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1공자? 그게 누구였지.’341화
이전 생의 타인 공작은 유더가 죽을 때까지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기에 그의 자식들에 대한 기억은 몹시 희미했다. 아페토 가처럼 후계가 정해지는 과정에서 소음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디아카 가처럼 카치안 황제와 긴밀히 연결된 가문도 아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유더는 기억을 한참 더듬고 나서야 타인 공작에게 자식이 넷 정도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계자는 공자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유더가 기억하기로 타인 공작가의 후계자는 공녀였다. 보통은 첫 번째 자식이 후계자의 자리를 거머쥔다 해도 이전 생의 레노어 샨 아페토처럼 그 아래 자식들이 후계가 된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죽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스스로 포기했나?’
어느 쪽이든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이전 생에 타인 공작가의 후계가 되지 못한 1공자가 이런 시기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일지는 대단히 신경이 쓰였다.
유더는 타인 가의 1공자에 대한 기억을 좀 더 떠올려 보려 노력하려다 결국 포기하고 방을 나섰다. 단원들이 자주 모이고는 하는 응접실 쪽으로 향하자 에버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유더! 대화는 잘 끝냈어요?”
대부분의 단원들이 밖으로 빠져나간 터라 응접실은 한산했다. 유더는 빌름 가의 하인들이 없음을 확인한 뒤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네.”
“별 일 없었던 것 맞죠?”
“타인 가 쪽에서 제게 관심을 보이는 중이니 잘 생각해 보라는 말만 하고 가더군요.”
제가 찾아온 이유를 단장에게조차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빌름의 말을 유더는 아무렇지 않게 단숨에 어겼다.
“타인 공작가 쪽에서요? 괜찮은 거예요?”
“이미 단장님께서 모두 예상했던 일입니다.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으니 괜찮습니다.”
그들이 왜 유더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이유를 빤히 짐작했을 에버는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찌푸린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조심해요 유더. 단장님께도 꼭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요.”
“네.”
“그럼 전 이제 타이누의 치안 관리단 쪽으로 가봐야겠어요.”
에버의 말로는 타이누에 머무는 경비대와 기사들이 모두 치안 관리단이라는 곳에 있어서, 죄 지은 이들을 가두고 처벌을 결정하는 일도 그쪽에서 처리한다는 듯했다.
“들어갈 방법은 찾았습니까?”
“단장님께 허락을 맡으면서 물어봤더니, 단장님 이름을 마음대로 팔아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일단 대삼림에서 일어난 기사 살해범과 관련하여 단장님께서 의견을 듣고 싶어한다는 핑계를 대고 가서 감옥 쪽까지 살펴볼 생각이에요.”
“좋은 방법이군요.”
“그렇죠? 최대한 뻔뻔하게 굴어야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단장님 덕분에 깨달았거든요.”
에버가 씩 웃었다.
“유더가 같이 갔으면 든든했을 텐데, 그것만 좀 아쉽네요.”
에버가 떠나고 나니 별채가 더욱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유더는 응접실에 나오지 않은 이논을 찾아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그는 제 숙소 안에 있었다.
“너 오늘은 단장 안 따라가고 쉰다며? 몸이 그렇게 안 좋아?”
“…….”
얼굴을 보자마자 내뱉는 말을 들으니 소문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퍼지는 모양이었다. 유더는 어젯밤부터 일어난 제 몸상태의 이상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네가 준 약을 먹은 뒤부터 자꾸 열이 나.”
“그럴 거라고 했었잖아. 체온이 너무 높아져서 그래?”
“그런 열이 아니야.”
“그 열이 아니면 무슨 열이 난다는 건데.”
유더는 체온을 재 보려는 듯 손을 들고 다가오는 이논을 막았다. 그는 드물게 망설이다 제 배 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성욕이 치솟을 때 오르는… 그런 열이 자꾸 난다고.”
“……무슨 욕?”
“성욕.”
이논이 도로 손을 내렸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몹시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더를 바라보았다.
“…그걸 먹는다고 그런 증상이 일어나진 않을 텐데?”
“확실해?”
“확실……하다고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보통은 그렇지. 내가 미쳤다고 흥분제 성분이 든 걸 주겠어?”
어제부터 치솟던 열과 이상한 꿈의 원인이 어느 정도는 그 약에 있으리라 믿었던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논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일을 저지른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날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보통 사람과 다른 몸상태라서 이상한 반응을 일으켰을 확률은?”
“그것까지 내가 알면 이딴 소릴 듣고 있진 않겠지!”
버럭 소리친 이논이 유더의 옷자락을 끌고 들어와 강제로 앉혔다. 그는 목과 이마의 열을 잰 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체온에는 현재 아무 문제도 없다고 선언했다.
“체온은 멀쩡한데 지금도 그런 열이 치솟아?”
“아니. 지금은 아무 문제도 느껴지지 않아.”
“힘 회복이나 다른 부분은?”
“힘은… 먹기 전보다 조금 더 회복된 것 같지만 눈은 아직 안 보여.”
“그래. 그러면 그 성욕은 어떤 상황에서 느껴진 건데?”
유더는 이번에도 약간의 침묵을 끌다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것까지 꼭 이야기해야 할까.”
“설마 날 상대로 느낀 거라면 말하지 마.”
“그건 아니야.”
단호하게 대답하자 이논이 입술 끝을 꿈틀거리다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니라니 참 다행이다만, 내가 준 약 때문에 갑자기 없던 성욕이 치솟아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하려면 왜, 언제, 어떻게 그랬는지 증상 정도는 제대로 알려 줘야지. 어? 나라고 그런 걸 듣고 싶은 줄 알아? 알아야 진짜 문제가 생긴 건지 아닌지 판단을 할 것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결국 유더는 제대로 된 답을 말해주어야만 했다.
“특정 상대와 마주쳤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 그리고… 아침에 꿈을 꾸고 나서도 그랬고.”
“무슨 꿈? 야한 거? 설마 거기에도 그 특정 상대가 나오기라도 했어?”
그렇게 가볍게 설명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논의 표현이 완전히 틀리다 볼 수도 없었다. 유더가 침묵하자 이논이 미간을 더욱 사정없이 찌푸렸다.
“……진짜야?”
그는 기가 막힌 듯 허 하는 소리를 내뱉은 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건 확실하게 해 두자. 아무튼 약 때문은 아니야. 흥분했을 때 평소보다 더욱 체온이 오르면서 그렇게 느껴졌을 수는 있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흥분제 같은 역할을 하진 않아. 그건 확실해.”
“하지만 이전에는 이 정도로 갑작스럽게 열이 치솟거나 그런 꿈을 꾸었던 적이 없었어.”
“이걸 꼭 내가 말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인간은 원래 성욕을 느끼는 상대가 나타나면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되는 법이라고 했어.”
“……누가?”
“누군들 알아서 뭘 어쩌려고? 아무튼 네 상태가 그게 맞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잖아!”
“하지만 전에는…….”
“이전에 그런 적이 없다 해서 이번에도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미래를 바꾸겠다던 놈이 정작 자기가 바뀌니까 인정을 안 하고 애꿎은 약 탓을 하고 있네!”
너무나 직접적인 말에 유더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쨌든 아무런 징조도 없이 그런 일이 그냥 일어나지는 않아. 그런 건 좀 스스로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를 해. 그런 문제까지 내가 낫게 해 줄 수는 없으니까.”
“……알겠어. 약에 문제가 없었다는 건 제대로 알아들었으니 다음은 알아서 할게.”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그런데 너 말이야. 그 상대는…….”
무어라 중얼거리던 이논이 유더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점점 목소리를 낮추다가는 결국 말을 멈추었다. 그는 눈을 깜박이지 않은 채 유더를 노려보다 잠시 후 괜스레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헝클었다.
“아니, 됐다. 가라 가.”
“왜 그러는데.”
“내 생각이 맞아도 싫고, 틀리면 더 싫을 것 같다. 빨리 나가.”
눈앞에서 문이 거칠게 닫혔다.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이논이 유더의 손에 환약 몇 개를 강제로 쥐어주었다.
“이거나 가져가!”
“이게 뭔지는 말해 줘야지.”
“성욕 감퇴제.”
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유더는 물이 없이도 삼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약을 내려다보다 주머니에 넣었다.
키시아르의 숙소에는 아직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대신 모르는 불청객 한 명이 앞에 서 있다가는 숙소로 돌아온 유더를 보자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몸을 일으켜 섰다.
“당신이 유더 아일?”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유더는 상대를 경계하며 외견을 살폈다. 나이대는 그와 비슷해 보였으나, 키는 조금 더 컸다. 금빛이 도는 적색 머리칼에 키시아르의 것보다 훨씬 짙은 암적색 눈동자를 보자 어쩐지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프루엘레 반 타인이라고 한다. 마병단 입단에 대해 묻고 싶어서 찾아왔어.”
반 타인이라는 성을 지니고 갑작스레 모습을 나타낼 이라면 한 명뿐이었다. 유더는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타인 가의 1공자를 바라보며 오늘은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상황과 계속 마주치는 날인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혼자 오셨습니까?”
“하인들을 데리고 오길 바랐어? 혼자 오는 쪽이 이야기하기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는데.”
“아뇨.”
유더는 짐작했던 바와 좀 다른 성격을 지닌 듯한 낯선 청년을 바라보다 짤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