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여기 장식장의 그릇 좀 봐. 금테가 아주 예쁜데? 엄청 비싸겠다.”
“아까 다른 데서도 똑같이 생긴 그릇을 봤어. 심심한데 같은 그릇이 여기 안에 몇 개나 있는지 세어보러 갈래? 바람 능력을 쓰면 금방이야.”
“좋아!”
“이야, 대체 여긴 왜 이렇게 사람 그림이 많아? 눈 마주칠까 두려워서 밤에는 오지도 못하겠네.”
호화롭게 꾸며진 저택 내부를 살피는 마병단원들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침없이 밝고 떠들썩했다. 그런 단원들을 뒤쫓아 다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빌름 가의 하인들을 보면서, 유더는 아페토 공작저에 방문했던 어느 날의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도 하인들이 마병단을 보며 경멸하는 눈초리를 숨기지 못했었지.’
아마 단원들이 필요 이상으로 시끄럽게 구는 이유도 그런 눈빛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마병단이 얌전히 있든, 귀족보다 더한 예의범절을 보여주든 우습게 볼 자들에게 굳이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입단 초기에 황궁기사단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던 단원들의 예전 모습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하며 유더는 내심 만족스러운 감정을 삼켰다.
“유더. 이제 슬슬 단장님께 가 봐야 하지 않아요?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속 시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버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유더는 대충 시간을 가늠해 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힘내요. 이번 일에서 유더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에버가 재미있어 견딜 수 없어 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키시아르는 타이누에 오기 전 타인 공작과 빌름 남작이 보일 행동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것을 이용할 계획을 짰다. 타인 가 측에서는 그들이 마병단을 가까이 두고 키시아르를 이용할 것이라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키시아르는 타인 가 측의 경계를 늦추고 추후의 계획을 대비해 운신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대놓고 방탕한 펠레타 공작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 모습 쪽이 오히려 모두가 아는 펠레타 공작일 테니 의심받을 여지는 전혀 없었다.
다만 연기를 해야 하는 건 키시아르뿐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키시아르 혼자서 아무리 방탕하게 굴어도 그를 따르는 일행들이 받쳐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으므로, 모든 이들은 타이누에 도착하기 직전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마병단원들은 별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빌름 남작과 그의 하인들의 혼을 쏙 빼두는 ‘평민 집단’다운 역할을, 그리고 펠레타 기사단은 존재감 없이 빈둥대며 주변의 경계심을 떨어트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유더가 맡은 것은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역할이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키시아르의 숙소 앞에 모인 타인 가의 하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차마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유더를 보고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길을 터 주었다.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미약한 경멸이 뒤섞인 시선들 속에서 유더는 말없이 닫힌 문을 두드렸다.
“단장님. 접니다.”
“저라는 사람은 모르는데. 저가 누구지?”
“……유더 아일입니다.”
그러자 닫힌 문이 열리며 키시아르가 얼굴을 내밀었다. 노골적으로 내보인 눈부신 미소 때문에 일순 주변이 빛을 잃는 듯한 착각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런! 드디어 내 귀여운 보좌가 왔군. 그렇다면 열어주지 않을 수 없지. 자, 어서 들어오게.”
“저, 저… 공작 전하. 빌름 남작님께서 전하신 말씀이……. 전하!”
주변에 몰려 있던 타인 가의 하인들이 애타게 키시아르를 불렀으나, 그는 태연히 그 목소리들을 무시하며 유더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유더는 문이 닫히기 직전 마주친 눈빛들 속에서 선명하게 스쳐 지나가는 경악을 읽었다. 복잡미묘한 심경이 고개를 쳐드는 것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유더의 표정을 보고는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표정은 뭐야.”
“…정말 이런 역할이 괜찮은 건지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음탕한 펠레타 공작이 열렬히 관심을 보이는 귀여운 애인 역할의 필요성과 목적에 대해서 우리 모두 동의한 줄 알았는데?”
거기서 이상한 단어 몇 개를 빼고 보자면, 그야 동의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 역할을 자신이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타이누로 오는 마차 안에서, 키시아르는 소문 속 ‘쭉정이 난봉꾼 펠레타 공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묻자 정체 모를 타인들과 놀아나야 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간도 아까울 뿐더러, 대단히 위험하지. 어떤 이가 작정하고 접근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맞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부분만 비워 두는 건 소문 속의 펠레타 공작답지 않았다. 때문에 키시아르는 단원 중에 ‘펠레타 공작의 관심을 한창 받고 있는 애인처럼 오해를 뿌리는 역’을 추가로 뽑자는 제안을 했고 유더는 고심 끝에 그에 동의했다.
다음 날, 키시아르는 그 역할을 모두의 앞에서 유더 아일의 몫으로 넘겼다. 유더가 항의하자 그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합리적인 설명으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항상 내 곁에 있어야 하는 보좌만큼 이 역할에 걸맞은 이는 없어. 다른 이를 택한다면 보좌를 포함해 주변의 다른 이들을 일부러 물리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건 계획 진행 면에서도 좋지 않아. 또한 그들이 네 정체를 알게 된 순간부터 감시와 포섭 시도가 시작될 텐데, 이 역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귀찮음과 위험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도 있겠지.’
남자라는 건 거절할 이유도 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이 키시아르와 그의 제2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성이 다르니 상황을 꾸며내기 더 좋을 것이며, 모든 게 끝난 뒤에는 1성을 이유로 대면 사실관계를 정정하기 편할 테니 참 잘 되었다고 평온하게 말하는 키시아르를 보며 유더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키시아르가 대체 언제부터 이 계획을 짜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무지 파고들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 내민 손을 제 쪽에서 잡지 않고 있는 상황에 하필 이런 역할을 수행한다는 건 그들의 현재 관계를 생각하면 너무 공교로웠다. 키시아르가 알지 못할 이전 생의 관계까지 생각하면 더 그랬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그 사적인 이유만 제외하면 키시아르의 선택은 너무나 효율적이었다. 그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키시아르는 마지막으로 혹 유더 이외에 자원자가 나타난다면 생각을 바꾸겠다고 말했지만, 당연히도 그런 이는 타이누에 도착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유더는 단 하나뿐인 특수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다.
‘내 쪽에서 뭔가 특별한 일을 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 대체 뭘 하려나 싶었었는데…….’
키시아르는 약간의 표정 변화와 작은 접촉만으로도 주변의 반응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아까 마주한 시종들의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유더가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모든 것이 저 사내의 의도대로 흘러갈 듯했다.
“저녁때쯤이면 적당히 말이 퍼졌겠지. 만찬 때 볼 빌름 남작의 표정이 기대되는걸.”
이전 생의 빌름 남작은 서부가 몬스터에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도망치다 죽었기에, 실제로 얼굴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더는 그가 서부 마법사 연합과 마병단을 이간질해 이득을 얻으려 했던 잔머리의 소유자치고는 대단히 심약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저는 여기서 언제쯤 나가면 됩니까?”
“아직 빌름 남작의 하인들이 밖에 대기하고 있으니 너무 빨리 나가는 건 좀 그렇지. 함께 차나 마시는 건 어떤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자들의 부름은 계속 무시하실 생각이십니까? 아까 듣기로는 빌름 남작의 말을 전하러 왔다고 한 것 같은데요.”
“만찬에 올 때 제가 보내줄 사람과 함께 와주지 않겠느냐는 요청이야. 아마 가족을 보내 속내를 떠볼 생각이겠지. 대답할 가치도 없어.”
그렇다면 할 말이 없었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아 함께 차를 마셨다. 아무리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테이블 위에 놓인 수많은 다과의 대부분을 저 혼자 먹어 치운 건 조금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키시아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더 먹겠나?”
“…아뇨.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다과를 먹은 탓에 저녁은 많이 먹지 못할 듯했다. 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판단한 유더가 이만 가 보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자, 키시아르가 난봉꾼 공작다운 방만한 자세로 턱을 괸 채 입을 열었다.
“유더.”
“네.”
“나가기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고 싶네.”
“말씀하십시오.”
“이제부터 일어날 추문은 모두 내 몫이야.”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한 마디가 유더의 머리를 일순 멈추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웃음 띤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역할은 역할일 뿐, 진짜가 아니라 해도 오해를 할 이들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겠지.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끝까지 내가 진다. 그러니 다른 건 생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마.”
유더는 제가 그 말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밖으로 나온 뒤였다.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 두어 명이 유더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피했다. 이전에 보이던 시선이 두렵고도 신기한 평민 각성자를 향한 것이었다면, 이번 것은 그에 더해 원색적인 호기심이 선명히 엿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유더를 아주 잠시 스쳤을 뿐이었다. 그보다 더한 질척함을 담은 눈빛들이 등 뒤의 문 너머로 쏘아져 날아가는 것을 보며, 유더는 키시아르가 방금 전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내 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굳이 말했던 게…….’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아주 짧은 사이 의문은 당혹으로, 당혹은 저릿한 감정으로 정신없이 변화했다. 순간, 이전 생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그의 뒤를 따라다녔던 오래된 기억 하나가 새하얗게 빛이 바랬다. 아무리 가라앉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던 낡고 거친 앙금들이 존재할 곳을 잃고 갈팡질팡 헤매었으나 유더는 그것들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서 땅만 내려다보는 그 때문에 겁을 먹은 하인들이 키시아르의 방 앞에서 슬그머니 모두 사라진 뒤에도, 유더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