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47화 (347/805)

347화

“…그랬습니까?”

“그랬지.”

유더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의 생활은 딱히 이전 생의 일들처럼 묻어 둘 필요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나서서 이야기를 할 만큼 얘깃거리가 많지도 않았다. 이웃을 만나려면 반나절 가까이 산을 내려가야 하는 외딴 오두막집 생활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겠는가? 굳이 말할 이유도, 기억할 필요도 없다 여겼던 작은 기억 하나에 저토록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복잡해졌다.

제가 수상해 보이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태껏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키시아르의 묵인과 기다림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키시아르는 당사자인 유더조차 때로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리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 느낌이었다.

‘…하긴, 당연한가.’

유더는 즐거워하는 사내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인데 그렇게 기뻐하실 줄 몰랐습니다.”

“네 이야기인데 별것이 아닐 리가.”

마주친 눈동자가 선명히 반짝였다.

“…좀 더 궁금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부 답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키시아르는 손가락 안에 뒤엉킨 유더의 앞머리칼을 쓸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음… 이런 건 갑작스레 받은 선물 같을 때 더 기쁜 법이야. 하지만 어린 시절의 네가 어땠을지 볼 수 없는 건 조금 아쉬워. 분명히 천사처럼 귀여웠겠지.”

“아니요. 할아버지께서도 그런 말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유더는 솔직하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왜지? 지금도 이렇게 귀여운데.”

천연덕스러운 반문에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답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누가 봐도 천사처럼 귀여운 아이라 불릴 만한 건 눈앞에 있는 사내의 어린 시절 쪽이었을 터였다. 지금도 이토록 과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예전이라고 무엇이 그리 다를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진짜 천사의 현신처럼 보였으리라.

지금이라면 아마 그 시절 초상화가 남아 있겠지만, 이전 생에는 카치안 황제가 전 황가의 흔적을 모조리 치워 버려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억지로 찾아본다면 정보를 알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러지 않았으니 키시아르의 어린 시절은 아직 상당수가 미지의 영역이었다.

“저를 그렇게 표현하는 건 단장님뿐이실 겁니다.”

“내 미의식은 멀쩡해. 보이는 그대로를 말할 뿐이라고.”

진지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점차 머리칼을 넘어 귓가를 쓰다듬었다. 뒤이어 왼쪽 눈가로 내려온 손가락이 장난스럽게 살살 아래를 쓰는 감각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몇 번 그런 식으로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다시 뜨는 동안 점차 잊고 있던 노곤함이 밀려오며 전신이 나른해졌다.

“졸린가 보군.”

“아닙…니다.”

‘오늘은 충분히 쉬었으니 반드시 키시아르 쪽이 먼저 자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잘 생각이었는데.’

눈에 힘을 주고 거부하려 해도 달려오는 수마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억지로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았는지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아직 덜 회복되었으면서 낮에는 늘 그런 건 잊은 양 행동하니 몸이 피곤할 수밖에. 나도 잘 테니 잘 자게.”

희미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유더는 깊이 잠들었다.

***

다음 날 유더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일어났다. 멀지 않은 욕실에서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조금 열고 찬 바람을 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손가락 하나를 들어 창밖의 나무를 가리키자 날카로운 바람이 쏘아져 날아가 굵은 나뭇가지를 뒤흔들었다. 아침을 맞이하여 울던 새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날아올랐다.

‘…확실히 약을 먹기 전보다는 내뿜을 수 있는 힘이 많아졌지만, 뭔가 더 갑갑해졌어.’

거울을 통해 본 왼쪽 눈동자에도 여전히 검은 얼룩이 장막처럼 드리운 상태였다. 그 검은 얼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 명확했다. 아직 흡수한 독이 거기에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마법은 성공했는데 대체 왜 이 이상 빠르게 없어지지 않는 걸까.’

힘을 쓰려 할 때 유더는 무언가에 가로막히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지니고 있는 힘의 양에 비해 내뿜을 수 있는 양이 더 적은 듯 느껴지는 탓이었다.

‘몸 안에 성질이 다른 힘이 융합되지 못한 채 있는 탓인가.’

이논은 유더가 증폭진 흔적 해제 마법을 받기 전 이미 흡수된 몬스터의 독성이 회복을 느리게 하는 영향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여태까지 유더의 몸에 존재했던 힘은 그가 지닌 본래의 힘, 붉은 돌에서 나온 순수한 힘, 그리고 키시아르에게서 흡수했던 힘으로 결국에는 모두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힘과 상극인 몬스터의 피를 통해 독과 증폭진의 흔적을 흡수한 탓인지 영 회복이 더뎠다.

때문에 이논은 회복되고자 하는 몸의 기력을 활성화시켜 주는 약을 처방해 주었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이 갑갑함이 해결될 수 있을까?

‘뭔가를 더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뭘 해야 하는 거지.’

이전까지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초조할 일은 없다 여겼지만 어제부로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눈 위쪽을 도려낸 다음 신성력이라도 받으면 나아질까.’

잠시 흉흉한 생각을 했던 유더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증폭진의 흔적이 사라졌음에도 눈을 가린 얼룩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이미 지나치게 깊이 흡수되어 몸에 뿌리를 박은 식물처럼 자연스럽게 공생하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라면, 억지로 도려내어 치료해도 고통만 받을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유더는 먼저 씻고 나온 키시아르가 저를 부를 때까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지?”

“힘이 회복된 정도를 살피고 있었습니다만…….”

키시아르는 제 상태의 변화와 추측이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 권리가 충분하고도 남는 이였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이전까지 그가 하고 있던 생각들을 모두 설명했다. 고민을 들은 키시아르는 그가 갑자기 회복에 대해 빠른 의지를 보이게 된 이유를 짐작하는 듯 눈썹을 찌푸린 채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회복이 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니, 조바심을 내지는 말게. 서둘러서는 될 일도 안 될 테니까.”

“…예.”

“눈을 도려내겠다는 끔찍한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효과가 없을 확률이 높다는 건 압니다. 그냥 해 본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키시아르의 표정은 한동안 풀리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은 다른 이들과 함께 아침을 들고, 그 다음에 타인 공자를 만나러 가 보지.”

키시아르는 준비를 마친 유더와 함께 방을 나서자마자 자연스럽게 허리를 끌어당겨 곁에 붙였다. 복도를 지나던 빌름 가의 하인들이 일제히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마병단원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홀로 내려가자 먼저 와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다들 노는 척을 잘 하고 있었는지 안색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반지르르했다.

유더는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떨고 있는 동료들을 스쳐 지나가 키시아르의 곁에 착석했다. 잠시 후 조금 늦게 모습을 드러낸 에버가 유더의 맞은편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단장님, 오랜만에 아침부터 뵙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유더도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모처럼 일찍 일어나는 것도 좋을 것 같더군. 자네는 어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나?”

어제 치안 관리단에 가서 나그란의 별과 관련된 일을 잘 조사했느냐는 뜻을 내포한 질문에 에버가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들은 대로 핀나드 광장에 볼거리가 많더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아! 칸나에게 줄 선물도 샀네요.”

“이런. 칸나 완드의 것만?”

“물론 단장님과 유더의 몫도 샀지요. 별건 아니라 부끄럽지만 받아 주시겠어요?”

“유능한 신과 부단장의 선물이라면 거절할 수 없지.”

그들의 앞에 음식 접시를 놓고 사라지는 빌름 가의 하인들은 그 한심한 대화에 은밀히 코끝을 씰룩대며 헛웃음을 삼켰지만, 유더의 귀에는 전혀 다른 정보들이 파악되었다.

‘해당 장소는 핀나드 광장이란 곳 근처에 있고, 생각했던 대로 기억을 잃은 걸인 무리가 이곳에 잡혀 있었나 보군. 칸나를 언급한 건 대삼림에 있던 마을이 새로이 이동한 장소가 타이누 근처일지 모른다는 정보와 관련된 뭔가를 알아냈다는 뜻일 테니… 결국 에버의 추측이 맞았단 이야긴가.’

“단장님과 유더도 오늘은 핀나드 광장에 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 날씨가 좋으니 분명 즐거운 나들이가 될 거예요. 가신다면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군. 보좌는 어떻지?”

“당연히 정말 좋습니다.”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담은 대답이었지만 반응은 처참했다. 유더는 하인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손을 내젓는 에버와 급격하게 여기저기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떠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러면 오후에 할 일이 없거든 가 보자고. 어쩌면 나가고 싶지 않아질지도 모르겠지만.”

느긋하게 웃은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눈을 살짝 찡긋하고 나서야 그 분위기는 겨우 조금 사그라졌다.

‘왜 저쪽은 별말을 안 해도 다들 믿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 더 낫다는 걸까.’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식사를 마쳤다. 키시아르는 산책을 명목으로 유더만을 데리고 본채로 향하는 정원으로 나갔다. 아무도 그들과 함께 걷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썰렁했다.

“…단장님께서도 제가 입을 여는 쪽이 역할극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제대로 역할을 완수하려 할 때마다 반응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상관없지 않나. 어느 쪽이든 문제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키시아르가 가볍게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굳이 지나치게 잘 하려 할 필요는 없어. 기왕 결심했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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