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대부분은 평범한 이들이었는데, 그 속에 묘한 기운을 지닌 이가 끼어 있었습니다.”
키시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세히 말해 봐.”
“마병단에 있는 분들이 능력을 강하게 쓸 때, 저는 간혹 어떤 특유의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1층에서 일하는 이들을 지켜보다가 그와 비슷한 느낌을 두른 이를 발견하고 쫓아가려 했는데… 놓쳤습니다.”
“놓쳤다고?”
“분명 뒤쫓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사라졌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제가 쫓던 이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더군요.”
다른 이도 아닌 나단 주커만이 누군가를 놓쳤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키시아르 또한 그렇게 생각한 듯 웃음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나?”
“뒷모습만 보았기에 모르겠습니다.”
“그 외의 인상착의는.”
그러자 나단 주커만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기억을 짜내려는 듯 침묵하던 그는 잠시 후 불쾌하고도 당혹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씀드리려 하니 잘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작았었던 것 같기도 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거, 아무래도 범인이 누구일지 짐작이 되는데.”
키시아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유더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여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한 쪽도 이쪽에 이미 와 있는 모양이군요.”
마차 내부에는 순식간에 무거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유더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나한의 모습을 떠올리는 동안, 키시아르는 팔을 괴고 있던 선물 상자 위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해 보면 잘된 일이군. 우리가 맞는 길로 찾아갔다는 증거이니 말이야.”
“…….”
“두 사람은 돌아가는 대로 모든 단원들에게 이 일을 알리도록. 나도 빌름 남작을 만나야겠어.”
***
키시아르가 빌름 남작을 찾아간 사이, 유더는 돌아온 마병단원들을 불러모았다. 펠레타 기사단 쪽은 나단 주커만이 맡을 테니 그는 마병단원들에게만 이 일을 말하면 되었다. 대삼림에서 나그란의 별과 나한이 어떤 일을 했는지 이미 들어 알고 있던 단원들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놈들이 설마 여기에도 들어와 있는 것 아냐? 환상을 쓸 수 있는 놈을 무슨 수로 알아내지?”
“우리 중에 정신계 능력을 가진 녀석이 별로 없는 게 이럴 때 아쉽네.”
유더는 초기 단원들 중 정신계 능력을 지닌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눈으로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기 어려운 능력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서류 접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쓸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칸나 또한 하마터면 그럴 뻔했던 이가 아니던가.
다음에 새 단원을 받고 나면 그 부분도 완화되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전 상관없어요. 루산 사제님에게 그런 짓을 한 놈이 벌써 여기 있다니 잘된 일이네요. 아페토 공작가 때부터 얼굴이 궁금했었는데 이번엔 꼭 직접 보고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예요.”
싸늘하게 주먹을 말아쥔 에버의 답에 멀리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루산이 감동 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에버 님…….”
“아, 그리고 유더. 우리 쪽도 오늘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좀 신경이 쓰이는 소문을 하나 들었어요.”
유더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자, 에버는 빌름 가의 하인들이 없는 틈을 타 목소리를 낮추었다.
“얼마 전 타이누 근처에 있는 어떤 마을에 미친 걸인이 한꺼번에 열 명이나 나타났대요. 타국인도 있고, 제국인도 있는데 하나같이 자신이 누구인지, 왜 거기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남녀가 뒤섞인 그 걸인 집단은 정처 없이 주변을 헤매고 다니다 신고를 받은 경비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그 근처의 다른 마을에 비슷한 걸인이 몇 명 또 나타나서 이게 무슨 일인지 다들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확실히 알아봐야 할 소문인 것 같군요.”
“그렇죠? 어쩌면 칸나가 가 보았다던 그 각성자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들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치고, 에버는 꽤 확신을 지닌 듯 보였다.
“그 사람들을 찾아내어 조사해 보면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낼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잡힌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습니까?”
“사람들 말로는, 마을 영주가 결정하기 어려운 수준의 일이면 타이누로 이송해서 결정한대요. 그러니까 아마 벌써 여기 어딘가에 와 있을 수도 있죠.”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키시아르에게 보고하는 일은 그녀가 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일을 진행하려면 타이누 내부에 있는 기사들이나 병력들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에버가 그 정도에 주눅이 들 이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뭔가 더 알게 되면 제게도 알려 주십시오.”
“그럴게요. 유더도 단장님 따라다니느라 힘들 텐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아까처럼 너무 노력하다가 어긋나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 쪽이 나을 때도 있어요. 알죠?”
“…….”
다정한 위로에 몹시 복잡한 기분이 찾아들었으나 유더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논. 여기 있어?”
그는 키시아르가 돌아오기 전의 시간을 틈타 이논이 머물고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곧 얼굴을 내민 이논이 유더를 위아래로 한 번 훑고는 조금 더 크게 열어 들어갈 길을 내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다른 사람들에게 급하게 알려 줘야 할 일이 생겨서.”
“급한 일?”
이논이 머무는 방은 1인용 숙소였다. 키시아르와 유더가 머무는 방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그래도 그가 원래 지냈던 빈민가의 낡디낡은 약방과 비교하면 궁전 수준이었다.
유더가 키시아르와 함께 향한 붉은사슴 상단과 거기에 있었을지 모를 나한, 그리고 대삼림에 있었던 각성자 마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 이논이 무심히 반문했다.
“각성자 마을인지 뭔지는 다른 녀석들이 하도 떠들어서 대충 듣긴 했어. 그런데 그 나한이란 놈이 그렇게 무서운 놈이야?”
“내가 본 정신계 각성자 중에서는 그보다 강한 수준을 찾기 어려울 거야.”
“그럼 너도 못 이겨?”
이건 약간 예민한 질문이었다. 유더는 침묵하다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길 수 있어.”
“그럼 됐잖아. 들어 보니 어차피 모달 같은 놈들인 모양인데, 너무 커지기 전에 대충 싹을 뽑아.”
몹시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에 유더는 잠시 멈칫했다.
“모달?”
“들어본 적 없어? 마법사 모달.”
물론 들어본 적은 있었다. 옛이야기나 전설 속에서 말이다. 그와 관련된 전설은 대부분 사악한 흑마법사 모달이 세상을 어지럽혔지만 천벌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권선징악적인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알긴 하지만……. 실존 인물인지는 몰랐는데.”
“당연히 실존한 놈이지. 그놈은 마법으로 마법사만의 왕국을 만들겠다고 아무 데서나 날뛰다가 잡혀 죽었어.”
“누구에게?”
“루마한테.”
그런 줄은 몰랐다. 유더는 갑자기 전설 속의 인물이 몹시 친숙해지는 기분과, 이논이 멀게 느껴지는 감각을 동시에 맛보았다. 그가 말했던 정보를 한 번도 제대로 믿지 않았던 이전 생이 문득 아스라이 기억났다.
“……이논. 너는 몇 살이야?”
“알아서 뭐 하게?”
충동적으로 흘러나온 질문을 던지자 침대 위에 놓아둔 가방을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던 이논이 퉁명스레 대답한 뒤, 시간을 조금 두고 말을 이었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의 내가 그건 안 말해줬나 보다?”
“오래 살았다고는 했었어.”
“음… 뭐……. 그래. 그때는 그 답으로 충분했었던 놈이 지금은 갑자기 왜 그걸 궁금해하는데.”
유더는 입을 다물었다. 이전 생의 이논은 스스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감한 듯한 편지만을 남기고 사라졌기에 뒤늦게 궁금해졌다 했더라도 물을 수 없었으리란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유더는 그가 알려준 짧은 사실 이외의 정보는 지금도 정확히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저 믿고 도움을 받을 만한 조력자로 가장 먼저 떠오른 이가 그였을 뿐이었다.
“그냥.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너, 그렇게 말하면 진짜 짜증 나는 거 아냐.”
드디어 가방에서 찾던 것을 발견한 이논이 뭔가를 쥐고 가까이 다가왔다. 유더는 그의 샛노란 눈동자에 비친 제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다.
“나에 대해 뭔가를 안다는 듯 그렇게 아련 떨면서 쳐다볼 때마다 기분이 진짜 안 좋아진다고. 말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마. 내가 내 나이를 알려주기 전에 뭐, 죽기라도 했어?”
“…….”
유더는 순간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게 아니라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뿐이지만, 그게 죽음과 무엇이 다른지 솔직히 말하자면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야?”
유더의 침묵 속에서 무언가의 확신을 얻었는지, 이논의 눈빛이 변했다.
“내가 진짜 죽었어?”
“……안 믿는다며.”
“안 믿어. 하지만……!”
무어라 외치려던 이논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머리칼을 거칠게 비비며 숨을 토해냈다.
“…네가 나타난 뒤로 세상이 점점 이전과 달라지고 있잖아. 넌 분명 뭔가를 알고 있어. 그건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