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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35화 (335/805)

335화

유더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가는 지웠다.

이논만큼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능력이 탁월한 이도 없었다. 믿지 않는다면서, 결국은 그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동안 그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기를 바라며 이논에게 조력을 구한 건 자신이었지만, 정작 정말 그렇게 되고 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이논의 앞에서 그의 이전 생에 대해 말할 때 평소처럼 침착하게 굴 수 없었던 게 조금 후회스러운 듯도 했다.

“그래. 맞아. 이전에도 말했듯, 난 아직 다른 이들이 모르는 걸 조금 알고 있지.”

유더가 알고 있는 건 오직 제가 살아가며 본 미래뿐이었다. 처음 시간을 되돌려 돌아왔을 때는 잠시 모든 가능성을 손에 쥔 양 기뻐한 적도 있었지만, 과거를 비틀어 결과를 바꾸면 바꿀수록 그가 몰랐던 일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았는지를 똑똑히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한정적인 정보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논. 그동안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면서 한 생각이 그것만은 아니겠지?”

“…….”

“네가 누군가 끌고 온다는 이유만으로 순순히 수도를 떠날 사람은 아니잖아. 지금도…….”

“거기까지만 해.”

“알겠어. 어쨌든 네가 좀 더 날 도와줄 생각이 생겼다면, 궁금한 것들을 물어봐도 좋아. 아는 선에서 최대한 말해줄 테니 판단은 네가 해.”

유더는 입을 꾹 다문 이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도 내게 좀 더 스스로에 대해 알려줬으면 좋겠어.”

“날 자세히 알아다 뭐에 써먹으려고? 말해 주면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있고?”

“믿을 거야. 너도 날 믿어주었으니까.”

담담한 대답에 순간 이논이 입을 멈추었다. 그는 말문이 막힌 듯 시선을 돌렸다가는 이내 기가 꺾인 기세로 중얼거렸다.

“아직… 안 믿는다고 했잖아.”

“그랬지.”

“난 정말 네가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너같은 인간은 루마 이후로 처음이야.”

전설의 대마법사와 비교되는 게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이논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가는 다시 깊이 숨을 내쉬며 본래대로 돌렸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 당장은 잘 모르겠으니까.”

“알겠어. 정리되면 이야기해도 좋아.”

“……그런데 말야, 내가 정말 죽었어?”

유더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심각하게 치뜬 눈을 보니 어쩐지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니야. 정확히는,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뭔가 알아볼 것이 있다고 했다가 편지만 남기고 사라졌어. 나중에 다시 만날 때 날 기억하지 못한다면, 네가 알려준 정보를 말하라고 했지.”

그게 죽고 나서 다시 돌아온 뒤가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이후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어.”

유더의 말을 들은 이논은 어쩐지 뭔가 알 듯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럼 일단 죽은 건 맞겠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죽음하고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뜻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자, 이논이 찡그린 얼굴로 웃었다.

“나, 인간 아니야.”

“뭐?”

“봐. 너도 안 믿기지? 네 말이 나한텐 딱 그 정도로 들려.”

“아니…….”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유더는 일단 신중하게 다시 물어보았다.

“믿을게. 인간이 아니면… 뭔데.”

“뭘까.”

따라하는 것처럼 짤막하게 대꾸한 이논이 이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뭘 것 같아?”

“…….”

그의 눈앞에 있는 이논은 어디로 보나 잘생긴 얼굴에 젊은 육체를 지닌 인간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래 전에는 요정이나, 몬스터도 짐승도 아닌 무언가가 인간과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갔다고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전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루마의 가디언이라고 했었잖아.”

“그래. 루마의 가디언이지. 사실 나도 나를 뭐라고 정확히 정의하기는 힘들어. 목적에 의해 만들어져 계약에 의해 생명을 얻는 걸 쉽게 설명하긴 어려우니까. 그래서 굳이 소개해야 한다면 루마의 가디언이라고 말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이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상세히 표현하자면 마법에 의해 의지와 육체를 조합해 연결시킨 존재 정도겠지.”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논이 저를 보는 유더를 향해 불퉁하게 물었다.

“어때. 듣고 싶은 거 들었는데 이제 뭐 할 말 없어? 무슨 생각이 들어? 역시 헛소리는 믿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아니면, 두려워? 괴물 같아?”

“…황궁에 있던 루마의 갑옷기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간 이논의 표정이 허를 찔린 듯 조금 변했다.

“뭐? 그게 아직 있어?”

“저번에 봤어.”

루마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갑옷 기사가 아직도 멀쩡히 움직이는 걸 두 눈으로 본 기억이 떠오르자 이논의 말이 정말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나서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놈도 있는데, 마법으로 만들어진 인간 정도가 대수일까? 그는 이논의 전신을 살피며 조금 망설이다 질문했다.

“그것도 루마가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너와 비슷한 건가?”

“아니야.”

날카롭게 답한 이논이 잠시 후 입가를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유더를 바라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놈……. 너…… 정말로 믿는구나.”

“시간을 되돌려 돌아올 수도 있는데, 대마법사가 널 만들 수도 있겠지.”

이전 생의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유더 아일이 듣는다면 믿지 못할 말을 스스로 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유더의 말을 들은 이논은 웃을 듯 말 듯한 얼굴을 하다가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젠장. 너무 쉽게 믿으니까 이거 오히려 이상하네.”

“…….”

“진짜 내가 고장이 났나…….”

중얼대던 이논이 그래도 유더의 말을 아직 완전히 믿는 건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 비해 한결 힘이 사그라진 목소리였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한 가지만 먼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넌 어떻게 돌아왔어?”

뭔가를 묻는다면 역시 이 질문부터 나오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을 했다 해서 잘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유더의 머릿속에 꽃잎이 날리고 유난히 하늘이 맑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의 모든 것이 끝났고,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던 날이었다.

“사실, 그건 나도 몰라.”

“……몰라?”

“갑자기 여기로 되돌아왔어. 기회를 얻은 셈치고 이번에는 잘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이논의 시선이 더욱 이상해졌다.

이번에도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지만, 그는 어쩐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과거의 대화를 담고 있었다.

“너 말이야….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

“루마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고 했던 것.”

미래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을 때쯤 그런 소리도 한 적이 있었던 듯했다.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논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알 수 없는 상념이 먼 곳을 맴돌았다.

“루마는… 오랫동안 어떤 마법 연구에 매달렸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나는 그게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에 대한 연구라는 걸 알았지. 하지만 실패했어. 그래서 떠난 거야. 모든 걸 남겨두고…….”

유더는 두서없이 이어지는 중얼거림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사실 대체 왜 그런 마법을 연구하려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어. 왜 계속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논의 시선이 유더를 향해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그는 몹시 낯선 표정으로 유더를 보고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은 그렇게 말했어. 신이 할 수 있다면 인간도 할 수 있다고.”

“…….”

“아직 네 말을 완전히 믿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널 볼 때마다 계속 그 생각이 났어. 어쩌면 루마가 거기에 관심을 둔 건, 너와 같은 말을 떠든 선례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나 외에도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야?”

“몰라.”

짤막하게 대답한 이논이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

이논의 질문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유더는 서로 쉽사리 믿기 힘들 만한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이전보다 조금 더 깊은 무언가를 공유한 듯한 기분이 든다는 사실에 낯선 기분을 느꼈다.

“이거 가져가.”

이논이 가방에서 찾아내어 가져왔던 물건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투명한 색을 띤 작은 물약이었다.

“아무래도 네 회복이 더딘 건 마법이 성공하기 전에 이미 네 몸이 몬스터의 피에 어느 정도 적응한 탓이 큰 것 같아서, 기력에 자극을 주는 약을 좀 만들었어.”

“…이걸 마시면 어떻게 되는데.”

“네가 본래 타고난 기운에 영향을 미칠 테니 아마 한동안 힘 제어가 잘 안 될 거야. 잘 받으면 열이 좀 날 수도 있지만 큰 해는 없어.”

이논이 확실하지는 않다는 말과 함께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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