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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33화 (333/805)

333화

귀중품을 들여놓았다는 지하로 가는 길은 그들이 들어왔던 방향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비상용 통로와 비슷해 보이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유더는 1층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이쪽에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끔 교묘한 위치에 만들어 뒀군. 출입도 통제하고 있겠지.’

예상대로 빛이 들지 않는 지하 입구에는 몇 명의 사내가 어슬렁대며 앞을 지키는 중이었다. 지루하게 늘어져 있다가는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글레힘과 낯선 이들의 등장에 놀라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는 그들의 모습을 유더는 몰래 유심히 살폈다. 보통 이런 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임시로 고용한 용병이 많지만, 그들이 차고 있는 무기나 경례 자세를 보아하니 어쩐지 흔한 용병 같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지금 이 안에 들어가 있는 이가 있나?”

“없습니다.”

사내들을 한심한 듯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인 글레힘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키시아르를 넘어, 유더의 얼굴을 불쾌하게 훑었다.

“바로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이도 계속 동행시키실 생각이신지요?”

“그러면?”

“안쪽은 위험하지 않으니 다른 이는 이곳에서 기다리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그편이 전하께서도 더 편히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공작은 몰라도 그의 남자 애인까지 들여보내기는 싫다는 완곡한 표현이었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키시아르가 아니었다. 팔짱을 끼며 유더를 글레힘의 시선에서 절묘하게 차단한 사내가 능청스레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음. 보좌는 어떻게 하는 쪽이 낫다고 보나. 혼자 다녀올까?”

“저는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아니지. 이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두고 가면 안 된다고 질투를 해 줘야지. 다른 사내가 나와 둘만 있고 싶다고 하는데 걱정되지도 않나?”

글레힘과 문을 지키던 사내들의 표정이 일시에 다채롭게 변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당연히, 걱정됩니다.”

순간 유더가 정말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글레힘은 더 이상 유더를 제지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한 채 황급히 손을 내저어 문을 열도록 명했다.

“문, 문을 열어라. 빨리!”

공작의 남자 애인을 떼어놓고 가려다 하마터면 저까지 더러운 관계에 얽힐 판이었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등 뒤로 소름이 가득 돋았다.

유더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키시아르와 함께 내부로 들어섰다. 지하실은 언뜻 어두침침하고 낡은 듯 보였지만, 자세히 살피면 중요한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대비하여 만든 장소임이 느껴졌다. 바닥은 아주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도록 설계했고, 슬쩍 손가락으로 훑어본 벽은 위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범용 마법도 어딘가에 있을 테니 이 공간이 곧 이 건물의 진짜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어제 들어온 물건들은 모두 한곳에만 모아 두었으니 바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방이 꽤 많아 보이는데, 다른 곳들은 안 살펴보고?”

키시아르가 지나치는 복도 옆의 닫힌 방문들을 둘러보며 묻자 글레힘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들은 예비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이곳에 보관할 만한 귀중품의 숫자가 많지 않아 대부분은 늘 비어 있습니다.”

글레힘의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말을 하고 나서 괜스레 목울대를 울려 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축이는 태도에서 미묘하게 미심쩍은 낌새가 났다.

‘거짓말일 확률이 높겠군.’

“이곳입니다.”

글레힘은 어느 방 앞에 서서 옷 안쪽에 넣어두었던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그가 목걸이에 달린 사슴뿔 모양의 장식과 한쪽 손을 문에 가져다 대자, 푸른 마법진이 그곳에서부터 빛을 내며 퍼져 나갔다. 잠시 후 문은 아무 소리 없이 가볍게 열렸다.

야명석으로 빛을 밝힌 내부는 투명한 선반으로 가득했다. 글레힘은 그 모두가 마법으로 보호되는 중이니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고 경고한 뒤에 선반을 채운 물건들을 간략히 소개해 주었다.

“이번에 들어온 물건 중에는 에릴과 넬라른에서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에릴은 보석 공예의 역사가 깊은 나라이고, 넬라른은 과거 마정석 광산이 많았었지요. 그 시절 만들어진 마도구들은 현재 사용할 수 없다 해도 아름다운 외견 덕에 수집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사치품과 오랜 옛날 만들어졌다는 마도구 유물 수십 점이 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과연 엄청난 공을 들여 보호할 만한 물건들이었다.

“아름답군. 하지만 단순히 아름답기만 해서는 흥미롭지 않아. 이전에 들렀던 가게에서는 밑바닥에 숨겨진 공간이 있는 청옥 코담뱃갑을 보여주었었는데, 그런 건 없나?”

“요즘 에릴에서 만들어지는 세공품들 중에는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게 인기입니다. 여기 있는 것들도 그 정도 장치는 대부분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브로치는 초상화를 두 개 넣을 수 있지요. 그냥 열면 첫 번째 그림만 보이지만, 작은 돌기를 돌리면 두 번째 그림으로 바뀝니다.”

그런 물건을 필요로 하는 이는 아마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정부나 애인을 둔 귀족들이리라. 글레힘 빌름은 물건을 소개하는 척하며 남자 애인을 떡하니 데려온 키시아르에게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좀 재미있군. 나라면 한 사람의 것만 두 개 넣겠지만 말이야.”

태연하게 미소를 지은 키시아르가 그 브로치를 살폈다. 글레힘은 간접적인 비난 따위는 눈앞의 사내에게 도저히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기 있는 물건들은 언제쯤 다른 가게로 보낼 계획이지?”

“모든 감정 작업을 마무리하면 계약한 상인들을 불러들입니다. 이번 물품들은 그간 대삼림의 무역로가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 탓에 한참 만에 들어온 것들이라 배분이 늦어지기는 하겠지만, 일주일 정도 내로 모두 보낼 예정입니다.”

“그렇군. 알겠네. 좋은 구경을 했어. 뭘 선물하고 싶은지는 정했으니, 일주일 뒤를 노려 다시 나와야겠군.”

키시아르는 정말로 구경만으로 만족한 듯 물러났다. 순순한 태도에 글레힘이 겨우 미간에 들어간 힘을 조금 풀었다.

그들이 지하실에서 나오자 문을 지키던 사내들이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키시아르에게만 쏠리던 시선이 이번에는 제 쪽으로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더는 조금 만족했다.

“전하. 그러면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신지요?”

“그럴 생각이네.”

“물건을 풀고 나면 형님 쪽을 통하여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두 번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말아 달라는 마음이 가득 담긴 친절이었다.

그들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왔던 길로 돌아갔다. 응접실에 어느새 돌아온 나단 주커만이 얌전히 앉아 있다가, 키시아르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국인?”

“아. 내 부관이라네. 아까 급한 볼일을 보고 싶다고 나갔었는데 그 말을 깜박 잊었군.”

뒤늦게 나단 주커만의 존재를 확인한 글레힘이 당혹하자 키시아르가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단. 볼일은 잘 보고 왔나?”

“네. 중간에 잠시 길을 잃어 돌아오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원하시던 물건은 찾으셨습니까.”

“엄청나게 마음에 드는 건 없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것들이 많더군. 오길 잘했어.”

이 느긋한 대화 속에 숨겨진 의미심장한 뜻을 글레힘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기막힌 얼굴을 숨기려 노력하면서 세 사람을 배웅했다. 유더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제 형님인 빌름 남작에게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이 갈 듯하다 생각했다.

“지하에 인식을 흐트러뜨리는 마법이 걸려 있더군. 큰 공간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좁게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는데, 닫힌 문들 안에 뭐가 더 있을지 상당히 궁금해.”

키시아르는 마차에 타자마자 유더가 지하에서 느낀 의구심과 같은 뜻을 입에 담았다. 유더는 지하를 지키던 이들이 보통 용병은 아닌 듯하다 생각했던 것을 이야기하며 제 추측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자세도 그렇지만 사용하는 무기가 전부 동일하다는 점에서 정규 훈련을 받은 타이누의 경비병들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빌름 가 사람이 관리하고 있으니 그럴 확률이 높겠지.”

키시아르가 동의하며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는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정책의 일환인 척, 공정한 일로 움직이는 집단인 척 말하고 있으나 어디를 보아도 사사롭기 그지없어. 아무래도 타인 공작이 타이누에서 오랫동안 무역품 검증 절차를 독점하며 장사를 잘 해먹은 모양이군.”

거기에 이제는 한술 더 떠 더욱 위험한 무역에까지 손을 대고 있음을 모두 아는 상황에서, 타인 공작은 그저 타이누를 생각하여 정책을 만들었을 뿐이라던 글레힘 빌름의 말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나단. 너는 어떤 것들을 보았지?”

“1, 2층의 구조를 살폈습니다. 숨겨진 공간은 없었지만, 상단주의 방으로 추정되는 가장 안쪽 방에 금고가 하나 있더군요.”

“안에 뭐가 있는지는 살폈고?”

“단시간 내에 해제하기는 어려울 만한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시도는 해 보려 했습니다만 일하는 이가 방으로 들어오려 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아쉽군.”

키시아르가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1층에서 일하는 이들을 살폈는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더군요.”

“이상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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