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단장님. 오해를 뿌리는 역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시겠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무슨 소리지? 당연히 이 정도는 고려하고 승낙한 줄 알았는데.”
유더는 태연한 얼굴로 겉옷을 벗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자에 기대었다. 머리 안쪽이 미약하게 지끈거렸으나 상대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빌름 남작의 본저에서 저녁 만찬 시간을 보내고 막 별채로 돌아온 참이었다. 키시아르는 아주 당연한 듯이 유더를 제 방으로 이끌었고, 유더는 등 뒤로 어깨를 마구 떨며 사라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그들이 웃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지만, 키시아르의 방으로 들어서던 순간 등 뒤에 선 빌름 남작의 하인들에게서 비친 시선은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인들은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만찬 자리에서 본 귀족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키시아르의 뒷모습을 살폈다. 혐오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족도 별것 아니라는 듯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 시선들이라니. 능력만 멀쩡했더라면 바람으로 휘감아 창밖으로 내던지고 싶을 만큼 역겨웠다.
방탕한 펠레타 공작을 가장하여 빌름 남작과 타인 가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겠다던 키시아르의 계획은 정말 완벽한 대성공이었다. 유더의 복잡한 심경만 제외한다면 그랬다.
유더는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키시아르를 보면서 수확철 축제의 마지막 날 파티 때를 떠올렸다. 즐거워야 했을 파티가 아페토 가의 2공자, 레노어 샨 아페토의 독살 사건으로 산산조각 났던 그때에도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한순간에 등을 돌리던 사람들 속에서 홀로 화려한 예복을 걸친 채 서 있던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유더는 사납고 스산한 감정에 빠져들었었다.
이번은 그때와 달리 모든 이들이 ‘방탕한 펠레타 공작’에 대해 이미 잘 아는 상황에서 임하게 될 연극이니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능수능란하게 만찬 자리의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며 모든 이의 감정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드는 키시아르를 지켜보는 건, 그때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힘들었다.
‘차라리 그 말을 듣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더 나았을까.’
모든 추문은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던 붉은 눈동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만찬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도 누군가 그를 찾으러 온 뒤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여태 지켜온 평정이 고작 그 한 마디로 우르르 뒤흔들렸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지만 현실은 분명했다. 키시아르는 정말로 모든 추문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유더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도록 책임을 질 터였다.
책임. 그 낯선 단어가 입 안에서 메마르게 맴돌다가는 사라졌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그러나. 마지막에 했던 키스가 역시 심했나?”
빌름 남작이 가져다 두라 명한 술과 잔을 들고 온 키시아르가 유더의 앞에 그것들을 놓으며 물었다.
“아뇨.”
“그러면 왜.”
“단장님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키시아르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유더는 ‘다른 이들에게 경멸 당하고 추문을 듣는 것’이라 답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그 짜증나는 작자들과 연관된 건 조금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뱉은 건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말뿐이었다.
“이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되시지 않았습니까.”
방탕한 공작 노릇을 그렇게까지 철저히 할 필요는 없었다. 대충 고압적인 모습을 조금 보여 주고, 귀찮을 만큼 까다롭게 굴다가 남자와 노는 뉘앙스만 드러냈어도 빌름 남작은 키시아르를 충분히 소문과 다를 바 없이 여겼을 터였다. 굳이 거기서 한술 더 뜰 이유가 있었을까?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유더를 일컬어 미인이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자마자 콧김을 내뿜으며 키시아르를 비웃고 만 귀족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도저히 말을 가로막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지나치게 일을 잘 해서 문제였나 보군.”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키시아르가 유더의 곁에 앉아 능숙하게 술을 따랐다. 그는 또 하나의 잔에도 술을 반쯤 따른 뒤 그것을 유더에게 건네주었다.
“하다 보니 너무 신이 나서 조금 주체를 못 하기는 했지. 괜찮은가, 아닌가를 묻는다면 오히려 너무 재미있어서 문제일 정도였어.”
“…그게 재미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진짜로 재미있었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은 오랜만이었다고.”
키시아르가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네게 키스하던 순간 그들의 표정을 봤어야 해. 빌름 남작이 타인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욕을 얼마나 적어 두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고. 열 줄 이하로 적는다면 난 그자에게 실망할 거야.”
“……그걸 기대해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셨단 겁니까?”
“사실 사심도 조금 끼어 있었기는 했지.”
사심이라는 말에 유더가 미간을 찌푸리자, 키시아르가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살짝 눌러 펴 주었다. 향수와 달리 박하처럼 서늘하게 맴도는 키시아르 특유의 체향이 이마에서부터 미끄러져 코끝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네게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또 올 리 없잖나. 주어진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정말 그뿐인가? 그 외의 모욕감이나 분노, 상처는 진짜 전혀 없었던 걸까?
유더는 키시아르가 조금이라도 속내를 숨기는 기색을 보인다면 알아챌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손에 든 잔보다도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유더에게 진실을 알려줄 때마다 늘 그랬듯 곧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정말로 제가 필요 이상 안고 가야 할 추문과 모욕들에 아무런 사감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이 상황을 진심으로 기꺼워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 행동할 수 있을까.
유더는 물을 수 없을 질문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전 생에서부터 아주 많은 이들을 보아 왔지만 키시아르와 같은 강함을 지닌 이는 보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강한 사람이라서, 유더 아일은 오히려 고통스러워졌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음에도 더 고통스러워진 이유는 확연했다. 저토록 강인한 이가 유더 자신의 별것 아닌 부상 하나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그간 여실히 느끼고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실은 때로 당시보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머리를 후려치듯이 더욱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지금이 그런 것도 같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가야 하는데, 동침이 불편하다면 미리 말하게.”
“……아까처럼 시간만 보내고 돌아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여기 있는 동안에는 여기서 자야지. 말했는데 기억 안 나나?”
“언제 말씀하셨습니까.”
키시아르는 별채로 돌아오는 동안 설명했다고 말했다.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귀족과 하인들에게 쌓인 분노가 컸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알겠다고 말한 뒤 술잔에 입술을 댔다. 금빛 술이 목구멍을 태우려 드는 것처럼 화하게 만들었지만 당연히도 취기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돌아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금방 수긍하는군.”
“어차피 하기로 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다른 이들 앞에서 낯 뜨거운 칭찬에 입맞춤까지 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심은 사심이고, 이건 이거지.”
“아무튼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단장님께서 불편하시다면 바닥이나 의자에서 잘 테니 편하게 말씀해 주시죠.”
“내가 설마 널 그런 곳에서 재울까.”
키시아르가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그는 크리스탈을 꽃 모양으로 깎아 만든 작은 그릇 위에 쌓인 소금과 설탕을 손가락으로 조금 집어 잔 끝에 바르고는 유더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자. 그러면 오늘의 작전 성공을 기념하며.”
맑은 소리와 함께 액체가 출렁였다. 유더는 술을 한 모금 삼킨 뒤 드러난 키시아르의 젖은 입술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설탕인지, 소금인지 모를 흰 가루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붉은 입술에 묻어나 있었다. 정말이지 눈에 독 같은 풍경이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가루가 묻어서 그랬습니다.”
“가루가?”
반문한 키시아르가 아랫입술을 슬쩍 핥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이런 건 애인이 털어주면 좋지 않을까.”
“지금은… 그 역할을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아닙니까?”
“그러면 보좌가 털어주면 좋겠다고 바꾸지.”
알면서도 그러는 게 분명한데도 내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를 볼 때마다 미약하게 고통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오늘 내가 노력한 게 그리도 마음이 쓰인다면, 이걸로 상을 줘. 나는 그거면 충분하니까.”
시력을 되찾은 눈으로 바라본 사내가 얼마나 생생하고 아름다운지, 도무지 그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유더는 천천히 손을 올려 키시아르의 입가를 훑었다. 작은 가루들이 손끝을 간지럽히는 감각이 스쳤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손이 입술 중간에 닿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린 사내가 그것을 삼키듯 빨아들였다. 술에 젖어 매끄러운 혀가 손가락 끝을 감싸다가는 어떤 신호처럼 장난스럽게 이를 세워 꾹 깨문 순간, 유더는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읏…….”
깨물린 부분에서부터 전신에 번개가 내리꽂히는 듯한 충격이 달렸다. 배 안쪽에서 열이 오르며 간신히 억눌렀던 감정들이 폭발하듯 튀어나온 건 순식간이었다.
유더는 발작적으로 손을 빼낸 뒤, 그 자리에 대신 제 입술을 눌렀다. 그가 먼저 키시아르에게 손을 내밀어 키스를 했던 게 얼마 전임을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기세가 제법 거칠었을 텐데도 키시아르는 당황한 기색 없이 유더의 목 뒤를 감쌌다. 원하던 바를 이룬 맹수가 제게 달려드는 입술과 혀를 반갑게 맞이해 삼켰다.
유더는 술의 쓴맛과 설탕의 단맛, 소금의 짠맛을 동시에 맛보았다. 혀가 얽힐 때마다 셋 중 하나가 예상치 못하게 튀어 올라 머리를 두드리고는 정신없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소파 위에 누운 키시아르 위에 얹히듯 엎드려 있었다. 기세에 밀려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