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빌름 남작이 본채의 드넓은 홀에 마련한 저녁 만찬에는 빌름 가의 식구들과 오늘의 주인공인 펠레타 공작, 그가 데리고 온 마병단을 비롯한 펠레타 기사단원들 이외에도 몇몇 귀족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서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유서 깊은 가문의 사람들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이상 발생한 몬스터 때문에 그간 골머리를 앓아 온 영지를 지닌 이들이기도 했다.
본래대로라면 그들과 함께 펠레타 공작을 칭송하는 척하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예정이었으나, 빌름 남작의 속은 현재 그리 편안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식으로 차려진 만찬 요리를 내려다보며 하인들에게 들은 입에 담지도 못할 소식을 떠올렸다.
‘펠레타 공작이 대낮부터 불순한 모습으로 마병단원 하나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것도 남자를.’
빌름 남작이 보낸 정중한 제안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무시한 공작은, 하인들의 눈앞에서 젊은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으로 끌어들인 뒤 단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후 방을 정리하라는 명에 하인들이 들어갔을 때 그들은 어지럽혀진 침대 위에 옷자락을 풀어헤친 채 방만하게 누워 술에 취해 있는 공작과 마주쳤다. 굴러다니는 병과 술로 얼룩진 시트를 보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저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심지어 하인들의 말에 의하면 상대 남자는 저택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공작이 어깨를 안아 직접 별채로 이끈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으나 직책이 단장 보좌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떻게 이런 망측한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아무에게나 손을 대는 방탕한 이라는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어떻게 평민 남자를 상대로 이곳에 오자마자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나!’
빌름 남작은 그 보좌라는 이가 말만 보좌일 뿐, 실제로는 키시아르의 눈에 들어 그 자리를 꿰찬 남첩 정도일 것이라 짐작했다. 남자에게 손을 대는 귀족도 암암리에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보란 듯이 저지르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신의 피가 흐른다는 황족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상상만 해도 역겨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남작님. 펠레타 공작 전하와 마병단, 펠레타 기사단이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준비하십시오.”
빌름 남작은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이 오고 있다는 하인의 귓속말을 듣고 겨우 일그러진 얼굴을 풀었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이미 만찬을 시작했어야 할 때였으나, 아무 이유도 없이 늦는다고 통보한 그들 때문에 도착한 모든 이들이 속절없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가장 좋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빌름 남작 부인의 표정에는 이 상황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다.
“여보. 오늘은 첫날이고 감사 인사를 표해야 하니 그렇다 치지만 그분들을 계속 별채에 머물게 할 생각은 아니지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돼요.”
빌름 남작 부부 사이에는 두 딸이 있었다. 남작은 난봉꾼으로 유명한 펠레타 공작이 혹 딸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까 걱정하여 사전에 조심하라는 말을 단단히 일러둔 상태였다. 그러나 상대의 방탕한 정도가 예상보다 더 심하다는 걸 알게 되고 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펠레타 공작에게 하루라도 빨리 떠나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타인 공작의 명과 주변의 시선이 걸렸다. 어쨌거나 마병단은 현재 타인 가 대신 서부의 위험을 막아 준 영웅이었다.
“…타인 공작께서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을 가까이 두고 살피며 일을 꾀하라고 하셨으니 도리가 없지 않소. 아이들은 별채에 절대 접근하지 말도록 하고, 당신도 조심하시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고 있지 않소. 언행을 조심하시오.”
무어라 불만을 토하려던 남작 부인은 그들이 소곤대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다른 귀족들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이 도착했다는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수많은 이들이 들어왔으나 그중 누가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인지는 묻지 않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외모를 본 귀족들의 얼굴이 일제히 멍해지는 모습을 보며 빌름 남작은 고작 얼마 전의 제 추태조차 잊고 그들을 멍청하다 생각했다.
그래도 확실히, 다시 보아도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사내이기는 했다. 단정한 차림새와 우아한 미소만 보아서는 몇 시간 전 그런 망측한 짓을 저지른 이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빌름 남작은 키시아르의 뺨이 살짝 상기된 모습을 보며 과연 술에 취해 있었다는 말이 맞기는 한 모양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또다시 속이 역겨워지며 잘생긴 외모도 더 이상 그리 잘생긴 듯 느껴지지 않았다.
‘그 보좌라는 자는 어디 있지?’
빌름 남작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키시아르가 대낮부터 끌어들였다는 이를 찾았다. 검은 머리칼에 한쪽 눈에 검은 얼룩이 진 마병단원은 다른 단원들과 다를 바 없는 단복 차림으로 키시아르의 바로 옆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남자가 확실한 외모였고 키도 생각보다 상당히 컸다. 처음 저택에 온 순간 눈이 마주쳤을 때는 꺼림칙한 놈이라 생각했었는데, 다시 보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무튼 확실한 건 펠레타 공작과 달리 그는 남자와 놀아나다 온 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편견을 가지고 살핀 덕인지 그늘진 긴 눈매나 혈색 적은 입술, 옷깃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 같은 부분이 어쩐지 퇴폐적인 기분을 자극하는 듯싶기도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만약 아무 편견도 없이 그의 눈이 멀쩡한 상태로 보았더라면 빌름 남작은 그 남자를 그럭저럭 봐줄 만하게는 생긴 평민 청년으로 기억했으리라.
그때, 남자가 빌름 남작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렸기에 남작은 황급히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그는 펠레타 공작에게 다가가 그의 남다른 외모를 칭송하며 상석으로 안내했다.
빌름 남작이 초대한 다른 귀족들이 펠레타 공작에게 인사를 하며 이번 일로 큰 신세를 졌노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사를 표하자 공작은 몹시 기분이 좋아진 듯 웃었다. 그가 남색도 하는 아랫도리 방종한 자란 사실은 정말 끔찍했지만 여기까지는 예상대로 굴러가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빌름 남작은 심호흡을 한 뒤 식사를 시작한 키시아르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 주신 대로 수도식으로 차렸습니다만, 입맛에 맞으십니까?”
“나쁘지 않네. 다만 전통 수도식으로 만들려면 오리를 구울 때 향신료를 넣은 기름을 안과 밖에 골고루 발라야 하는데 이건 겉에만 발라서 식감의 바삭함이 조금 떨어지는군.”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도 괜찮다며 웃는 펠레타 공작의 낯짝이 마치 빌름 남작을 서부 시골뜨기라 비웃는 듯했다. 빌름 남작은 파르르 떨리는 웃는 얼굴로 자신은 제대로 지시했으나 요리사가 명을 잊은 모양이라 핑계를 댔다. 저를 보며 미묘한 웃음을 짓는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져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빌름 남작은 애꿎은 요리사에게 채찍을 치리라 결심하며 미리 준비해 둔 귀한 술 한 병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드시지요. 전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준비한 서부 특산 리융주입니다. 가장 작황이 좋았던 15년 전 만들어진 몇 병 안 되는 물건인데 어떠십니까.”
“명성은 익히 들어보았지. 그리 귀한 것을 내가 마셔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서부에서는 리융주를 마실 때 잔에 설탕과 소금을 조금씩 묻혀 마십니다. 맛을 더욱 깔끔하게 해 주는 좋은 조합이지요.”
빌름 남작은 방금의 실패를 만회할 생각으로 꽉 차 술을 잔에 직접 따르기까지 했다. 키시아르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과연 이름날 만한 술이라며 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다음에 그가 취한 행동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유더. 마셔보겠나? 맛이 꽤 괜찮아.”
보좌이기에 키시아르의 바로 곁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여태껏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식사만 하기에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다른 귀족들의 시선에 당혹이 가득 찼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마셔서 독이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네. 사양하지 말고, 어서.”
거절에도 불구하고 키시아르는 뻔뻔하게 손을 내밀어 보좌의 입술 앞에 잔을 가져다 댔다. 잔을 따로 내리라 말해도 놀라울 판에, 마신 술잔을 친근하게 타인에게 들이대는 건 침대에서나 하는 아주 비밀스럽고 낯뜨거운 행위였다. 심지어 빌름 남작은 아내와 결혼했을 때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주변 귀족들이 숨길 수 없이 변해버린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그들 또한 충격으로 표정 관리를 할 상황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는 검은 머리 사내가 그것을 마셔서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 전, 황급히 사람을 시켜 잔 하나를 더 내오라고 말했다. 빌름 남작의 집에도 단 한 병밖에 없는 귀한 술이 순식간에 평민의 앞에 놓였다.
“고, 공작 전하께서는… 부하를 많이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문에 의하면 거대한 몬스터를 혼자서 잡은 용맹한 마병단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 먼저 말한다는 걸 깜박 잊었는데, 그게 바로 이자라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연 빌름 남작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모두의 시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검은 머리 사내에게로 쏠렸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즐겁게 입을 열어 침묵을 깨트렸다.
“소개하지. 내가 너무나 아끼고 귀여워하는 나의 보좌, 거대한 몬스터를 단신으로 쓰러뜨린 마병단의 기대주이자 앞날이 기대되는 보물 같은 인재인 유더 아일 경이네.”
‘뭐라고?’
저 검은 머리 사내가, 누구라고?
빌름 남작은 연속된 충격으로 머리가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바짝 마른 입 안이 모래로 콱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충격에 빠진 그를 대신해 다른 귀족들이 재빠르게 질문을 했다.
“오, 아일… 경이었군요. 벌써 황제 폐하께 칭호를 하사받으신 것입니까?”
“아니. 경의 칭호는 마병단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미 받았네. 이번에 돌아가면 아마 더 큰 상을 받게 되겠지.”
“아, 그… 그렇군요. 뛰어난 부하…를 두셔서 정말 기쁘시겠습니다.”
“기쁘고말고. 내가 인복이 좀 많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