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가빴던 호흡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에도 키시아르는 유더의 목에 묻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유더 또한 애써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일이 끝난 뒤 언제나 차가운 어둠만이 함께했었는데, 이조차도 전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두 사람을 감당하기에는 좁은 소파에 몸을 구긴 채 아직 물기와 열기가 가시지 않은 단단한 품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전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더는 자신의 변화를 생생히 자각했다. 가능하면 오히려 조금 더 오랫동안 이렇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지나친 욕심인지도 분명히 알았다.
“…일어나서 정리해야 하는데, 알면서도 움직이고 싶지가 않군.”
그때, 마치 유더의 마음을 읽은 듯한 속삭임이 작게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틀어 시선을 돌리자 배부른 짐승처럼 눈을 가늘게 뜬 키시아르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반쯤 묻은 상태로 미소를 흘렸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도 그의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약동하는 향과 만족스러운 기쁨을 조금의 감춤도 없이 내뿜고 있는 사내는 그 자체로 마치 땅 위의 모든 생명을 제 뜻대로 쥐락펴락하는 여름의 햇살 같았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도 괜찮을까.”
유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가 웃음을 담아 소리 없이 다시 한 번 목 아래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제야 네가 내 앞에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
“……눈 때문에 심려를 많이 끼쳐 죄송합니다.”
“눈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니, 그것도 맞지만.”
무어라 부정하려다 마는 키시아르의 말이 묘하게 느껴져 의문의 시선을 보내자, 조금 늦게 답이 돌아왔다.
“정확히는 환상 때문이지.”
환상이라는 말에 짚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유더는 나른했던 감각이 일시에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눈에 힘을 주어 떴다.
“…나한의 환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키시아르는 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나한을 잡으러 단신으로 뛰쳐나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키시아르는 환상 속에서 유더를 보았다고 말했으나, 자세한 부분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 뒤로 말이 없어 금방 잊은 줄 알았는데 실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아직 신경 쓰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나도 신경 쓸 생각은 없었지. 하지만 그것이 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더군.”
“혹시 제가 환상 속에서 단장님을 공격하기라도 했습니까?”
“뭐? 아니야.”
키시아르가 작게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그런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리 길게 신경 썼을 리 없었겠지. 그저 우습기만 했을 테니까.”
순간 가슴 안쪽이 깊게 쑤셨다. 그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말하는 듯한 목소리에 유더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은 적어도 유더의 기억 속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사건이었다. 이번 생에서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할 생각은 없다지만 그 기억이 제 안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유더는 침묵을 지켰다.
“그자의 환상은 당하는 이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토대로 만드는 것이라 들었는데, 맞나?”
“네.”
유더는 이전에 제가 했던 보고와 이후에 보았던 나한과의 만남들을 떠올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거야. 내가 본 건 한 번도 상상하지도, 본 적도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대체 무엇을 보았는데 그러시는 겁니까.”
“내 옷을 입은 너를 봤어. 정확히는… 단장복이라고 해야겠군.”
순간 거대한 충격이 머리를 두드렸다. 차라리 그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거나, 크게 다친 모습을 보았다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지 몰랐다. 하지만 단장복을 걸친 유더의 모습이라니.
그건, 이전 생의 마병단장 유드레인 아일이 아닌가?
크게 흔들리는 유더의 눈을 본 키시아르가 바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는 내 보좌가 마병단 단장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러고 싶었다면 예전에 부단장 자리를 제의했을 때 바로 받아들였겠지.”
싫다는 것을 얼마나 오래 설득하여 없던 보좌 자리까지 만들어 앉혔는데 당연하지 않느냐며 키시아르가 웃었으나 유더는 마주 웃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해진 상태였다.
침착하게 생각해야 했다. 지나치게 충격받은 모습을 보여 키시아르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단장복을 걸친 자신의 환상을 보았을 뿐이라면 그것이 완전히 이전 생의 모습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냥 단장님의 옷을 입은 제가 나오기만 했을 뿐입니까? 아니면 다른 뭔가도 했습니까.”
“그냥 그것뿐이었어.”
대답한 키시아르는 잠시 후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본 결과,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측은 아마 네가 죽을지 모르는 상황을 겪고 난 뒤라 불안해져 있던 마음이 그런 식으로 반영된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지.”
“…그게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말하자면 내가 얼마나 자만에 차 있던 겁쟁이였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일단 몸을 닦는 걸 더 지체할 순 없을 듯하니 정리하면서 계속 이야기하지.”
심각하게 찌푸린 유더의 미간을 보며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는 맹수처럼 몸을 일으켜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물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품속에서 꺼낸 손수건 위로 물을 부어 적시고 두 사람의 몸을 닦아내는 움직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을 하는 것처럼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유더는 제가 하겠다고 말할 시기를 놓친 채 그의 손길을 어색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일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나는 벽을 무너뜨리는 걸 제법 좋아한다고.”
제 손을 먼저 닦아내고 유더의 손목을 들어 올린 사내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천으로 꼼꼼히 훑어내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무너뜨릴 벽이 있을 때의 이야기야. 아무것도 없으면 애초에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지. 그리고 나는 그 벽이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거라 자만하고 있었다네. 왜냐하면 그 벽은 아주 강해서,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단단했으니까.”
시선을 손가락에 향한 채로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 일로 뭔가를 깨닫게 된 거야. 내가 자만하던 사이에도 그 벽은 갑작스레 사라질 수도 있고, 그러면 나는 영영 그 빈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절망 속에 빠지게 될 거란 사실을.”
“…….”
“여유의 본질은 확신에서 오지. 확신이 흔들리게 되면 그 어떤 여유도 제자리를 지킬 수 없어. 그래서 나는 너를 붙잡고 싶었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곁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재구축하고 싶었을 테니 말이야.”
마치 남을 분석하는 것처럼 무심히 중얼거린 사내가 유더의 마지막 손가락을 모두 닦아냈다. 그러나 그는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붉은 시선이 유더의 거친 손끝을 훑었다.
“말하자면… 갑자기 겁이 난 거지. 겁이 났다는 건 곧 두려움을 느꼈다는 뜻이고, 환상이 그 틈을 파고들어 일그러진 모습으로 발현되었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닐지도 몰라. 실제로 나는 거기에 꽤 혹했다네.”
잘 나가다 말고 이상하게 이어진 뒷말에 고개를 든 유더는 제 손을 우아하게 받쳐 든 채 자조하듯 웃는 사내를 보았다.
“……혹하셨다고요?”
“그래.”
“두려운 게 아니라 말입니까.”
“놀랍고 이상하긴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어. 그냥, 뭐랄까. 시선을 뗄 수 없었지. 그게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네게 단장 자리를 주어서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버릴 만큼.”
키시아르가 유더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해볼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없습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준다 해도?”
“제가 원하는 건 단장님이 이런 말씀을 두 번 다시 안 하시는 겁니다.”
“역시 가차 없군. 흰 단복도 잘 어울렸는데 말이야.”
잘 어울렸다니. 유더는 오랫동안 그 단복을 입으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없었다.
“농담으로라도 입어 보라고 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싫습니다.”
정색하고 말한 끝에 키시아르는 알겠노라 답하며 웃었다. 유더의 손등에 코끝을 슬며시 부비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그의 움직임이 간질간질한 감각을 전했다.
“향이 진해졌어. 느껴지나?”
“…저는 단장님의 향만 느껴집니다.”
“원래 스스로의 향은 잘 못 느낀다고들 하더군.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진해.”
유더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제 향에 대해 말해준 경험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래. 이번의 나는 향이 있는 오메가 각성자니까.’
유더는 키시아르에게서 향이 흘러나온 만큼, 제게도 이제는 향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이전과는 달라.’
그러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키시아르가 본 환상은 유드레인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유더의 마음은 그렇게 안도하고 싶어 했으나, 머리 한구석은 차가움을 잃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정말 그것뿐일까?
흰 단장복을 걸친 유더 아일의 환상은 그저 그를 붙잡고 싶은 키시아르의 불안감에서 비롯된 일그러진 방향의 공포였을 뿐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더는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주변의 참상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소파 위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동안 귀한 술을 담았던 잔은 바닥 카펫 위를 흉하게 적시며 뒹구는 중이었고, 부드러운 천을 감은 소파 또한 엉망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