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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21화 (321/805)

321화

가차 없이 대꾸한 이논은 마지막으로 검은 얼룩이 다 사라지지 않은 손등까지 모두 살핀 뒤에야 날이 선 시선을 거두었다. 유더는 그 틈을 타 그간 키시아르와 루산이 추측한 제 상태에 대해 말해 주었다. 증폭진의 흔적을 빼내는 마법이 성공한 뒤 여기까지 회복된 것이라는 설명에 이논은 대답 대신 차가운 한숨만 내뿜었다.

“네가 보기에… 내 힘이 전부 회복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내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런 걸 다 알게?”

그렇게 말했지만 이논은 잠시 후 퉁명스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마법이 성공한 이후로 몸이 나아졌다고 했으니 너희 단장 생각이 그리 틀리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런 사례가 또 있었다면 모를까, 누가 이런 걸 겪어 봤겠어?”

때문에 앞으로 유더의 몸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이논은 말했다.

“네 몸에 존재할 그 독과 같은 순수한 힘이 외부의 힘을 흡수하거나 혹은 밀어내며 계속 영향을 미치는 건 맞아 보여. 변수를 줄이고 상태를 확실히 보려면 몸 주인이 얌전히 살아야 하는데, 네놈을 보니 그러긴 글렀지.”

“…….”

“제발 얌전히 좀 살아. 마병단에는 너 말고 일하는 사람이 없어? 아니다. 너 같은 성격이면 친구나 동료들이 아무리 막아도 저 혼자 다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했겠지.”

마치 마병단의 동료들이 하던 말을 읽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아픈 곳을 찌른 이논이 혀를 차며 유더를 바라보았다. 그는 짜증과 동정심, 의문과 묘한 기시감이 뒤섞인 눈빛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짓을 저지른 이유가 뭐야. 단순히 그 몬스터를 처리할 사람이 너뿐인 것 같아서? 아니면. 네 ‘목표’와 관련되어 있었어?”

유더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답할 것 같더라니.”

“…….”

“그렇게 위험한 몬스터였어? 반드시 그때 죽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더 기다리면 늦었을 거야. 혼자 상대할 만할 때 처리해야만 했어. 그러지 않았다면.”

유더는 이어나가던 말을 멈추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이전 생에 거대한 페투아멧이 일으켰던 모든 재앙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부서진 서부, 원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마병단, 그리고.

부서지는 절벽 위에서 흔들거리던 키시아르의 뒷모습.

“……늦은 뒤에는 돌이키기 어려웠겠지.”

유더는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 꼴이 되고도 아쉬워하지 않는 게 그래서였군.”

이논이 눈을 치뜬 채 비로소 어떤 답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시선 너머로 이전에 그에게서 느낀 적이 있던 묘한 기운이 아스라이 일었다.

“네가 말했던 ‘개인적이지 않은’ 목표 쪽이 뭐였는지 이제 좀 알겠어.”

대답은 따로 돌려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니.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닌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연신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이논은 결국 이마와 눈가를 감싼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유더는 그가 무어라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이논은 말 대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주었을 뿐이었다.

“……받아.”

“…이 끈, 대체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야?”

“이제 이것밖에 없어!”

재가 되어 끊어진 끈과 비슷한 끈을 새로 건네준 이논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방금 전의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던 모습은 간 곳 없이 다시 평소의 그처럼 느껴지는 태도였다.

“또 끊어먹지 마. 혹시나 싶어서 챙겨온 거니까 다음은 없어.”

“노력할게.”

“노력이 아니라 알겠다고 하라고!”

“고마워 이논.”

무뚝뚝한 감사 인사에 할 말이 사라졌는지, 이논은 머리를 누르며 됐다고 대꾸했다. 유더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곳을 떠나기 전 마력의 샘 유적지에 가 보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예상외의 부분을 지적했다.

“이곳 마법사들이 그걸 마력의 샘이라고 생각했다고?”

“단장님은 아닐 거라고 했지만.”

“물론 아니겠지.”

간결하게 대답한 이논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허공을 향해 한숨을 뿌렸다.

“마력의 샘이라는 건 애초에… 그런, 진짜 샘 같은 게 아니야. 아무리 요즘 마력 농도가 희박해지며 마법사들 수준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그런 착각을 하다니. 여기에 마력이 언제부터 고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분명 인위적으로 생성된 거야.”

“……사람의 짓이라고?”

“자연적인 상태의 힘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고이지 않아. 세상을 지탱하는 순수한 힘에는 형태도, 의지도 없으니까. 고일 땅이 없으면 물이 멈출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그러니까 여기에 그 마력들이 고인 건 그럴 수 있게 땅을 파둔 놈이 있었단 뜻이야.”

“그게 누굴까.”

“몰라. 어디에나 있는 욕심 많은 인간이었겠지.”

이논은 거기까지만 말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연 것을 후회하는 듯도, 아닌 듯도 한 얼굴이었다. 유더는 그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표정 속에서 처음으로 정말 오래 살아온 노인과도 같은 지친 감정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그저 더없이 젊고 위험해 보이지 않는 이논이지만, 그의 안에 든 진짜 모습은 대체 무엇일까. 가디언이란 뭘까. 그에 대해 유더가 모르는 건 얼마나 많으며, 그 답을 알 기회가 이번 생에 또다시 올 수는 있을까?

유더가 망설이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한 순간, 이논은 짤막하게 “간다.”하고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데 관심 두지 말고 네 몸이나 돌봐.”

그는 순식간에 바람같이 나가 버렸다. 더 묻고 싶었던 것들을 물을 수 없을 만큼 단호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

다음 날, 유더는 새벽같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거점 밖에는 그와 함께 갈 동료 단원들과 펠레타 기사단원 몇 명, 배웅을 위해 나온 이들, 그리고 짐이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더.”

안개가 가득한 차가운 새벽 공기를 견디려 하는 단원들 속에서 가케인이 다가와 유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같이 못 가서 아쉽다. 타이누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쉬고, 치료도 잘 받아야 해. 편지 보낼 테니까 답장도 해 줘. 그리고… 이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

“임명권 제안 말이지.”

“응. 그거. 아직 유효한 거… 맞지?”

유더는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듯 보이는 가케인의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효해.”

그러자 가케인이 비로소 주먹을 꽉 쥐며 밝게 웃었다. 새벽 공기를 머금어 한결 선명해진 붉은 머리칼이 그를 더욱 싱그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살아있는 장미라는 별명을 절로 납득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좋아. 여기서 정말 완벽하게 임무 수행 잘 하고 갈 테니까 기대해.”

“그러고 보니 그때 하나 말하는 걸 잊었는데, 임무를 잘 한다는 범위 내에 꼭 성공만 들어가는 건 아니야.”

“응?”

유더는 눈을 동그랗게 뜬 미남을 향해 나직이 대답했다.

“때로는 성공하지 못해도 모두 무사한 게 최선의 결과일 때도 있어.”

“뭐야. 그건 오히려 내가 네게 해야 할 말인데?”

가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 크게 다치고 나니까 교훈을 많이 얻기는 했나 봐. 유더가 그런 말도 다 해 주고.”

“농담이 아니야.”

“응. 알겠어. 다들 안 다치고 잘 돌아갈 수 있게 내가 열심히 할게.”

가케인은 몹시 기분 좋게 유더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 뒤를 따라 조금 늦게 나타난 칸나도 유더에게 가케인과 비슷한 말을 했다.

“유더. 단장님 말씀 잘 듣고, 절대 무리하지 마. 타이누에서 만날 땐 이쪽 눈도 전부 회복되어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야…….”

유더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왼쪽 눈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칸나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이곳에 남게 될 지미나 다른 단원들의 말에 나름대로 열심히 답해 주는 사이, 생각지 못한 새로운 사람이 유더에게 다가왔다.

“잠깐 실례 좀 하겠소.”

마법사 로브를 걸친 미칼린이 끼어들자 마병단원들은 순식간에 떨떠름한 태도로 멀리 물러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장님.”

“우리 때문에 이곳에서 고생이 많았는데 인사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미칼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마에 남은 검은 얼룩과 왼쪽 눈을 한참 동안 훑은 노마법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나 미칼린 펀트는, 이번 일로 당신에게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입었다는 걸 결코 잊지 않을 거요. 나와 우리 연합의 마법사들을 구해주어 정말 고마웠소. 언젠가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언제든 연락하시오.”

“…빚을 지우려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부끄러운 거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미칼린은 자신도 얼마 후 타이누로 갈 예정이니, 언제든 그곳에 있는 서부 마법사 연합 쪽으로 찾아오면 대접을 해 주겠다고 말했다. 과연 그들에게 또 연락을 할 일이 있을까 싶기는 했으나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번에 성공한 마법에 대해서 말인데.”

갑자기 마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주변에 떨어져 구경하고 있던 마병단원들의 눈초리가 일제히 사나워졌다. 미칼린은 조금 머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새로운 마법이 완성되면 학계에 보고할 공식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나는 당신만 괜찮다면 그 마법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을 따서 유더 1번이라 짓고 싶소.”

그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새로운 마법의 이름을 짓는 일은 몹시 영광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유더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제 알 바 아니었다.

“…꼭 제 이름으로 하셔야 합니까? 다른 후보는 없습니까?”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후보는…… 음.”

미칼린의 눈빛이 더욱 미묘하게 변했다.

“검은 죽음의 이상흔적 파괴 마법이나 악성 무한증폭 중독흔 제거술 같은 이름은 좀 그렇지 않소?”

순간 유더는 제 귀를 의심했다. 다른 단원들 또한 괴상한 표정으로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안개 속에서 부드럽고도 냉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솔직히 셋 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개중에서는 유더 1번이 제일 낫군.”

“단장님.”

키시아르는 물 흐르듯 빛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검은 털 망토와 잿빛 장갑 차림이었다. 그의 어깨 한편에는 펠레타 공작가와 마병단의 문장이 각각 새겨진 두 개의 은빛 장식용 핀이 꽂혀 있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얼굴을 가리던 때와는 달리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거기에 허리에 찬 신검이 더해지자 그는 마치 전설 속 초대 황제의 재림이라 해도 믿을 만하게 보였다.

유더는 단장이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기세등등해진 동료들의 모습을 조금 심란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붉은 눈동자가 예쁘게 웃었다.

“어떤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는 흔치 않은데 말이야.”

“단장님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면 유더 1번으로 하지요.”

미칼린이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키시아르는 사라져 가는 노마법사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 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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