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변신 능력을 지닌 각성자 자체는 이전 생에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몹시 드물었다. 가장 흔한 경우는 특정 동물이나 사물과 비슷하게 변하는 것이었고, 개중에는 몬스터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변신하여 범죄를 여럿 저지른 자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다양한 변신이 가능할수록 집중력의 한계가 빨리 오기에 지속시간이 짧고, 완벽한 변신을 위해서는 대상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루엘레 또한 그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는 능력은 아닌 듯했지만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말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나한의 환상 능력이 대단한 이유 또한 그래서였으니까.’
나한의 환상은 범위를 지정하여 그 안에 들어선 목표 대상의 인식을 바꿈으로써 변신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다. 환상 능력을 그 정도로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머리도 대단했지만, 사실 진짜 대단한 것은 그럴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강한 정신력 쪽이었다.
정신력이란 곧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서 발휘 가능한 의지를 뜻한다. 유더는 나한의 정신력이 강한 이유가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신념에 있으리라 짐작했다. 다소 일그러져 있기는 해도 그토록 강렬한 고집과 신념이 토대가 되어주고 있으니 그의 능력도 그만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마병단 부단장이 되면서 의지가 단단해진 칸나의 능력이 훌쩍 발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서 반대로 그게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유더는 프루엘레가 보여준 변신력의 이면에도 아마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만큼 강력한 의지가 뒷받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각성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벌써 그 수준으로 힘을 다룰 수 있다면 수련 여하에 따라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대단한 능력자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런 인재가 이전 생에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묻혔다는 게 전직 마병단장 입장에서 새삼스레 아까울 정도였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집안을 떠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페토처럼 뒤집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라면 그에게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던 청년이 드러내 보인 찰나의 감정, 그리고 그가 품고 있을 의지의 이면을 생각하며 유더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프루엘레 반 타인 1공자. 사교계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기로 유명한 이인데 먼 길을 왔군.”
서부 귀족들이 초청한 살롱에 다녀온 키시아르는 프루엘레 반 타인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그에 대한 정보를 읊었다.
“타인 가가 전체적으로 그렇기는 하지만, 현 타인 공작과 부인은 유독 자식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말이야. 1공자를 비롯한 자식들 모두 성장 과정 내내 알려진 소식이 없어 거의 공백인 데다 사교계에도 모습을 안 비추고, 친한 이도 없으니 존재감이 없는 편이지.”
“자식들을 방치했다는 겁니까?”
“좋게 말하자면 자유로운 분위기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어깨에 두른 망토의 핀을 빼내며 몸을 돌린 키시아르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타인 1공자가 여기까지 와서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그러면 그분을 만나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겠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널 먼저 찾아와 말을 전해달라 한 잔머리도 꽤 흥미로우니.”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낸 키시아르가 유더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늘 내내 세 명이 그곳에 앉아 유더를 마주 보았었지만, 키시아르만큼 남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처럼 여유롭게 몸을 기댄 사내가 눈을 내리깔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나가기 전과 달리 약간 피로해 보이는 눈빛 사이로 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과 같은 온기가 일렁였다.
“그래서… 내 보좌가 오늘 한 일은 타인 1공자를 만난 것 외엔 없었나?”
“에버와 이논도 잠시 만났습니다.”
유더는 에버를 만나 받은 동료들의 편지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그러나 이논에게 성욕감퇴제를 받은 일은 그리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간략히 ‘어제부터 오른 열과 약 사이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들었다’고만 언급했다.
“그래……. 쉬면서 기분이 많이 나아진 듯하니 다행이군.”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기대한 만큼 재미없었지.”
즉각 답변이 돌아왔다.
“음침하게 반응을 떠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는지 페트리쿤의 아리아를 연속 다섯 번이나 듣게 하더군.”
페트리쿤은 먼 옛날 살았다고 알려진 장군으로, 주색잡기에 빠져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고 남자 애인에게 찔려 죽는 극적인 파멸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한 이였다. 그의 이야기는 노래와 시로 다수 만들어져 지금도 자주 불렸다.
“…불쾌하셨겠군요.”
“괜찮아. 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도 안 듣고 있었으니까.”
키시아르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답했다.
“닿지 않는 창이 목표를 상처입힐 수는 없는 법이지.”
“…….”
“그런 것보다 나는 네 쪽이 훨씬 걱정되었어.”
유더는 순간적으로 손끝이 움찔 떨리는 감각을 느꼈다. 아침에 느꼈던 반사적인 울렁임과는 다른 감정으로 인해 가슴 속이 조금 고통스러워졌다.
“내가 보기에는 쉬는 동안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어떤가. 오늘 쉬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나?”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칼날보다 빠르게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키시아르는 그 방면에서 분명 최고의 공격수일 터였다.
유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는 숨을 깊이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기분도… 나아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제 기분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경험이 지독하게 낯설어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그의 기분 변화 따위에 이토록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단 한 사람의 관심사 정중앙에 놓여 있는 현실을 자각하는 건 마치 뜨거운 장작불 위에 놓인 채 타오르는 주전자가 된 기분이었다. 사실 그 한 사람이 키시아르였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끓는 주전자 따위보다 더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맛있는 저녁을 들며 좀 더 마음을 기쁘게 만들어 볼까.”
키시아르가 흔쾌한 얼굴로 하인들을 부르는 줄을 당겼다.
“사실 함께 저녁을 들고 싶어서 빨리 돌아왔다고 말하면 믿겠나?”
농담 같은 태도였지만 키시아르라면 정말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기도 했었다.
“…모임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돌아오셨습니까?”
“당연하지. 아리아가 너무 길어져 다 듣고 나면 시간을 놓칠 것 같기에, 노래를 들을 기회는 앞으로도 많지만 나를 기다리는 미인과 오늘의 저녁 식사를 하는 영광은 한 번밖에 못 누린다고 말하고 왔네. 다들 질겁하더군.”
“…….”
키시아르가 악동처럼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빌름 남작의 하인들이 들어오자 그는 서부의 특산물로 만든 요리가 먹고 싶다며 유더가 알지 못하는 몇몇 요리를 주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모두 처음 보는 재료로 만든 후식으로 하나같이 혀가 아릴 만큼 달았다. 서부 귀족들의 모임에 나가서 얻어 온 정보가 그런 것뿐인가 의심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가 제 보좌의 입맛을 다소 편향된 방향으로 판단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유더는 평소처럼 묵묵히 손을 움직여 제 앞에 놓인 음식들을 삼켰다.
“타인 가의 공자는 아직 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그동안 대삼림에서 온 보고 편지를 읽어봐야겠군.”
유더보다 훨씬 빠르게 식사를 마친 키시아르가 품속에서 꺼낸 작은 편지들을 펼쳤다. 당연하지만 그것들은 유더가 받은 편지보다 훨씬 양이 많았다.
“칸나가 타인 공작가의 불법 무역과 관련된 정황증거를 발견한 것 같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음… 그런 것 같군.”
빠르게 읽어내린 편지 몇 장을 뒤적인 키시아르가 무심히 대답했다.
“우리가 발견했던 천 조각에서 읽어낸 정보를 토대로 몇몇 장소를 더 뒤졌는데, 거기서 팔려 온 이들과 마약이 오간 경로를 찾아낸 모양이야. 대삼림에 있는 거점을 거쳐 타이누 쪽으로 향한 듯하다고 하는데, 역시 중간 거점이 여기 있을 거란 판단이 더욱 확실해졌어.”
“나한과 나그란의 별 측도 그 정보를 이미 알고 있겠군요.”
“누가 먼저 그 중간 거점을 찾아내느냐의 문제겠지.”
키시아르가 편지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빌름 남작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살롱에서 만난 귀족들의 말은 다르더군.”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그들의 말로는…….”
그때, 밖에서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먹은 접시를 치우기 위해 다시 방문한 하인들이었다. 키시아르가 잠시 입을 다문 사이 안으로 들어온 하인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릇을 치우고 정돈한 뒤 빠져나갔으나, 단 한 명의 하인만은 마지막까지 테이블보를 정리하느라 다른 이들과 함께 나가지 않았다.
홀로 남아 테이블보를 만지고 있던 하인이 잠시 후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정확히 키시아르 쪽을 바라보다 이윽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펠레타 공작 전하. 이런 방법으로 뵙게 되는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타인 1공자인가?”
“프루엘레 반 타인입니다.”
태연히 답하며 만지작거리던 테이블보를 놓은 남자가 잠시 후 눈 깜짝할 사이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금빛을 띤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주근깨가 선명한 청년의 얼굴을 본 키시아르가 이내 유더를 향할 때와는 전혀 다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과연. 보좌에게 들은 대로 흥미로운 능력을 지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