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단장님.”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로 들어온 키시아르를 본 단원들이 일제히 반색을 하며 인사했다. 그의 뒤에는 나단 주커만이 붙어 있었는데, 일부러 흐트러뜨린 티가 나는 옷차림에서 빈둥대야 하는 펠레타 기사단 역할에 따르려는 안타까운 노력이 느껴졌다. 유더는 처음으로 나단에게 깊은 동병상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논이 세 번째 레몬을 우물대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단장과 계속 붙어 다닐 거냐?”
“그래야겠지.”
“시간이 남으면 내 쪽으로 와.”
“왜?”
“너, 내가 여기 왜 불려 왔는지 벌써 잊었어?”
이논이 사납게 물었다. 수도를 떠나고 싶지 않아 했던 그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는 순전히 유더의 부상 때문이었다.
“난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동안 주변을 살피면서 조금 생각해 본 게 있으니까 아무튼 와.”
“알겠어. 미안.”
“그놈의 미안하다는 말만 꼬박꼬박하지 말고, 몸을 아껴 나을 생각을 해.”
호통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지만 이논의 성격상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더는 희미하게 웃었다가는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오늘 빌름 남작의 말을 듣자 하니 타이누에는 많은 명소와 볼거리가 있다더군.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를 아름다움을 모두 구경해 두고 싶겠지?”
“예!”
그사이 단원들을 향해 입을 연 키시아르는 더없이 한량 공작다운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좋아.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한 두 번째 파견대와 대삼림에서 많은 고생을 한 첫 번째 파견대 모두에게 일주일간 휴식을 내리겠다. 비용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으니 타이누의 경계만 넘어가지 말고 마음껏 쉬도록.”
키시아르의 말에 모두가 환호했다. 사실 나가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진짜 놀이가 아니라 타인 공작가의 불법 무역 정황 흔적을 뒤지는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자유롭게 돈을 쓰고 놀아도 좋다는 말에 기쁘지 않을 이는 없는 법이었다. 빌름 남작의 하인들이 벌레 씹은 얼굴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빠져나가는 마병단원들을 노려보았지만 그 시선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더는 즐거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단원들의 뒷모습을 보다 키시아르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단 주커만이 억지로 헐렁하게 맨 검은 크라바트를 우울하게 내려다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셨군요.”
“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유더의 얼굴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유더가 다시 시력을 되찾고 대삼림의 밖에서 재회한 뒤부터 내내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간 그의 주군이 유더 때문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리 없으니 복잡할 심경은 이해가 되었다. 유더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자 키시아르가 기다렸다는 듯 즐거운 얼굴로 외출을 권유했다.
“유더. 오늘은 우리도 나가볼까 싶은데, 어떤가?”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든 내 보좌와 함께라면 즐겁겠지.”
“…알겠습니다.”
유더는 그 이상 묻지 않고 바로 수락했다.
“나단, 오늘은 너도 간다. 보좌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열 발짝 이내에서 따라와.”
“예…….”
나단이 얼음 같은 무표정에 먹구름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보좌는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나?”
“저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자 아직 나가지 않고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이 유더의 시선을 피했다. 몇 개째인지 모를 레몬을 앞에 두고 있던 이논 또한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사정없이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다는 태도가 그토록 명확할 수 없었다.
“없습니다.”
“그래. 모처럼 소소한 외출이 되겠군.”
키시아르가 둘뿐인 수행 인원과 함께 밖으로 나가겠다고 밝혔음에도 빌름 남작가에서는 크게 만류하지 않았다. 남작은 일이 너무나 바빠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을 죄송히 여긴다는 말만 하인을 통해 겨우 전했을 뿐이었다. 공작을 대한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찬바람 부는 태도에서 그가 키시아르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장님. 빌름 남작이 어제 쏟은 술 때문에 단장님을 뵙기를 원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누가 그러던가?”
유더가 루산에게 들은 이야기를 알려 주자 키시아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건 아니었어. 겉으로는 더 구해줄 수 있다며 대범한 척을 하던데, 속으로는 많이 아쉬웠나 보군.”
“그러면…….”
“신검에 대해 물으려고 부른 거야. 모른 척 긁어주고 왔으니 한동안은 속이 꽤 부글부글 끓겠지.”
키시아르가 가지고 있는 검은 물론 진짜 신검 오르였지만, 그는 일부러 빌름 남작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척을 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남작은 그가 가진 검이 진짜 신검이 아니기에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라 짐작하여 분노했으나 겉으로는 감히 무어라 다그칠 수가 없었다.
문제의 신검은 현재 천으로 검집과 손잡이를 두툼하게 감싼 상태로 키시아르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대삼림에서부터 줄곧 그렇게 가렸더니 이제는 천에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레 깃들어, 지금은 누가 보아도 신검 오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평범한 연습용 검처럼 보였다.
“어쩌겠나. 눈앞에 두고 말을 해도 그것이 진짜 신검임을 믿지 않는데, 내가 무어라 해도 그에게는 거짓으로 느껴지겠지.”
그들은 빌름 남작이 제공한 마차를 타고 하루 종일 타이누의 곳곳을 돌았다. 키시아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줄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상점에서 엄청난 양의 물건을 사들였는데, 그중에는 물론 공작의 애인 역할을 맡은 유더의 것도 존재했다.
값비싼 새 검집과 일상생활에서는 낄 수도 없을 화려한 장갑, 보석과 자수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만든 망토와 귀한 가죽 신발이 담긴 상자가 단숨에 유더의 자리 옆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평소라면 결코 받지 않았을 물건들이었으나 지금 그것을 거절해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을 터였다.
나단 주커만에게 줄 물건도 몇 개 사다 강제로 떠넘긴 뒤, 키시아르는 즐거운 얼굴로 새로운 가게에 들렀다. 그곳은 붉은 사슴 머리가 그려진 간판을 단 보석상이었다.
“음. 에릴산 청옥으로 만든 코담뱃갑이군. 과연 서부 육로 무역의 거점다워. 타국에서 만든 귀한 물건들이 시중에 이 정도로 많이 보이는 경우는 수도에서도 흔치 않은데 말이야. 보좌는 어떤가? 마음에 드나?”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사용하지 못할 겁니다.”
유더가 완곡하게 거절하자 키시아르가 눈을 휘며 그것을 들어 올렸다. 푸른색 옥을 깎아 만든 담뱃갑은 남자 손바닥 안에 쥐기 좋은 정도의 크기였다. 어렵지 않게 보석을 깎아 만든 잠금장치를 연 키시아르가 텅 빈 내부를 보여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코담뱃갑에 꼭 담배만 넣지는 않는다네. 사람들은 생각보다 여기에 많은 걸 넣고 다니거든.”
“그렇습니다. 아주 많은 것들을 넣을 수 있지요.”
간만에 엄청난 큰손을 맞이해 환희에 차 있던 보석상이 그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담배가 아닌 다른 향초도 얼마든지 넣고 다니실 수 있고, 어떤 분들은 매일 드시는 약을 넣어 다니시기도 합니다. 잠금장치가 안쪽에 하나 더 있어 들키고 싶지 않은 물건을 넣기도 좋지요.”
“그런가? 그건 몰랐군.”
“이걸 이렇게 비틀면 안쪽의 작은 공간이 드러납니다.”
이런 건 에릴의 장인들만이 만들 수 있다며 자랑스레 설명한 상인이 코담뱃갑 안쪽에 깐 천의 어떤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러 비틀었다. 그러자 바닥이 열리며 작고 납작한 빈 공간이 또 드러났다.
“특이한 물건이군. 마음에 들어. 이것도 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런 물건은 수입품 감정 절차를 통과하기가 까다로웠을 텐데, 어떻게 들여왔지?”
“까다롭다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요. 타이누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은 타인 공작가에서 투자한 붉은사슴 상단의 검증을 거칩니다. 그리고 저희는 붉은사슴 상단과 오랫동안 계약을 맺어 온 곳 중 하나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상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타인 공작가라는 말에 순간 키시아르의 눈이 은밀히 반짝였다.
“오……. 그랬군. 타인 공작가의 검증을 받은 물건이라. 가품 걱정은 없겠어.”
“물론입니다.”
“그러면 이런 물건만 더 볼 수도 있나?”
상인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 당장 그런 물건들만 골라내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하지만 며칠 뒤 다시 찾아와 주신다면 흥미를 가지실 만한 물건을 좀 더 들여놓아 두겠습니다. 머무시는 곳을 알려주신다면 연락을 드리지요.”
“당장 볼 수 없다니 재미가 없군. 뭐, 생각나면 추후 다시 들러 보든가 하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됐네.”
키시아르는 흥미가 떨어진 방탕한 귀족처럼 몸을 돌렸다.
“붉은사슴 상단인가 하는 곳을 차라리 직접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거기는 어떻게 가야 하지?”
“그곳은 소개가 없이는 방문하기가 힘드실 겁니다. 물건을 직접 파는 곳은 아니라…….”
“이런. 당장 보고 싶은 물건도 없다, 그렇다고 들여오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줄 수도 없다……. 내가 소개 따위가 필요한 사람으로 보이나?”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사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같은 사람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한기가 느껴졌다. 상인은 소리 없이 저를 짓누르는 기이한 압박감에 숨을 멈추며 다급히 눈을 깜박였다.
“아뇨. 그, 윽. 그건. 그러니까. 제가.”
“제가?”
“제, 게 말씀해 주시면……. 소, 소개장을 써 드리겠다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키시아르는 그제야 다시 웃었다. 상인은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감각에 놀라 황급히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지금 바로 가 보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가볍게 대답했다.
“왜냐면 나는 지금 아주 특이한 선물을 애인에게 해 주고 싶은 사람이거든.”
“…….”
유더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시선을 조금 옮겼다. 나단 주커만의 시선이 몹시 따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