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치료와 관련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위험할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의 동행하에 살피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일단 단장님께 말씀드리겠다고 답해 두었습니다.”
“그래…….”
고개를 기울인 키시아르의 눈 위로 문득 알 수 없는 감정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와 주어서 다행이군. 이럴 줄 알았다면 1차 파견대에 합류시킬 것을 그랬나 싶기도 해.”
“그랬다면 아마 이논이 거절했을 겁니다.”
“제 의견이 확실한 자라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였던가?”
그냥 확실한 정도가 아니라 황제가 와도 싫은 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성격이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이에게 그런 신분과 권위 따위가 다 무엇일까. 이전 생부터 그런 부분을 묘하게 초월한 듯 느껴졌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그렇다고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나는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어 모르는 것이 많아. 네가 보는 그는 어떤 사람이지?”
유더는 키시아르의 질문에 금방 답하지 못했다. 오늘 이논에 대해 다소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뒤라 그런지 그 질문이 다소 어렵게 느껴졌다.
때마침 키시아르가 줄을 당겨 부른 하인들이 도착하였기에 그들의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유더는 제 앞에 쌓인 주먹만 한 빵을 내려다보았다. 겉은 아주 질기지만 껍질을 뜯어내면 드러나는 희고 부드러운 속살이 서부식 빵의 특징이었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갖춘 그 상반된 면이 제가 본 이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논은……. 이 빵 같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빵?”
막 빵 하나를 집으려 손을 뻗던 키시아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네.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좀 닮았습니다.”
유더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된 뒤, 키시아르는 오래 웃었다.
“그렇군……. 재미있는 비유였어. 정말 깊은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표현이라 부러운 건 덤이고.”
웃고 나서 돌아온 뜻밖의 말에 유더는 눈을 깜박였다.
“부러우시다니, 뭐가 말입니까.”
“내가 모르는 네 모습을 알고, 어려울 때에 도움을 주어 믿음을 얻어낸 사람이 아닌가. 당연히 부러울 수밖에.”
이논이 들었다가는 진저리를 치며 도망칠 만한 말이었지만, 마냥 농담이라기에는 상당히 진심인 듯 보였다. 여태까지 키시아르가 그런 말을 한 건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기에 유더는 약간 당혹감을 느꼈다.
“단장님께서 모르는 모습이라고 말씀하셔도… 별것 없습니다. 제가 믿는 사람이 이논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 별것 없다는 모습이 나는 궁금해.”
키시아르가 미소를 흘리며 잔에 따른 술을 한 모금 삼켰다.
“그렇다고 투정을 부리는 건 아니니 걱정 말게. 내가 모르는 부분은 어떨지 너무나 궁금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었거든.”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부터 내내 지나치게 협조적이던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가 싶어서 말이야.”
당혹스러웠던 화제가 지나가고 나니 이번에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산이 등장한 기분이었다. 유더는 부드러우면서도 제 안을 꿰뚫어 보려는 듯 쳐다보는 붉은 시선을 느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늘 내내 이어진 제 태도의 변화를 그도 눈치챘을 테니, 분명 한마디하리라 짐작했었다.
“혹 아침에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들었나?”
“아뇨.”
“그러면?”
“그냥, 제가 그러기로 결정했을 뿐입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분명히 말해 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압니다. 하지만 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씀과 이건 상관없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미리 생각해 둔 말이 단호하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역할을 맡은 이상, 단장님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흘려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 참. 모처럼 얌전히 받아들이나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키시아르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 추문이란 것들은 내겐 정말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 펠레타 공작의 평판에 이번 일 하나 정도 더 얹는다 해서 특별히 나빠질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않나? 거기까지 모두 계산하고 시작한 일임을 알면서 내 뒤에 물러나 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는 생각을 왜 하나.”
“그것도 압니다. 하지만 단장님께서 본래 계획했던 이상으로 추문을 홀로 감당하려 하시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귀족들의 방식이나 생리를 아직 잘 모르는 마병단원들은 이 역할극을 그저 재미있어하거나, 그 이후에 닥칠 여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더의 눈에는 키시아르가 지나치게 저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는 방향으로 일을 주무르는 것이 보였다. 이번 일로 혹 생길지 모를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던 말 그대로, 그는 다른 이들의 눈에서 유더를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것을 얌전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이전 생과 같은 길로 빠질 일은 없었다. 유더 아일의 이름이 더럽혀질 일도, 저를 둘러싼 시선에 불쾌함을 느낄 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모를 거라 생각지 마십시오. 그러니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한은 맡은 바에 충실하게 행동할 겁니다. 그래야 본래 계획했던 균형이 맞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데도? 왜 굳이 더 힘든 방향을 선택하려 하지?”
“애초에 이 역할로 인해 제게 나쁜 점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 설득하신 건 단장님이십니다. 제 협조를 원하셨기에 설득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왜 자꾸 막으려 하십니까?”
“…….”
“제게 힘든 방향이라면 단장님께도 힘든 방향이겠지요. 저는 제가 편한 방향이 아닌, 단장님을 도울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고 그러기를 원합니다.”
키시아르가 조용해졌다.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확실히, 그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군.”
“…….”
“그래.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는 이 상태 그대로 바뀔 것이 없으리라 예상하고 즐겁게 즐길 생각이었어. 저열하기 그지없는 서부의 자칭 보수적 귀족 집단들도 놀려 주면서, 나를 때로 지나치게 걱정하는 보좌에게 믿음직한 모습도 보여줄 만한 기회라고 생각했었던 걸 부정하지는 않겠네.”
키시아르가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유더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과 한숨이 녹아났다.
“…그런데 역시 너는 내 예상대로 움직이는 때가 한 번도 없군.”
유더는 처음으로 제가 키시아르와의 말씨름에서 승리 비슷한 무언가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예감했다. 유더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눈이 없는 화살일수록 멀리 날아간다더니.”
예기치 못한 공격일수록 강하다는 옛말을 인용한 키시아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아낸 사내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올랐던 열은 좀 어떤가.”
“지금은 괜찮습니다.”
키시아르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한 덕인지 갑작스럽게 올랐던 열은 도로 가라앉았다. 흔쾌히 대답하자 희미하게 웃은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먼저 일어나 씻게. 나는 남은 접시를 치우고 술을 좀 더 가져오라 명해야겠어.”
“술을 너무 많이 드시는 것 아닙니까?”
“어쩌겠나. 오늘은 내가 크게 한 방 먹었으니, 마시고 얌전히 잠이라도 자야지. 아 그리고, 아까 의료부의 이논이 요청했다는 건에 대해서는 수락하겠다고 전해 주게.”
키시아르는 다만 유더가 걱정한 대로 몬스터를 살피다 위험한 일이 생길 소지가 있으니, 페투아멧을 살필 때는 반드시 나단 주커만을 곁에 두고 살피도록 하라는 말을 남겼다.
“알겠습니다. 이논도 감사히 여길 겁니다.”
“널 고치기 위해 그리 열심히 해 주는 빵과 같은 사람이니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겠지.”
빵과 같은 사람이라는 단어가 몹시 귀에 걸렸다.
“그 말은, 다른 이들 앞에서는 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빵과 같은 사람이 뭐가 어때서. 좋지 않나. 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네. 곁에 오래 두고 연마할수록 진가를 드러내는 원석 같은 유형.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는 사람이지.”
평소보다 부드럽게 풀어진 채 낮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떠오르는 이가 한 명 있었다.
“주커만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그래. 나단도 그 비슷한 유형이기는 하지.”
대꾸한 키시아르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너에 대해 말한 거지만 말이야.”
“…….”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군?”
정말로 생각도 못 한 말이라 당황스러웠다. 원석이라는 비유가 빵보다 훨씬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직접적으로 함께 언급한 표현 모두가 제 표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이고 뜨거웠다. 갑자기 가슴 안쪽이 감당할 수 없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그리 무디면서, 알아채지 못할 줄 알았던 계획은 어찌 그리 잘도 파고드는지.”
뒤돌아 걷는 동안 키시아르와 함께 숙소를 쓰는 일을 걱정했던 동료들의 목소리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이 걱정했던 부분과는 전혀 다른 면에서, 유더는 저 사내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지나치게 뜨거워 버겁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