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42화 (342/805)

342화

가까이서 본 타인 가의 1공자, 프루엘레 반 타인은 외모도, 성격도 여타의 귀족 청년들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여태 유더가 보아 왔던 귀족 청년들은 대개 키올레나 에이셰스, 혹은 레노어처럼 뛰어난 외모에 그렇지 못한 성격을 지닌 이들이 대다수였다. 레블린 샨 아페토와 같이 기적적으로 인성이 좋은 경우에도 외모만은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해 타고난 혈통을 짐작케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프루엘레는 가문 특유의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어디서나 볼 법한 평민 청년이라 오해할 만큼 상대적으로 평범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주근깨가 선명한 콧잔등과 솔직해 보이는 미소를 띤 입술이 그런 이미지를 한층 더해주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의 미소 속에서 약간의 경직된 긴장감을 읽어냈다. 귀족가의 자제답게 표정 관리를 잘 하는 듯 보여도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오랫동안 평정을 지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은 대개 세월이 발전시켜 주는 법이었다.

마병단 입단에 대해 묻고 싶어 홀로 찾아왔다는 당돌하고도 비밀스러운 청년. 그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유더는 제가 그를 관찰하는 것만큼이나 유심히 저를 보고 있는 프루엘레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찾아오신 이유가 마병단 입단 때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마병단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알고 싶어. 아페토의 3공자처럼 말이야.”

수도에 있을 레블린의 이름이 나온 순간 유더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가는 도로 풀렸다. 프루엘레는 그의 미약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말을 이었다.

“나 또한 그처럼 각성자야. 가문에는 여태 숨기고 있었지만, 아페토 3공자의 일을 보면서 나도 숨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렇다면 어째서 수도에서 연락을 주지 않으시고 지금 찾아오신 겁니까?”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했거든. 수도에 있는 마병단을 갑작스레 찾아가면 의도를 의심받았겠지만, 여기라면 아버지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프루엘레는 자신이 어릴 때 잠시 타이누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마음이 내키면 가끔 타이누에 갑작스럽게 방문하고는 했기에, 타인 공작과 빌름 남작은 이번 일도 그 연장선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곳에 온 김에 마침 서부의 영웅인 마병단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작스레 흥미를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게다가 거대한 몬스터를 홀로 쓰러트린 장본인이 마침 혼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만나고 싶어 하겠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게 전부는 아닐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더는 그의 암적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서글서글한 웃음 뒤에 감춘 긴장감의 정체가 궁금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각성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으시다면 굳이 마병단에 입단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가문을 두고 굳이 이곳에 들어오시고 싶은 이유로는 납득이 어렵습니다.”

“내가 1공자라서 그러는 거라면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프루엘레가 솔직하게 대답하며 입술 끝을 올렸다.

“각성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그 즉시 나는 후계자 자리에 이름을 올릴 자격을 잃게 될 거야. 어쩌면 평생 유폐될지도 모르지. 지금이야 잘 감추고 있다지만 언제까지고 들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애초에 나는 공작위를 잇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어.”

대담한 말에 순간적으로 주변을 두른 공기가 차가워졌다. 유더는 프루엘레의 눈을 통해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공작위에 정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내가 마병단에 입단하게 된다면, 그야 가문이 좀 뒤집어지기는 하겠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화를 내실 거야. 하지만 그냥 그뿐이야. 후계가 아니라 아직까지는 그저 1공자일 뿐인 지금이 빠져나가기에 가장 적절해.”

“그러니까… 가문을 잇고 싶으신 생각이 없기에 대신 마병단 입단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빌름 남작에게 들은 것보다 훨씬 직설적이네. 그래, 정확히 그거야.”

“대단히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리 될 경우 공자의 거취를 두고 레블린 님 때처럼 수많은 다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황제의 동생인 키시아르가 단장으로 있는 마병단과 4대 공작가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다. 레블린 샨 아페토가 임시 단원이 된 사건을 두고 아페토 가와 키시아르가 다투었던 일들로 인해 그 사실은 더욱 공고해졌다. 물론 레블린 때에는 아페토 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환으로 일부러 일으킨 사건이었기에 그 뒤에 일어난 다툼 또한 예정된 계획의 일부나 다름없었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프루엘레가 타인 가의 1공자인 이상, 그의 의지와 별개로 이 일은 결코 정치적인 문제를 떼어놓을 수 없다. 프루엘레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가문의 적과 같은 이곳에 들어오고 싶다 몰래 밝히는 이유가 정말 그것뿐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 부분을 노린 건가?’

유더는 새삼스레 프루엘레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 속에 서린 긴장감은 방금보다 조금 더 짙어진 상태였다.

그 순간 오랜 경험을 통한 감이 머릿속에서 번득였다.

“공자께서는…… 가문에서 그냥 빠져나오길 원하는 게 아니군요.”

유더의 말에 프루엘레가 침묵을 지켰다.

“레블린 님을 먼저 언급하신 이유가 혹시.”

“그래. 말했잖아. 그 일을 보고 나서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동기를 얻었다고.”

유더의 말을 자르며 대꾸한 청년이 비로소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웃음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쾌활해 보였던 첫인상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차갑고 무기력해 보였다.

“그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본 결과, 나는 황제 폐하께서 펠레타 공작 전하와 마병단을 통해 아페토의 3공자와 어떤 거래를 했다는 결론을 내렸어. 그리하여 아페토가 현재처럼 변한 거라면 나도 그와 같은 거래를 하고 싶어.”

유더는 프루엘레의 첫인상을 다소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평범해 보이는 외견 속에 든 건 놀라울 만큼 명확한 판단력이었다.

“…제가 판단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장님이 계실 때 다시 찾아와 주셔야겠군요.”

“그렇게 답할 거라 생각했어.”

프루엘레는 유더에게 당장 답을 내어놓으라 촉구하지 않았다.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는 언제 돌아오시지?”

“오늘 내로는 돌아오실 겁니다.”

“그렇다면 밤늦게 찾아뵈어도 괜찮을까.”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만, 확실히 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 그 정도라도 좋아. 뵙게 해 주신다면 그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프루엘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신을 먼저 찾아오기를 잘 했어. 개인적으로 대삼림의 영웅이 어떤 이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펠레타 공작 전하와 한 숙소를 쓴다는 이는 어떤 이일지도 몹시 궁금했었거든.”

유더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프루엘레의 눈빛 속에는 빌름 남작이나 서부의 다른 귀족들 같은 멸시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인지 판단은 되셨습니까?”

“적어도 내가 들은 것처럼 권위에 짓눌려 다리를 벌리는 그런 이는 아닌 게 확실해 보여. 내가 타인 가의 1공자라 소개했을 때도 당신은 전혀 놀라지 않았지. 지금도 말투는 정중하지만 눈빛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지닌 신분이나 알량한 권력 따위에 겁을 먹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지.”

“…….”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세상에는 많아. 아버지는 평생 모르실 테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프루엘레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뜻을 당장 믿어 달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펠레타 공작 전하께 부디 이야기를 잘 부탁할게. 적어도 만나 뵙게는 해 주었으면 좋겠어.”

유더는 그 손을 잡지 않고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공자의 능력이 무엇인지 아직 듣지 못했군요.”

“경계심이 아주 강하네. 과연 다양한 각성자들을 만나본 마병단원이라 그런가.”

손을 내린 프루엘레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능력은 변신하는 거야.”

“…어떤 쪽으로 변하는 겁니까?”

“내가 만나본 사람으로 변할 수 있어.”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순간, 유더는 눈앞에 있는 이의 모습이 프루엘레에서 빌름 남작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봐. 정확하지?”

목소리도, 입고 있는 옷도 모두 아까 보았던 빌름 남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뜨자 빌름 남작은 다시 금빛을 띤 붉은 머리칼의 청년으로 뒤바뀌었다. 그 변화가 너무나 빨라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

“오래는 못 해. 완벽하게 바뀌려면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거든. 하지만 몸을 숨기고 어디론가 가고 싶을 때는 꽤 유용하지. 이번처럼 말이야.”

이토록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는 건 프루엘레가 그만큼 유더에게 신뢰를 보여주겠다는 뜻을 내보인 것과 다름없었다. 유더는 그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드문 능력을 지니셨습니다.”

“칭찬 고마워. 가문에서 빠져나가 마병단에 가고 싶은 건 진심이라서, 그런 평을 받으니 생각보다 더 기쁘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