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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28화 (328/805)

328화

손에 힘을 주려 움직인 순간, 키시아르가 유더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유더와 시선을 마주한 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발은 이럴 때 하는 게 아니야. 그리 쉽게 결정하지 말아.”

“이런 일을 쉽게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딱히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죠.”

“눈 때문에 거리감을 잡기 힘들어했던 걸 모를 줄 알고?”

그래 보았자 다른 이들은 거의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작은 차이였을 뿐인데, 과연 키시아르는 모두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잠시 멈칫했으나 그래도 짚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땀이 어린 흰 이마를 한쪽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 낫지 않은 눈을 계속 신경 써 주신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다른 한쪽 눈이 영원히 낫지 않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단장님께서도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그 말에 키시아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감정이 아주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붉은 눈을 보며, 유더는 그가 내내 제 한쪽 눈을 볼 때마다 숨기고 삼켰을 감정들을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좋게 생각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고 재차 중얼거리는 이를 향해 유더는 몸을 숙였다. 마주한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저는 얼마든지 좋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게 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걸 모두 보았으니, 그것을 한쪽 눈에 담아 두었다고 생각하면 아쉬울 것이 없지요.”

“…….”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생각 자체는 두 눈이 전부 보이지 않았을 때부터 줄곧 했었다. 유더가 시력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이전 생의 비극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와도 같은 거대한 페투아멧의 사체와 키시아르의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 본 것이 그의 얼굴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도 제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으니 아쉬움이 덜했다. 하물며 볼 것을 다 볼 수 있게 된 요즘이야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눈이 잘게 흔들리다 천천히 감기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오랜 기다림 이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붉은 눈동자 속에는 이전과 같은 고통 대신 다른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아.”

희미한 한숨과 함께 녹아내릴 듯 일렁이는 눈동자가 유더를 바라보았다. 허기와 황홀함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놀라기도 잠시, 유더는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강하게 꽉 끌어안겼다.

“정말이지 이길 수가 없군.”

“…….”

“그런 말은 반칙이야. 나는, 정말로…….”

그 다음의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방금 키시아르를 향해 달려들었던 저만큼이나 격렬하게 이어지는 입맞춤 속에서, 몸이 밀리며 뒤로 넘어갔다. 두 사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파가 작은 소리를 냄과 동시에 유더는 등 뒤를 푹신하게 누르는 쿠션을 느꼈다.

뜨거운 열을 잃지 않은 것이 허벅지 안쪽을 짓누르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히자, 틈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키시아르는 그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부 빨아들였다.

유더는 머리 안쪽이 희게 번쩍이는 듯한 쾌감 속에서 어렵사리 손을 움직여 키시아르의 바지 안쪽을 더듬었다. 앞섶을 가둔 단추를 힘주어 잡아당기자마자 열기가 한층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내가 먼저 올라타 본 것도, 옷을 벗겨 본 것도 모두 처음인가.’

욕망에 녹아내린 키시아르의 얼굴을 이렇게 제대로 본 것도 사실 처음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 속에서 유더는 키시아르의 찌푸린 미간 사이 맺힌 땀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상기된 눈가와 내리깐 긴 금색 속눈썹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플 리 없는 배가 허기지고 갈증이 절로 일었다.

좀 더. 조금 더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실체가 존재하는 뭔가를 이토록 갈구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욕심이 났다. 가라앉았다 여겼던 배 안쪽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며 몸에 열이 올랐다.

타는 목을 울리며 입술을 조금 더 벌리자 원했던 것보다 더 깊게 얽혀 들어오는 입맞춤이 그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유더는 가쁜 호흡 사이로 파고 들어오는 손길을 느꼈다. 답답하게 엉킨 옷 속에 갇혀 짓눌리고 있던 유더의 앞섶을 부드럽게 더듬어 내린 손길이 곧 방금 전 그가 했던 것과 같이 단추를 풀어 해방시켜 주었다.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닿은 적 없던 것이 공기 아래 드러나는 감각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숨을 토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입술이 서로 떨어졌지만, 키시아르는 그대로 물 흐르듯 뺨을 타고 귀 아래쪽으로 내려가 연한 살결에 다시 입술을 묻었다.

불티가 튀는 듯한 작은 자극에 또다시 호흡이 잠시 멈추었다. 점막과 살결이 서로 달라붙는 소리가 그리 클 리 없는데도,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지는 충격에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마침내 서로의 것을 완전히 꺼내어 마주 쥔 순간, 누구라 할 것 없이 열기와 충격이 뒤섞인 낮은 신음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하아.

젖어들어 부은 붉은 입술이 눈앞에서 토해내는 숨결이 너무나 자극적이라 도무지 반응을 하지 않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유더는 갈무리되지 못한 사나움을 한껏 머금은 채 평소보다 훨씬 짙은 체향을 내뿜고 있는 키시아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시 돌아온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그가 알파 각성자임을 느낄 수 있는 향이 짙게 퍼지고 있음에도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농밀하게 파고들어 제 몸을 감싸려 하는 그 향이 마치 오랫동안 접하지 못했던 그리운 존재처럼 기껍기까지 했다.

흐트러진 앞머리칼 사이로 저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 속에 욕망이 선명히 타고 있다는 사실을 이토록 평온하게 지켜볼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막 시간을 돌려 다시 돌아왔을 때, 혹은 2성 발현이 시작되었던 때에 이런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정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키시아르가 철통처럼 지켜 온 이성을 무너뜨리고 자신에게 푹 빠져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게도 기분이 좋았다.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흐트러진 제 육체도 그리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다.

고통은 오직 유더 자신의 보이지 않는 내부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유더는 숨을 고르고 제 손 안에 맞잡힌 뜨거운 두 개의 열기를 천천히 더듬었다. 함께 맞잡고 있던 키시아르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이 얽히면서 동시에 또다시 억누른 한숨이 짧게 터져 나왔지만, 한 번 시작한 움직임은 멈출 수 없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 기억이, 돌을 던지면 튀어 오르는 호수의 물처럼 정신없이 떠올랐다. 유더는 붙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거대한 것을 본능과 기억에 따라 정신없이 더듬었다. 유더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을 굳히고 억눌린 숨을 토해내며 찌푸리는 상대의 얼굴만으로도 쾌감에 취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두 개의 열기는 두 손 안에서 계속 맞부딪치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뜨거운 숨도 악문 입술을 타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터져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액체가 흘러 손가락 사이를 야릇하게 적시기 시작했으나 옷이나 소파에 묻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머리에 없었다. 질척대며 울리는 낯 뜨거운 소리가 귀를 두드려도 그것은 오히려 흥분을 더했을 뿐, 식게 만들지 못했다.

키시아르가 큰 손으로 아래를 한 번 훑을 때마다 유더는 충격적인 쾌감에 넋을 잃었다. 견디지 못하고 헐떡이며 입을 벌리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내린 사내가 다시 혀를 얽어 왔다. 농밀하게 파고든 입맞춤이 이전보다 더욱 깊은 곳까지 파고든 순간에는 또다시 전신이 크게 튀었다.

얽힌 두 개의 몸 중 하나는 제 것이 아닐 텐데도, 그렇다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일체감이 뇌를 뒤흔들었다. 정도가 지나쳐 마치 현실이 아닌 듯한 쾌감이었다.

발정기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문득 아주 작게 머리를 스쳤다.

이 자리의 둘 중 그 누구도 발정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지극히 정상적인 이성을 지키며 이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간절하고, 이토록 허기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이전에는 몰랐을까. 알 수 없었다. 원초적인 감각에 잠겨드는 것만큼 비이성적이고 기분 나쁜 행위는 없으리라 생각했었던 과거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흔들리는 움직임이 한계에 달할 만큼 빨라지며 손 안에 더욱 힘이 들어가자 머리가 희게 변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해 이마에 엉망으로 엉겨 달라붙은 머리칼을 반대쪽 손등으로 거칠게 훔치며 눈을 똑바로 떴다. 쾌감에 젖어 사납게 일그러진 아름다운 얼굴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내보이던 때와 언뜻 비슷한 듯도 했지만 어딘가는 확실히 달랐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조금 더 자세히 보려던 순간, 키시아르의 손이 더욱 강하게 유더의 손을 감싸며 가장 아래에서부터 위로 사정없이 훑어 올렸다. 모든 것을 쥐어짜내 삼키려 하는 듯한 손길에 일순 머리가 희게 비며 몸 안쪽이 딱딱하게 굳었다.

흐읏.

유더는 소리가 되어 완전히 나오지 못한 헐떡임과 함께 고개를 젖혔다. 키시아르가 그의 몸을 감싸듯 등을 둥글게 말고 이를 악문 채 눈을 감았다. 금빛 머리칼이 몇 가닥 달라붙은 눈꺼풀 위로 움찔거리는 움직임이 두어 번 스치고, 뼈가 도드라진 손등과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손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지독하게 외설적인 모습에서 도무지 조금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손바닥 안쪽이 뜨겁게 젖어들며 긴장했던 두 몸에서 일제히 힘이 풀렸다. 유더는 멍하니 숨을 헐떡이며 키시아르가 천천히 눈을 다시 뜨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붉은 눈동자 속에 들어찬 것이 오직 유더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전 생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나며 가슴 안쪽이 거세게 뛰었다. 누군가 손으로 내부를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과 울렁임 속에서 그는 비로소 눈을 내리감았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줄기와 울대 위로, 새털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낙인처럼 무거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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