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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32화 (332/805)

332화

여기서는 굳이 맞장구를 쳐 보았자 추문을 나누어 질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을 테니, 묵묵히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키시아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개장을 들고 나타난 상인에게서 붉은사슴 상단이 위치한 거리의 주소를 들었다. 유더는 아까보다 더 많은 상자가 쌓인 마차 내부를 살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키시아르가 물건을 더 샀다면 마차 한 대를 따로 더 불러야 했을 터였다.

“왜. 선물들이 마음에 안 드나?”

“…타인 공작가의 무역과 관련된 조사에 진전이 생긴 건 다행입니다만, 그러기 위해 너무 많은 비용을 지출하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그리 많은 비용도 아니야.”

키시아르가 아무렇지 않게 답하며 제 옆에 쌓인 상자 위에 팔을 괴었다.

“이것의 몇 배가 들어도 아까울 리 없으니 걱정 말게.”

보란 듯 유혹적인 기색을 띤 미소가 눈부셨으나 유더의 뺨을 찌르던 나단의 시선은 방금 전보다 한결 더 강해졌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그들에게서 역할극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게 분명하다고 짐작했다.

생각해 보면 오늘 다른 이들의 앞에서 내내 바랐던 상황이기는 한 듯한데, 하필 첫 타자가 키시아르의 충직한 부관인 남국인 기사라는 건 약간 문제가 있었다.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유더의 의사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는 듯했다.

“여기가 붉은사슴 상단이군.”

키시아르는 건물 전체를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마차를 세웠다. 타이누에 들어오는 모든 무역품을 검증한다는 상단치고는 꽤 규모가 작았지만 들락대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끊임없이 도착하는 마차가 짐을 내리고 다시 사라질 때마다 건물 안에서 나온 일꾼들이 그것을 나르고 다른 마차에 옮기느라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소개가 없으면 들어가기 어렵다더니 사람이 많군요.”

“이름은 상단이지만 실제 업무는 타인 공작가 대신 무역품을 관리하는 일일 테니까.”

“빌름 남작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있겠지.”

유더는 계속 짐을 새로 싣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마차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이토록 많은 짐이 오가는 것을 보면 아마 어딘가에 물건들만 보관하는 창고도 따로 있을 터였다.

“자, 그러면 들어가 보실까.”

키시아르는 거침없이 소개장을 들고 앞서 나갔다. 장신의 아름다운 사내가 양옆에 남자 둘을 끼고 나타나 소개장을 내밀자, 정신없이 일을 하던 상단의 일꾼들이 일제히 당혹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이곳이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설명했으나, 키시아르는 그런 말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방탕한 공작답게 고개만 한 번 기울여 거부의사를 드러냈다.

“나는 지금 당장 여기에서 들여오는 특별한 물건들이 보고 싶네. 오늘 내로 내 애인을 위해 좋은 선물을 찾아내고 싶거든.”

그러자 잠시 후 건물 안쪽에서 서류뭉치 한 묶음과 깃펜을 든 사람이 뛰어나와 키시아르의 앞에 당도했다.

“대, 대체…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나를 모르나?”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키시아르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황족은 금발과 적안을 타고난다지만, 그것이 황족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제국 초기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중에는 황족의 혈통이 섞인 덕에 종종 금색, 혹은 적색을 띠는 외견을 타고나는 이들이 많았다. 당장 타이누의 지배자와도 같은 타인 공작가만 해도 적발과 적안이 많이 태어나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외모를 통해 그저 어느 혈통 좋은 가문의 귀족이리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가 펠레타 공작일 것이라는 상상은 도무지 할 수 없었던 평범한 사내는 키시아르가 스스로 밝힌 정체를 듣고 까무러칠 듯 놀랐다.

“펠레타 공작이자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다.”

“예?”

“현재는 빌름 남작의 저택에서 머물고 있지.”

“예?”

“대삼림에서 이루어낸 마병단의 업적을 듣지 못한 이인가? 이거 정말 섭섭하군.”

“아, 아뇨.”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저은 사내가 무릎을 꿇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헤메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키시아르와 유더, 나단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상단 건물 내부는 총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더는 방을 두지 않고 탁 터놓은 1층 안쪽을 돌아다니며 짐을 나르는 일꾼들을 살피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제대로 된 방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류 뭉치로 가득했다.

사내는 그나마 가장 깨끗한 응접실로 그들을 안내한 뒤 잠시 책임자를 데려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키시아르는 그가 나가자마자 망설임 없이 나단 주커만을 불렀다.

“나단.”

“네.”

“지금부터 너는 화장실을 찾으러 갔다가 길을 잃는 거야.”

“…….”

“내부 구조 및 인원 파악을 끝낸 뒤 합류하도록.”

뛰어난 소드마스터의 감각은 때로 마법이나 각성자의 능력조차 뛰어넘기도 했다. 나단 주커만 정도의 실력이라면 조금만 살펴도 그 정도는 금방 알아낼 터였다.

“알겠습니다.”

나단 주커만은 주군의 명에 불편한 기색 없이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가 문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안경을 쓴 중년 사내가 바삐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는 빌름 남작과 몹시 닮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서부 전체를 구한 영웅이시자 고귀한 피의 수호자이신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 붉은사슴 상단의 자문, 글레힘 빌름이라 합니다.”

“빌름?”

“이미 만나 뵈셨을 빌름 남작께서는 저의 첫째 형님이 되십니다.”

“오, 그랬었군.”

글레힘은 형보다 좀 더 내심을 잘 감추는 듯 보였다. 그는 갑작스레 수행원 둘만 데리고 상단 건물에 방문한 펠레타 공작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송구하오나, 공작 전하께서는 이곳에 소중한 분을 위한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방문하여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바가 맞는지요?”

“정확하네.”

“하지만 이 상단은 그저 외부에서 타이누로 들어온 물건들의 감정과 검증을 진행할 뿐이오라 판매를 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체 그건 누가 정했지? 들여온 물건을 굳이 다른 가게에 나누어서 넘겨야만 팔 수 있다는 건 너무 불편하지 않나.”

“타이누의 주인이신 타인 공작 전하의 명이십니다. 타이누는 오랫동안 서부 육로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기에, 이러한 절차 없이 무분별한 수입 및 검증, 판매를 진행하면 반드시 탈이 생기게 됩니다. 타인 공작 전하께서는 그러한 일을 계속 겪으신 뒤 불편을 겪는 이들을 걱정하시어 15년 전부터 이러한 체제를 마련하셨습니다.”

유더는 동생 빌름 쪽이 형보다 나은 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그는 말을 몹시 청산유수로 잘 하는 이였다.

“그랬군. 15년이나 이 일을 해 왔다면 자네는 언제부터 이곳에서 일을 했나?”

“예? 저는… 작은아버지의 뒤를 이어 물려받은 자리이기에 이제 7년 정도가 됩니다.”

“대단하군.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말이야.”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이 시작되자 글레힘 빌름의 얼굴 위로 키시아르의 속내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에 대해서는 자네의 형에게 들었나?”

“예. 귀하신 분께서 곧 타이누에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었습니다. 저는 저택에서 머물지 않기에 떠나실 때까지 뵙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만……. 이리 뵙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그래, 정말 영광이라 생각한단 말이지.”

“예?……. 예.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를 도와주어야 맞지 않겠나?”

키시아르가 웃으며 글레힘 빌름의 허를 찔렀다.

“하지만 물건을 팔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방금 말씀드렸…….”

“참 답답하군.”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살 수 없다는 말뜻은 알겠네. 하지만 시간은 유한하지 않아. 내가 귀여운 내 보좌와 함께 이곳에 올 시간이 또 생길 거라 생각하나? 적어도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보여줄 수 있지 않은가? 이곳에 올 상인들도 물건을 보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

“여기까지 오느라 벌써 시간을 많이 허비했으니 그냥은 돌아갈 생각 없네. 내 보좌를 빈손으로 가게 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자겠어.”

유치하기 그지없는 협박과 함께 키시아르가 유더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유더는 최대한 협조적으로 몸을 맡겨 기대었다. 글레힘 빌름의 눈가가 사정없이 움찔대며 미세하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그… 설마, 선물을 하고 싶으시다 말씀하신 소중한 분이……?”

“보면 모르겠나?”

키시아르가 보란 듯 유더의 앞머리칼 위로 입을 맞추며 웃었다. 글레힘 빌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에 잘 갈무리된 감정이 아닌 혐오가 넘실거렸다. 말을 잘 하기는 해도 그 역시 본질은 형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 알려주시면, 바로 창고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창고는 가게와 달리 천한 이들이나 일하는 곳이라 몹시 더럽습니다만, 그래도 보고 싶으시다면…….”

“내가 찾는 건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는 귀하고 흥미로운 수입품들이야.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안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 내가 너무 심심해져서, 보좌와 여기서 뭘 하고 싶어질지 모르겠거든.”

“그런 귀중품 중 일부가 마침 오늘 들어와 지하에 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글레힘 빌름이 황급히 방을 나섰다. 키시아르는 낮게 웃으며 유더를 이끌었다. 그들이 나가는 동안 아직 나단 주커만의 부재가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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