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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39화 (339/805)

339화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다른 할 일이 있다며 가볍게 대꾸한 키시아르가 문득 유더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왜 그리 안색이 좋지 않지?”

그가 손을 뻗은 순간, 반사적으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그 손을 피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은 꿈처럼 차가운 장갑을 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꿈이 또다시 의식 너머에서 되살아나 머릿속을 징징 울리며 자극했다.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쓴 보람이 없었다. 유더는 저를 바라보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가 않은데.”

눈치 빠른 사내에게 역시나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뭔가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꾸었나?”

유더는 순간적으로 손을 움켜쥐었다가 느리게 풀었다. 눈을 가리는 어둠이 가득했던 꿈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붉은 눈동자가 그를 걱정스럽게, 혹은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며 손 안쪽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예.”

“그럴 수 있지. 환경이 바뀌면 가끔 악몽을 꿀 때가 있으니까.”

키시아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답했다.

“단장님도 악몽을 꾸십니까?”

“인간이니 당연히 꾸고말고.”

당연한 말임을 알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인지 왠지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키시아르는 침묵을 지키는 유더를 향해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고, 대신 팔짱을 끼었다.

“나는 오늘 초대를 받은 서부 귀족들의 살롱에 갈 계획이지만, 기분이 많이 좋지 않거나 머리가 아프다면 꼭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으니 여기 있게.”

“그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아. 하루쯤은 네가 여기 있는 쪽이 오히려 다들 좋을 대로 오해하기 편할 테니까.”

키시아르는 필요하다면 루산과 이논을 이곳으로 불러줄 테니 진단을 받아 보라고 권유했다. 침묵 속에서 몸을 강제로 내리누르던 사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친밀하면서도 다정한 위로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유더는 호흡을 억제하여 조금이라도 더 침착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고작 그 정도로 진료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 내 보좌는 아직도 스스로를 아끼는 법을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으니 오늘은 내 말대로 쉬게.”

“그건 명령입니까?”

“부탁이지.”

“…….”

“내가 널 여기 데려온 이유는 조금이라도 편한 곳에서 몸을 쉬게 하기 위해서라고. 잊었나?”

결국 유더는 키시아르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바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서 별저를 빠져나가는 키시아르의 마차를 지켜보았다. 키시아르가 떠나기 전 하인들을 불러 따로 방 안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명을 내린 덕에, 적어도 3명 정도는 배불리 먹을 만한 양의 음식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더가 왜 홀로 남았는지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흘긋대는 하인들의 시선이 등 뒤로 따갑게 느껴졌지만 그는 그것을 모두 모른 체하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 꿈은 정말 내 기억인가?’

꿈속에서 느낀 감각들은 의식을 차린 뒤 빠르게 녹아내려 벌써 반쯤 흐릿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상대를 물어뜯고 할퀴며 밀어내다가도 또다시 발작적으로 끌어당기며 본능에 진 짐승처럼 중얼대던 제 모습에서 느낀 충격만은 아직 생생했다.

정말 제가 그러했을까? 그게 정말 저였던가? 욕망에 눈이 먼 짐승처럼 굴었던 건 상대 쪽만이 아니었던가.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한 번 관계를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떨어지지 않으려 들 만큼 끈질겼다.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밤이 가기 전에 몇 번쯤은 의식이 가물가물해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내내 의식이 날아가 흘레붙는 짐승들처럼 며칠을 달라붙었던 2성 발현 때의 사고 이후로는 그 정도로 심하게 의식을 통제하지 못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결국 착각이었던 것일까?

‘어쨌든 그 꿈이 이전 생의 기억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지.’

유더는 그 꿈을 꾸며 앞을 세웠다. 그건 그가 꿈속의 장면을 보며 충분히 자극을 느꼈다는 뜻이었다.

그런 꿈을 꾸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

눈 안쪽이 지끈거렸다. 유더는 제 목 부근을 매만지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내가 키시아르를 향한 욕망을 새로이 자각했기에 이런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르지.’

한 번 시작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키시아르 라 오르를 향한 유더 아일의 감정은 이미 스스로 손쓰기 어려운 부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 꿈은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현실을 자각하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라 여겼던 그 욕망도 실은 처음이 아니라면, 대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달라지고 있다 여겼던 모든 것이 실은 그렇지 않았고, 반복 끝에 똑같은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도중일 뿐이라면.

그렇다면…….

유더는 땀에 젖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를 욕망하고 갈구하는 데 자격이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세상에서 저만큼 그런 열기와 어울리지 않는 자도 없을 터였다.

‘꿈 한 번에 별 헛생각을 다 하는군. 그만하자.’

찬물을 끼얹은 듯 추워진 몸 안쪽에 다 식지 않은 잔열 찌꺼기가 남아 있는 듯한 감각이 몹시도 불쾌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유더. 어젯밤 단장님과 지나치게 뜨거운 시간을 보낸 바람에 오늘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쉴 예정이라면서요?”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누구겠어요? 하루 종일 이 방 쪽만 쳐다보고 있느라 눈이 다 튀어나온 것 같은 하인들이죠.”

식사를 마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쯤, 에버가 방문했다. 그녀는 함께 먹자며 가져온 작은 청사과 한 알을 유더에게 건네준 뒤 호화로운 방 안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우리 방도 정말 좋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단장님 숙소라 그런지 정말 대단하네요. 대체 안쪽에 방이 몇 개가 이어진 거예요?”

“욕실까지 합해 총 여섯입니다.”

“욕실은 어때요?”

“직접 보시죠.”

에버는 기어이 욕실 시설까지 보고 난 뒤에야 흡족하게 되돌아왔다.

“대단하네요. 탕 안에서 수영을 해도 되겠어요. 아, 혹시 이미 해 봤어요?”

“……아뇨.”

에버의 밝은 목소리 덕분인지 지끈거리던 두통이 다소 가라앉았다. 유더는 에버가 준 사과를 베어 물며 용건을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소문의 진상을 파헤치러 나갔을 줄 알았는데요.”

“그러려고 했는데, 대삼림에 남아 있는 사람들한테 편지가 왔거든요. 나가기 전에 전해 주러 온 거예요. 겸사겸사 유더가 정말 몸이 안 좋은지 살피기도 하고요.”

“전 멀쩡하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사람들은 참 이상해요. 한번 편견을 가지고 나니 단장님과 유더가 같이 있든, 떨어져 있든 다 이상하게 보이나 봐요. 잘 속아줘서 고맙긴 한데, 어찌나 유난을 떨던지…….”

유더는 그녀가 건네준 편지 몇 개를 받아들었다. 가케인, 칸나, 그리고 지미에게서 온 총 3개의 편지는 전서조 편으로 보내왔기에 하나같이 작았지만, 안에 쓰인 글씨는 깨알처럼 빼곡했다.

가케인은 대삼림 내에서 몇 마리의 몬스터와 마주쳤으나 금방 해치웠고,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범위를 더욱 넓혀 다른 지역의 몬스터까지 토벌하러 갈 것이라 써 두었다. 단원들을 지휘하는 일보다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을 대하는 일 쪽을 버거워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부분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듯했다.

‘마법사들 말에 의하면 이 정도가 원래 예년에 발생하던 몬스터 수준이라고 해. 몬스터 이상발생이 소강되었다는 소식이 퍼져서 그런지 이제 상단이나 용병들도 제법 보이는데, 마법사들 말로는 다른 지역에서 올 마법사들도 많아질 거라고 하네. 그런데 신기한 건 우리를 보고 직접적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하러 오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거야. 타인 가에서 만들었다는 작은 무역 거점들 쪽은 아직 잠잠한데 거긴 우리가 계속 살펴야지.’

가케인은 상황 설명을 마친 뒤, 유더의 몸은 많이 나아졌는지 묻는 걱정스러운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타이누의 상황이나 빌름 남작 등을 궁금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뒤이어 펼친 칸나의 편지도 내용은 비슷했지만 그녀만이 해줄 수 있는 말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유더. 여기서 그동안 정보를 좀 더 자세히 읽어 보니 아무래도 타인 가에서 인신매매를 비롯한 불법 무역을 저지른 게 사실인 것 같아. 자세한 사항은 단장님 쪽으로 보고드렸으니 같이 듣겠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도 싫을 만큼 정말 끔찍해! 나그란의 별이 어디로 갔는지도 아주 조금 힌트를 읽어냈는데, 어쩌면 네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몰라.’

칸나의 필체는 가케인의 것보다 조금 더 서툴렀다. 작문을 마병단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탓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 서툰 글씨 속에서 다정한 온기를 느꼈다. 가케인보다 한술 더 떠 걱정하는 칸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쯤 눈은 양쪽 다 보여야 할 텐데, 거기 가서도 제대로 안 쉬고 일만 하려고 할까 봐 정말 걱정된다. 에버 언니한테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안심이 되어야 말이지.’

칸나는 그곳에서 정보를 읽는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가케인 쪽과 헤어져 타이누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도착해서 다시 볼 때까지 더욱 건강해져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혹 답장에 거짓말을 쓰면 다 읽어버릴 테니 조심하라는 오싹한 협박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꺼낸 지미의 편지는 서투른 문법과 틀린 글씨로 가득했지만 내포되어 있는 열정만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대삼림에서 직접 만나 해치운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흥분 가득한 문장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쓴 뒤 나중에 다시 만나면 꼭 대련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에는 지미가 전해 준 다른 동료들의 말도 몇 마디 섞여 있었다.

“뭐래요?”

유더가 편지를 다 읽기를 기다려 물은 에버의 표정은 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에버가 칸나의 부탁을 받고 절 감시할 거란 걸 알게 됐습니다.”

“대가로 칸나가 직접 만든 옷을 받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열심히 할 거예요.”

에버가 품속에서 자신이 받은 편지를 흔들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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