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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30화 (330/805)

330화

유더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키시아르는 약간 심술궂은 미소를 띤 채 ‘치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바깥에 있을 이들이 아주 흔쾌히 잘 치워줄 거야.”

그러고 나서는 귀한 술을 아무렇지 않게 내버린 키시아르를 욕하고, 또 어떤 흠집을 잡을까 생각하며 눈을 희번덕대겠지. 유더는 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생각해 보면 이제 그들이 상상하고 있을 광경은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되었다. 그저 역할을 꾸며내기 위해 시간을 때우기만 했던 이전과 달리 그들은 정말로 소파 위에서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수 없을 일을 했고, 뜨거운 열을 함께 나누었으므로.

그러나 키시아르는 함께 나눈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함구하고 모든 책임을 또다시 자신의 손 안에만 쥘 것이다. 그는 나한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자만한 겁쟁이라 말했지만, 대체 세상 어떤 겁쟁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사실 진짜 겁쟁이는 자신 쪽일지도 몰랐다. 이전 생을 완전히 잊고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비밀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스스로의 목을 억죄는 고통을 삼키는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떠날 생각은 더더욱 없지.’

실로 모순적이었다. 키시아르가 본 환상 속의 제 모습이 유드레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평정을 잃을 만큼 심장이 싸늘해진 건 그런 스스로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 안에 비어 있던 구멍들이 채워지고, 잊었던 기억과 감정이 다시 떠오를 때마다 그 모순 또한 갈수록 심해지리라 생각하면 고통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으냐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유더는 부디 키시아르가 제가 느끼는 모순을 영영 모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가 키시아르에게 이토록 깊이 이끌리는 한, 언젠가는 그 모순을 들킬 가능성이 한없이 높아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게 이전에는 이토록 무거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천으로 만든 큰 족쇄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못하지만 물에 적시면 그 무게를 머금어 점점 더 질기고 무거워지는 특수한 천으로 만든 그 족쇄는 물감옥에서 죄수를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만들 때 유용하게 쓰이는 물건이었다. 유더는 사형 전 그 족쇄를 차고 있었던 때 느꼈던 무게감이 지금 느끼는 기분과 제법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끝까지 버텼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물감옥과 천 족쇄를 한 달 넘게 버텨낸 죄수는 독하다 혀를 내두르는 병사들의 손에 다리뼈가 뽑혀나갔다. 그는 여러 개의 감옥을 전전한 뒤에도 질기게 죽지 않아 결국 단두대 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하여 버텼으나, 지금은 이 고통이 어쩌면 제게 주어질 당연한 인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는 그것뿐이었다.

유더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느냐고 묻는 키시아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키시아르는 그들이 한 일의 여파로 유더가 피로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씻고 곧바로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물의 마법을 새긴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욕실에서 손만 대면 펑펑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에 몸을 씻으며, 유더는 오랫동안 오늘 본 키시아르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 강한 이임을 알아도 역시 그가 혼자서 모든 추문을 뒤집어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키시아르를 떠올릴 때마다 통제할 수 없이 피어오르는 열망이, 심장을 짓누르는 고통이, 그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모두 하기로 결심했던 이성이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역시 하나뿐이었다.

***

“유더! 어젯밤은 어땠어요? 괜찮았던 거예요?”

“우리가 밤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단장님과 같은 방이라니… 비록 그 방이 내가 자란 집보다 열 배는 크다 해도 보통 일이 아니지. 난 절대 못 해.”

“잠을 자긴 했어?”

다음 날, 유더는 웃음을 참느라 괴상한 표정이 된 단원들이 속닥대며 건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름 남작의 하인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치우고 있었으나 그들의 귀는 이쪽을 향한 상태였다. 그는 그 사실을 확인한 뒤 가장 먼저 말을 건 에버에게로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단장님과 한 침대에서 잘 잤습니다.”

“아, 그. 그래요?”

“네. 좋았습니다.”

순간 주변에 있던 이들이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양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후 빌름 남작의 하인들이 일제히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소곤대기 시작했다. 예상한 반응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유더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인 에버가 다급하게 귓속말을 했다.

“아니, 유더……. 그렇게 말하면 누가 믿겠어요? 너무 어색하니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

“어제 만찬 때부터 느꼈는데, 유더는 이런 걸 하는 덴 재능이 별로 없나 봐요. 신이 공평하시다고 해야 하나요?”

예상치 못한 말에 유더가 아무 답도 못 하는 사이,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유더 님! 이쪽으로 오세요.”

타이누에 오는 동안 많이 회복된 루산 사제가 새빨개진 얼굴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유더는 그의 곁에 방만하게 앉아 레몬을 씹고 있는 이논을 보며 다른 단원들에게서 벗어나 그곳으로 향했다.

“세상에. 보고 있다가 심장이 다 떨어지는 줄 알았네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뭐가 말입니까.”

“사실 이건 다 짜고 치는 판이라고 창문 열고 고함을 쳐도 방금 그것보단 나았겠단 뜻이야.”

이논의 한마디는 루산의 말보다 더욱 직설적이었다. 유더는 잠시 자신의 언행을 돌이켜 보았다. 제 목표에 부합하는 적절하면서도 직설적인 말뿐이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가 내 역할에 걸맞지 않게 보였다고?”

“그래.”

“이해가 안 되는데.”

“뭐가 안 돼? 세상 어느 귀족의 애인이 그런 식으로 굴어? 내가 단장 숙소 앞에 이 레몬을 던졌어도 너보단 덜 수상하게 보였을 거다.”

“너무하시네요, 이논 님. 그렇게까지 말하면 아무리 유더 님이라도 상처받으실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루산 쪽이 더 심하다고 생각했으나 유더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젯밤 키시아르의 추문을 나누어 지겠다고 결심한 참이었다. 이전 생에도 이미 겪었던 일이니 그가 없는 사이를 틈타 어렵지 않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두가 이렇게 나오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뭐가 문제지.’

이전 생에는 뭘 어떻게 했었는지 생각해 보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더욱 깊은 오해를 하고 악의적인 소문을 한술 더 떠 만들어 주었기에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가라앉히려 하면 할수록 시비를 거는 이들의 숫자만 늘어나 골치가 아팠을 따름이었다.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랐을 때는 잘만 나더니, 정작 진짜로 마음을 먹으니까 안 되다니.’

“……하지만 어제 같이 잔 건 정말인데.”

소파에서 잠시 몸을 얽은 것 외에 별일은 없었으나 아무튼 한 침대에서 잔 건 사실이었다.

“아, 그래?”

“술도 마셨고.”

“단장님께서 빌름 남작님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소파 아래에 엉망으로 다 쏟아부었다던 그 비싼 술요?”

루산이 아까 소곤대며 떠드는 하인들의 이야기를 지나가다 들었다며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남작께서 상심이 너무나 크시다고 하더군요. 단장님만 따로 뵙자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일 거라는 말을 들었어요.”

키시아르가 빌름 남작 때문에 잠시 혼자 본채에 간 건 사실이었는데, 그런 연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따지자면 그 술을 제대로 안 마시고 쏟아지게 만든 건 유더 제 탓이 더 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루산은 믿어주지 않았다.

“으음. 유더 님. 억지로 감싸시는 것 같으니까 역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냥 단장님이 하셨다고 해도 조용히 계시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요.”

“…….”

유더는 대답 대신 이논을 보았다. 이논은 말없이 두 번째 레몬만 입에 넣었다. 껍질째로 레몬을 쉽게 씹어 먹는 기인의 등장에 빌름 가의 하인들이 기겁하든 말든,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내일부터는 다시 신성력을 부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어요. 그간 상태는 좀 나아지셨어요?”

얼굴과 피부에 남아 있던 얼룩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힘의 회복은 아직 더뎠고, 왼쪽 눈의 얼룩도 아주 약간 흐려졌을 뿐이었다. 루산은 상태를 살핀 뒤 이논이 만든 회복용 알약을 몇 개 건네주었다.

그 뒤 루산이 다른 단원들의 부름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유더는 이논과 둘만 남게 되었다. 이논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단원들은 루산에 비해 그를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그들이 앉은 테이블 주변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런데… 새삼스레 갑자기 역할극에 욕심을 내는 이유가 뭐야?”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목소리로 이논이 중얼거렸다.

“너, 어제까지는 의욕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로 다른 놈들을 노려보고만 있었잖아. 단장은 즐거워 보였다만.”

그는 분명 루산과 함께 긴 테이블의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무슨 생각?”

“책임을 지는 게 한 사람만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논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지만 유더는 더 자세히 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언젠가 이논이 제게 짜증을 내며 물었던 어떤 말을 떠올렸다.

“이논. 내가 말했던 목표가 뭔지 기억하고 있겠지.”

“지켜야 한다고 했지. 그게 왜. 이번 일과 엮여 단장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길 것 같아서?”

“아니.”

주어인 키시아르를 생략한 이논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유더는 그 이후 그가 했던 또 다른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미래에 그자가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 되거나, 혹은 네가 너네 대장과 죽도록 사랑하는 사이였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어느 쪽이야?…….

이전 생에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키시아르는 미래를 위해 중요할 뻔했던 사람일지 모르나 유더에게는 중요한 이가 아니었고, 그들은 몸을 섞는 것 이상의 깊은 감정을 교류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판단으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유더는 그 답을 입에 담는 대신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키시아르가 본채에서 돌아왔는지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정문 쪽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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