써 주었어.”

“아닙니다.”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칭찬을 하자 프루엘레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랐던 비밀 무역 건에 대해 전하께서 먼저 언급해 주셨다는 건, 이 정도는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이 정도로 애썼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제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생겨 무척 기쁜데요.”

프루엘레가 소리 없이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얌전히 앉아 있던 고양이에게로 다가가 몸을 수그리고 가만히 속삭였다.

“자, 지금쯤이면 돌아올 수 있겠지? 니폴렌.”

그러자 고양이의 몸이 앉은 채로 순식간에 불룩거리며 커졌다. 잠시 후 그 자리에 작고 가냘파 보이는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이목구비를 지닌 프루엘레와 달리 니폴렌은 티 하나 없이 흰 피부와 성별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서로 닮은 머리 색과 눈동자 색만 아니었다면 피를 나눈 사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리군. 몇 살이지?”

“얼마 전 생일이 지나 13살이 되었습니다.”

13세라면 마병단 최연소 단원인 지미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몸집만 보아서는 조금도 그리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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