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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18화 (318/805)
  • 318화

    칸나가 언급한 반대파는 가일과 두일 형제를 비롯한 온건파를 이르는 것일 터였다. 가일과 두일은 나한이 나그란의 별 내부에서 제 세력을 불려 나가는 일을 몹시 경계했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습을 솔직하게 내보였었다. 유더가 지금까지 그들에 대해 접한 정보를 생각하는 동안에도 칸나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나한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현자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의견 차이로 대립 중이리라 여겼었지만, 어쩌면 사실은…….”

    “그렇게 단적으로만 생각할 관계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군.”

    “네, 네.”

    칸나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이란 사람은 지금껏 수집한 정보로만 봐도 굉장히 위험하고 남의 의견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제 생각을 꺾고 움직이게 할 만큼 현자라는 자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둘의 관계 자체는 실은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죠.”

    미래에 일어났던 일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그럴싸한 의견이었다. 유더가 이전 생에서 처음으로 ‘나그란의 별’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던 내분 사건 자체는 지금보다 훨씬 뒤에 일어날 일이었다. 온건파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그 ‘현자’가 과연 유더가 이전 생에 만났던 현자와 동일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벌써부터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불사할 만큼 사이가 나쁜 건 아닐 확률이 높았다.

    ‘각성자들을 모아 테러를 일으키려 했던 파와 귀족들과 손을 잡으려 했던 파 간의 내분이 원인이 되어 망했다는 게 정말이라면… 역시 나한이 전자이고 현자가 후자겠지.’

    아직까지는 그런 집단이 제국 귀족층에 접근하려 들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유더가 모르는 사이 이미 현자 쪽의 세력이 무언가 손발을 뻗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각성자와 관련하여 그런 움직임이 보였다면 키시아르와 마병단의 눈에도 분명 띄었을 터였다.

    현자는 실제로 어떤 이일까. 가일과 두일 같은 각성자들을 거두고 여러 일을 한 듯하지만, 나한 같은 이들의 강경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걸 보면 그 또한 내심 그들과 의견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각성자가 아닌 이들도 모두 포섭하여 어떤 일을 저지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현자라는 이에 대한 정보를 앞으로 나한 쪽보다 좀 더 우선시하여 수집해 봐야겠군.”

    생각에 잠겨 있던 키시아르가 낮게 중얼거리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칸나, 막 돌아와 주었는데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타인 가의 거점 쪽에서 한번 더 수색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괜찮겠나?”

    “아, 네! 당연히 괜찮고말고요.”

    칸나가 심각했던 표정을 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 또한 앞으로 현자와 관련된 정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에문과 함께 루산을 만나러 먼저 나갔다. 유더는 홀로 자리에 앉아 있는 키시아르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 일로 혹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습니까.”

    그들이 만나려 했던 타이누의 기사들은 죽었고, 불법 무역 정황을 숨기려 한 증거가 들어 있었을지 모를 가방도 사라지고 말았다.

    나그란의 별의 일원들이 타인 공작가가 저지르는 불법 무역 건과 관련하여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키시아르가 하려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면 그건 큰 문제였다. 유더의 눈 속에 어른거리는 걱정을 읽었는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본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가방을 얻지 못한 건 좀 아쉽지만 나그란의 별이란 이들이 아까 말한 대로만 움직여 준다면 우리에게도 나쁜 전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타인 가 입장에서 나그란의 별이 자신들을 노린다는 걸 알게 될 경우,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 같나?”

    각성자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 일을 해결할 우선권은 마병단에게 주어진다. 각성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각성자보다 적절한 선택은 없는 법이었다. 유더는 순간 머릿속이 밝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토벌 조력 건을 거절하면서 이미 사이가 어긋났는데 그렇게 쉽게 태도를 바꿀까요. 치부와 관련된 일이니 최대한 숨기고 가문 내부의 힘만으로 해결하려 들 가능성도 높다고 봅니다만…….”

    “그건 타인 가 내부에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을 때의 일이지.”

    단언하듯 말한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문득 장난을 치는 아이 같은 미소가 어렸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타인 가에서 왜 이번 몬스터 토벌 건을 우리에게 부탁해 해결하려 했는지 생각해 보게.”

    키시아르가 몹시 즐거운 얼굴로 비밀을 알려주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현 타인 공작은 가문 대대로 물려 내려온 재산의 대부분을 도박적인 투자에 쏟아부은 것으로 유명하지. 여기저기 힘이 묶인 상태에서 이번 일을 홀로 처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나?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그렇군요. 그러면 저희는 그쪽에서 먼저 다시 손을 내밀 때까지 하려던 일이나 계속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그렇지.”

    나한과 에르시에게는 제3자가 타인 공작가의 불법무역 건에 끼어드는 걸 바라지 않는다 말하더니, 이 이야기대로라면 사실은 오히려 나그란의 별이 움직여 주기를 바라서 부추긴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 긴장감 가득했던 순간 속에서 상대를 교묘하게 손바닥 위로 올려 판에 끌어들인 키시아르의 말재간에 유더는 새삼 놀랐다.

    “우리는 둘 다 쫓고 둘 다 잡아들여야 하니 앞으로 더 바빠질 거야.”

    그나마 몬스터 토벌 건과 마력의 샘 유적 건은 당장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다행일지 몰랐다. 키시아르는 오늘 모든 단원들이 돌아오는 대로 이번 일과 관련한 정보를 알리고 새로운 명을 내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제 내가 여기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으니 남길 이들은 남기고, 떠날 이들은 이제 떠나야겠지.”

    “타이누로 가시겠군요.”

    유더는 반으로 나뉜 두 번째 파견대의 나머지가 향하고 있을 타이누를 떠올리며 말했다. 서부에서 해야 할 일들을 지휘하고, 타인 가의 근처에서 그들을 살피기에 가장 적절하며 누구에게도 크게 의심을 사지 않을 가장 적절한 장소는 그곳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키시아르가 유더를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흘렸다.

    “너도 함께.”

    키시아르가 가는 곳에 보좌인 유더가 함께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상태 때문에 두고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 짤막한 말이 새삼스러운 무게로 다가왔다.

    “데려가 주시는 겁니까.”

    “그러면 두고 갈 줄 알았나? 이번에는 줄 사탕도 없어.”

    “…….”

    뼈가 실린 미소에 유더가 입을 다물자 키시아르가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가자마자 일을 바로 시킬 생각은 없네. 타이누는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니 가서 치료도 좀 더 여유롭게 받고,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도록 해.”

    유더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을 하고 나서도 머리를 헝클던 손은 쉽게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언뜻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스러운 태도로 보였지만 유더는 문득 묘한 기분을 느꼈다.

    키시아르는 유더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단장님?”

    “음?”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아니. 간만에 만져 보니 감촉이 너무 좋아서 말이야.”

    물론 그 기분은 입을 열어 부른 순간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으나, 착각인 듯하면서도 아닌 듯한 묘한 느낌은 이후에도 잔향처럼 조금씩 남아 신경 한구석을 건드렸다. 유더는 가볍게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가는 키시아르의 옷 뒷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해가 지고 나서 나그란의 별 마을 폐허 주변을 수색하던 펠레타 기사들과 마병단원들이 모두 돌아왔다. 유더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이 달려들어 건네는 떠들썩한 인사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유더의 피부에 남은 얼룩과 아직 시력이 돌아오지 않은 왼쪽 눈을 보며 깜짝 놀랐고,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소식에는 제 일처럼 안타까워해 주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조금씩 무르익자 축 처졌던 분위기는 사라져 갔고, 마침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한 지미의 한마디로 그간의 억눌린 궁금증이 일제히 폭발하고 말았다.

    “유더 형! 정말로 그 큰 몬스터를 혼자 죽였어요? 정확히 어떻게 죽였는지 조금만 설명해 주면 안 돼요? 다들 산만큼 컸다는데, 전 상상이 안 가요. 시체는 지금도 볼 수 있는 거예요?”

    “유더. 오는 내내 마을마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만 하고 있던데 알고 있었어요? 이름은 아직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아마 수도로 돌아가면 금방 퍼질 거예요.”

    한쪽 팔에 매달려 눈을 반짝이는 지미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즐겁게 이야기해 주는 에버는 그저 약과였다. 두 번째 파견대로 온 단원들은 하나같이 페투아멧에 대해 궁금해했고, 어떻게 죽였는지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했다. 퍼부어지던 질문의 폭풍은 칸나가 끼어들어 몬스터의 사체를 잘라내어 보관 중인 창고가 있다고 말하고 나서야 겨우 조금 소강되었다. 유더는 그것을 보관 중인 장소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흥분에 들뜬 단원들은 저녁을 먹자마자 그 사체를 다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유더는 그리 보고 싶지 않았으나 단원들의 부탁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필 키시아르는 펠레타 기사들을 만나러 가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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