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단장님!”
칸나가 놀라 소리를 높이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지?”
키시아르가 나타난 후, 로나는 칸나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욱 위축되었다. 칸나에게서 방금 전 일어난 일들에 대한 설명을 들은 키시아르는 아직도 철창을 긁고 있는 페투아멧을 한 번 내려다본 다음 로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로나 베잇. 칸나가 한 말에 대해 덧붙일 말이 있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제의 성공으로 마음이 많이 편해진 모양이지만, 아직 그럴 만한 때는 아니라는 사실을 좀 더 유념해 두었으면 좋겠군. 이제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에게 해도 좋은 말과 아닌 말을 구별하는 법도 더 배워야겠고.”
“제가… 경솔했습니다.”
로나는 변명 한 마디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키시아르의 얼굴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미약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끝을 보며, 유더는 그간 키시아르가 마법사들을 어떻게 대했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나가 보게. 이번 일은 미칼린에게 말해두지.”
“…….”
로나는 그제야 숨통이 트인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키시아르는 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그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칸나와 유더를 마주했다.
“그건 그렇고, 몬스터의 감정이라… 기이한 정보군. 이전에도 그런 걸 읽은 적이 있었나, 칸나?”
“아뇨. 저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감정이라기보다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지만요.”
칸나는 페투아멧에게서 읽힌 정보가 짧아 단언할 수 없지만 강렬한 본능 같은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유더는 그 말을 들으며 철창에 매달린 페투아멧 쪽을 향해 슬며시 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페투아멧은 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몸을 기울이다 뒤로 나동그라졌다.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거대한 페투아멧이 생각나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키시아르 또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위험할 수 있으니 이쪽으로 오게.”
“괜찮습니다. 칸나의 말대로 이 몬스터가 제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혹스러워하는 칸나의 질문에 키시아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불확실한 요소를 당장 없애는 쪽이 좋을지, 아니면 확실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지 고민스러울 터였다.
“유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는…….”
유더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동족으로 느낀다는 표현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몬스터를 부릴 수 있는 능력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런 이들이 더 늘어날 예정이었다. 과연 이 일과 그런 능력이 뭐가 그리 다를까. 없던 능력이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기꺼운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만약에… 저 페투아멧이 지닌 힘을 몬스터를 다루는 각성자들처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유더는 로나가 말했던 페투아멧의 능력을 떠올렸다.
힘의 흡수, 그리고 배출.
그 순간, 문득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리를 둔중하게 두드리며 파문을 일으켰다.
‘저 몬스터의 능력을 살피면 키시아르의 그릇 문제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어쩌면 붉은 돌의 힘을 흡수한 후 내게 일어난 일들과 관련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저 만약일 뿐이다. 그러나 왜 방금 전까지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의문스러울 만큼 확연한 놀라움이 그를 감쌌다. 마치 여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길이 눈앞에 드러난 듯한 기분이었다. 유더는 그의 손끝을 따라 꾸물대며 움직이는 작은 페투아멧을 내려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 제게 일어난 변화와 저 몬스터 간의 상관관계를 조금 더 확실히 확인한 뒤 처분을 결정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불확실한 요소를 남겨두는 것보다는 그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
“물론 위험하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입니다.”
“위험하지 않게라.”
조용히 대답한 키시아르가 페투아멧이 갇힌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불확실한 부분을 남겨두는 게 좋지 않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군.”
그들은 작게 삑삑대며 우는 페투아멧을 남겨두고 창고를 나섰다. 유더는 단원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은밀히 보내는 것을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칸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뒤, 키시아르는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단원들에게 그가 내일 떠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대삼림에 남을 인원에 변동이 생겼음을 알려주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본래 예상했던 바와는 상황이 다소 달라졌지. 때문에 나와 함께 내일 타이누로 떠날 이들과 이곳에 남아 수색 및 토벌을 도울 이들을 다시 알려주겠네.”
본래는 가케인을 비롯한 엘더 남매와 에버를 비롯한 두 번째 파견대 여러 명이 이곳에 남고, 칸나와 에문은 키시아르, 유더와 함께 타이누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에버와 핀 엘더를 그 명단에서 빼냈고 대신 해당 자리에 칸나를 집어넣었다.
“칸나 완드는 이곳에 남아 ‘마을’과 관련된 정보를 더 수집한 뒤 타이누로 오도록. 에버 벡은 우리와 함께 떠나 타이누에 있을 이들을 지휘한다.”
“알겠습니다.”
유더가 보기에는 몬스터 토벌 쪽보다 나그란의 별을 추적하고 마력의 샘 유적지를 살피는 쪽에 조금 더 힘을 쏟겠다는 뜻이 느껴지는 인선 변동이었다. 단원들은 제각기 놀라움을 삼키면서도 키시아르의 선택에 반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는 부단장인 에버와 칸나, 그리고 가케인을 남기고 모두 거점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유더는 그곳에서 다른 단원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논?”
“…….”
먼저 온 단원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기에 타이누로 가야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수도를 떠나기 싫다던 남자는 얼음 같은 얼굴로 펠레타 기사 몇 명과 함께 앉아 있다가 유더를 보자마자 인상을 푹 찡그렸다.
“너……. 그 꼴이 대체 뭐야?”
자리에서 일어난 이논은 누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유더를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미치겠군. 이게 치료한 거라고? 루산은 어디 있어? 앞장 서.”
“루산 사제님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누워 있어.”
“뭐? 왜?”
아무래도 그는 오늘 일어난 일들에 대해 그리 자세한 설명을 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유더가 루산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자, 이논의 표정은 더욱 좋지 않아졌다.
“가지가지 하는군. 빌어먹을.”
“단장님께서 널 불렀다고는 들었지만… 여기까지 정말 와줄 줄은 몰랐어.”
“네놈이 다 죽어간다며 기사 놈들이 들이닥쳐서는 다짜고짜 마차에 집어넣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들어 보니 아무래도 이논은 두 번째 파견대와 함께 떠나온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거의 차이가 없이 도착했다면 얼마나 급히 달려왔을지 상상이 되었다. 키시아르에게 큰 유감을 품은 듯한 이논은 연신 입 안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루산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 이논 님……? 언제 오셨어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루산이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이논이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는 루산의 상태를 살핀 뒤 혀를 차며 품속에서 환약 몇 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어떤 놈인지 아주 지독하게도 쥐어짜 놨네. 이거 다 먹고, 며칠간 신력은 쓰지 마.”
“죄송합니다. 사제가 되어서 면목이 없네요.”
“됐어. 쉬기나 해.”
이논이 준 약을 먹은 루산은 곧 잠들었다. 그들은 잠든 루산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유더는 이논의 눈빛이 제 얼굴과 눈, 그리고 그 안쪽까지 샅샅이 훑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논. 전에 주었던 끈, 기억해?”
“……그게 왜.”
“그게 이번 일로 인해 끊어졌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논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전에 말했듯이, 그건 일종의 부적이야. 소지자의 힘과 혼을 뒤흔들 만한 충격을 대신 빨아들여 분산해. 그러니까 그게 끊어졌다는 건, 네가 그만한 충격을 받았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이번 일로 인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뜻인가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위험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 정도로 위험한 느낌이 아니야? 오면서 대충 듣기는 했지만, 이거 정말 제대로 미쳤구만.”
냉정하게 유더를 미쳤다고 평한 이논이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다.
“이전에 말했었지. 네놈이 타고난 재질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는 있는 법이야. 기껏 돌아왔다면서, 일찍 죽는 게 네놈 소망이냐?”
“아직 안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믿든 안 믿든 지금 그게 중요해?”
벌컥 화를 낸 이논이 다시 몇 번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어쩌다 너 같은 놈이랑 얽혀서……. 정말 미치겠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정말 미안하면 이런 짓을 안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