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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25화 (325/805)

325화

키시아르는 기다렸다는 듯 옆에 앉은 보좌 유더 아일의 칭찬을 빙자한 온갖 말들을 떠들기 시작했다. 혹 영양가 있는 정보가 나올까 싶어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하나같이 전부 취기가 의심 가는 헛소리뿐이었다.

‘정말 저자가 홀로 몬스터를 해치웠다면 그걸 어떻게 했는지, 능력은 뭔지나 말하란 말이다. 평민 출신 따위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 알 바인가!’

듣는 사람조차 질릴 정도의 칭찬에도 유더 아일은 그저 무표정을 지켰다. 귀족들조차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토록 침착할 수 있다는 점만은 신분을 넘어 꽤나 인상적이라 생각했다. 각성자의 힘 따위가 그렇게까지 대단하다 여기지는 않았지만, 저런 이라면 정말 혼자서 거대한 몬스터를 해치울 만하다 느껴지기도 했다. 케일루사 황제가 마병단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단순히 각성자가 된 동생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다른 귀족들 또한 그렇게 생각한 듯, 유더 아일을 보는 눈빛들이 이전과는 미묘하게 변화한 상태였다.

“저… 아일 경. 경의 능력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소? 어떻게 그 큰 몬스터를 죽일 수 있었는지 궁금한데.”

“그래요. 나도 소문을 듣자마자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소. 얼굴의 그 검은 얼룩 같은 건 그때 입은 상처인 거요?”

평민을 향한 혐오를 누그러뜨린 이들이 웃는 낯으로 살살 꾀며 질문을 하자 유더 아일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 펠레타 공작이 끼어들어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 그 답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왜 내게 먼저 묻지 않고? 내 보좌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는 나뿐이란 걸 모르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공작씩이나 되는 이가 그렇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키시아르는 이후로도 유더를 향한 질문이나 은근한 대화가 건네질 때마다 노골적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치졸하면서도 체면 따위는 챙기지 않는 기막힌 행태에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저자가 마병단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칭호까지 받았다는 것을 보면 인재는 인재인 모양이군. 그런 인재를 쥐고 있는 게 저런 쭉정이라 문제일 뿐.’

누가 보아도 펠레타 공작과 그의 보좌의 관계는 명백했다. 방탕하다 못해 남색에까지 관심을 들여 애꿎은 부하에게 손을 대고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공작과 거절할 여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치욕을 감내 중인 평민 출신의, 폭소가 나올 만큼 안 어울리는 조합일 따름이었다.

제까짓 게 능력이 조금 있다 한들 어찌 감히 펠레타 공작에게 반항할 수 있겠는가? 평민이 성과 칭호를 하사받은 건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은 키시아르가 황제에게 입만 조금 나불대면 금세 사라질 신기루와도 같을 뿐이었다. 본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으니 아마도 저리 못 들은 척하며 펠레타 공작의 관심이 제게서 하루빨리 꺼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리라. 주제 파악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면,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원하는 야망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그리 했을 터였다.

‘뻔하지.’

빌름 남작은 제 추측이 틀리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키시아르의 헛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은밀히 시선을 돌려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주 미묘하고도 괴로워 보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접시만 노려보며 식사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몇몇은 유더 아일을 향해 동정심 어린 눈빛을 보내며 비통하게 어깨를 떨기도 했다. 역시 그들 또한 단장이라는 직책에 오른 자가 이토록 멍청한 죄로 식사 내내 헛소리나 들어 주어야 하는 이 상황이 기껍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단장님.”

키시아르의 쉴 줄 모르는 입 너머로 제 보좌의 검은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가 고전적인 미인을 연상케 한다는 둥 하는 헛소리가 나왔을 때쯤이었다. 드디어 유더 아일이 포크와 칼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소개는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으리라 생각됩니다. 식사는 계속하지 않으실 겁니까.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무뚝뚝하다 못해 이 상황을 싫어하는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 태도에 입을 다물고 고통을 견디던 귀족 모두가 놀랐으나, 당사자인 키시아르는 정작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몹시 음탕한 생각을 하는 눈빛으로 그윽하게 웃고는, 아직 하려던 말의 절반도 다 하지 못했으나 그리 말한다면 그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현재 평민 남자와의 색다른 놀이에 푹 빠져 있다는 건 누가 봐도 분명했다.

평민 출신의 말 한 마디에 만찬 자리가 들썩이는 꼴이 실로 보기 좋지 않았지만 덕분에 빌름 남작은 키시아르에게 하려던 말을 할 만한 기회를 잡았다.

“저… 공작 전하.”

“음? 무슨 일인가.”

“중요…한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만, 제가 얼마 전 풍문으로 들은 소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전하와 관련된 일이라… 혹 지금 여쭈어 보아도 될는지요?”

“좋네. 말해보게.”

“전하께오서 영광된 신검 오르의 새로운 주인이 되셨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신검의 주인이 되신 뒤 대삼림에서 그 힘을 사용하셨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만나뵙기 전부터 궁금하여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부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 중 제일 큰 건 물론 유더 아일이 해냈다는 거대 몬스터 퇴치 건이었으나, 대삼림 내에서 감지되었다는 거대한 신성력 관련 소문도 만만치 않게 컸다. 케일루사 황제는 그 신성력이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 된 키시아르와 관련된 일임에 틀림없다는 말을 흘렸다지만, 타인 공작은 빌름 남작에게 그것이 헛소리가 분명하다고 일축했다.

빌름 남작은 신중하게 키시아르의 반응을 살폈다. 사실이 아니라면 찔리는 티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돌아온 것은 태연한 미소였다.

“이런, 쑥스럽군. 대삼림에서 내가 한 일이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나다니.”

“예? 그러면 정말로……?”

“그래. 맞네.”

“그, 그렇다면…… 정말로 전하께서…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시며… 타이누에도 그 신검과 함께 오셨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다네.”

두 번이나 확언해 주었지만 진짜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가볍디가벼운 태도였다. 빌름 남작은 반사적으로 키시아르의 허리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만찬 자리에 무기를 가져온 이가 없었기에 당연히도 그곳은 비어 있었다.

“흐음. 믿기지 않나? 하긴, 황제 폐하께서 내가 신검의 주인이 되었다고 발표하시기 전 수도를 떠났으니 누군가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여기기는 했지. 그것도 자네의 혈통과 위치를 생각하면 더욱……. 아니, 이건 좋은 식사를 대접받고 할 말은 아니군.”

키시아르는 웃으며 말을 돌렸으나 이면의 뜻을 모를 빌름 남작이 아니었다. 펠레타 공작이 아무리 멍청하고 방탕하다 해도 그는 공작가들과 적대하는 황제의 동생이었다. 타인 공작가의 본영지인 타이누의 영주이자 방계 가문 출신인 빌름 남작의 태도가 다소 불쾌하게 여겨질 만도 했다.

빌름 남작은 지나치게 파고들었다가 혹 공작의 의심을 살까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감히 의문을 품은 것이 아니라…….”

“전하. 저희 빌름 가는 대대로 태양신의 독실한 신자입니다. 제 남편이 오랫동안 신검의 존재를 신성히 여겨온 탓에 보고 싶은 욕심이 앞서 마음이 조급했던 모양이니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곁에서 빌름 남작의 꼴을 보고 있던 남작 부인이 서둘러 말을 보탰다.

“정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신검 오르는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위명을 들으며 자라나는 전설의 검이 아닙니까. 선택받은 자만이 만질 수 있다는 그 검의 주인을 뵈었다는 생각에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빌름 남작은 부인의 지원에 감사하며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 나도 어린 시절에는 신검을 든 초대 황제 폐하와 대마법사 루마의 전설을 들으며 자랐으니 말이야.”

“실로 그렇습니다.”

“좋네. 추후 기회가 된다면 보여주도록 하지.”

빌름 남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의심한다는 티를 내지 않고 어떻게든 잘 넘어간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은데… 펠레타 공작이 진짜 신검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나중에 보게 되면 확실해질 테니 오늘은 이쯤 해야겠군.’

현재까지 보기로는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이 타인 가의 비밀 무역 건에 대해 뭔가를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다면 분명 떠보는 질문을 했을 텐데, 키시아르는 식사 내내 대삼림에서 죽은 기사들에 대한 흔한 애도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주변 귀족들의 억지 칭송을 들으며 연신 실실대고, 곁에 앉은 남자 보좌에게 껄떡댄 것만이 그가 만찬에서 한 일의 전부였다.

‘껍데기는 제법 아름다울지 모르나 속은 구역질 나는 호색한에, 멍청하고 기분파인 자.’

빌름 남작은 키시아르 라 오르에 대한 판단을 그렇게 내린 뒤, 마음속으로 타인 공작에게 보낼 새로운 보고서에 ‘펠레타 공작은 소문보다 더 방탕하며, 그와 마병단의 사이는 외부에서 인식하는 바와 달리 사실 그리 좋지 않은 듯 보입니다.’ 라는 부분을 반드시 적기로 결심했다.

아래에 있는 마병단원들의 능력이 좋아 대삼림에서 운 좋게 몬스터를 잘 처치한 모양이지만, 그런 운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 안다면 오산이다. 그는 앞으로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의 감시를 조금 늦추고 비밀무역 건에 더욱 매진하자는 보람찬 계획을 짰다.

“오늘 만찬은 무척 즐거웠네. 서부에 와본 건 처음이나, 덕분에 아주 좋은 추억이 생길 듯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이 리융주 말인데, 남은 건 방으로 가져다주겠나? 오늘 밤에 좀 더 마시고 싶어서 말이야.”

“무, 물론입니다.”

속이 몹시 쓰렸으나 빌름 남작은 얌전히 절반 넘게 남은 술병을 키시아르의 방으로 가져다 두라고 명했다. 키시아르는 만족한 듯 웃고는 곁에 있던 유더 아일의 허리를 끌어안고 옆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노골적인 소리에 주변의 공기가 일시에 싸해졌다.

“자, 그러면 갈까?”

“…….”

좋게 끝날 줄 알았던 만찬 시간이 끔찍하게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빌름 남작은 충격을 받아 비틀대는 아내를 부축하며, 목석 같은 남자를 끌어안은 채 즐겁게 멀어져 가는 키시아르의 뒷모습을 억울하게 노려보았다.

‘저 구역질 나는 자가 진짜 신검의 주인일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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