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붉게 물든 키시아르의 옷과 땅에 흩뿌려진 피를 본 순간, 유더는 처음으로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단장님, 그 피는……?”
“아. 이건 내 피가 아니야.”
키시아르가 몸에 묻은 피를 아무렇지 않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거의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잘도 도망가더군.”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고 싸늘하게 식었던 뱃속이 조금 나아졌다. 저 피 중 한 방울이라도 키시아르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한과 그의 동료들을 찾으러 갔을 터였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겨우 ‘다행입니다.’ 하는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땅을 물들인 피를 내려다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환상 능력에 대해 듣기만 했을 때는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왜 내 보좌가 그리 높은 평가를 했는지 알겠어.”
“그자가 능력을 썼습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는 이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도망치던 나한과 눈이 마주친 일순간, 키시아르는 순식간에 오감을 어지럽히며 파고드는 환상 때문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고 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적이 몸을 숨기기에는 충분한 틈새였다.
“이상한 기분이었어.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반응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정교하더군.”
“그자의 능력이 원래 그렇습니다.”
정신계 능력들은 얼핏 생각하면 한없이 약해 보인다. 어지간한 정신력을 지닌 자라면 실제와 가짜의 구별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데다, 시전자 본인의 전투력은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한이 보여주는 환상의 진짜 위력은 그것이 가짜임을 알아도 벗어나기 힘들다는 데 있었다. 그의 환상은 나한 본인이 아니라 당하는 이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기에 더욱 끈덕지고 지독했다. 거기에 제 나름의 신념에 한없이 맹목적인 성격과 동료들을 약점으로 삼지 않는 냉혹함까지 합해 보면 지난 생을 전부 통틀어도 그보다 뛰어난 정신계 능력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신력이 강하기로는 이 세상 누구를 데려와도 지지 않을 키시아르가 가짜임을 알면서도 멈출 정도의 환상이었다니. 그는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그런데… 대체 무슨 환상을 보셨습니까?”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알고 싶나?”
“불편하시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너였어.”
곧바로 흘러나온 대답에 유더는 순간 멈칫했다. 유더의 반응을 살피듯 입을 잠시 다물었던 키시아르가 이내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바보 같다고 말해도 돼. 보좌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질책을 받아 마땅하지.”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가슴 어딘가가 또다시 긴 바늘에 찔린 듯 따끔하게 쑤셨다. 유더는 침묵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 자책하실 사항이 아닙니다.”
나한의 환상에 당한 이후의 더러운 기분을 유더는 아주 잘 알았다. 키시아르가 정확히 그의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환상 속에서 본 순간 느꼈던 피가 식는 기분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다. 유더는 몇 번이나 그의 환상을 깨트려 벗어난 경험을 떠올리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자의 환상은 대단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그 능력을 보셨으니 다음에는 알아차리고 상대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봅니다. 저도 처음에는 여러 번 당했었습니다.”
3번이나 나한과 마주치며 그의 환상을 접하다 보니,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특유의 어떤 느낌이 조금씩 파악되기 시작했다. 키시아르라면 분명 유더보다 더 많은 것을 빠르게 깨달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 그래야겠지.”
겨우 짜낸 말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된 듯, 키시아르의 눈빛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가셨다.
“그러고 보니 그자가 네게는 무슨 환상을 썼는지 여태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군. 보고서에는 너무 간략하게 적혀 있어서.”
“…….”
이번에야말로 정말 산 넘어 산을 만난 기분이었다. 유더는 최대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가장하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냥 그게 전부입니다. 이제 와서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키시아르를 속이려 드는 건 정보를 읽는 칸나를 속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손 안에 절로 땀이 났으나, 유더는 머리를 비우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붉은 시선이 유더의 보이지 않는 왼쪽 눈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그래……. 그렇군.”
“단장님! 유더!”
다행히도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뒤쪽에서 에문이 나타났다.
“여기 계셨군요. 전 시간이 지나도 안 오셔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헉, 그런데 그 피는……?”
“내 피가 아니야.”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했던 것과 같은 답을 다시 한 번 침착하게 돌려주었다.
“아……. 다, 다행입니다. 사제님께서 방금 깨어나셨어요.”
그들은 정신을 차린 루산을 업고 다시 서부 마법사들의 거점으로 되돌아왔다. 나그란의 별 수색을 위해 떠난 이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루산은 눈을 뜬 뒤에도 얼마간은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할 만큼 큰 충격에 빠져 있었으나, 기력을 회복하는 약을 먹고 나서 겨우 평소와 같은 모습을 조금 되찾았다.
키시아르는 미칼린을 불러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에게 나한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나그란의 별과 관련된 부분을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그의 동료가 오늘 타이누의 기사 3인을 죽였으며, 이전에도 여러 번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는 위험한 자라는 정보만으로도 미칼린의 얼굴은 금세 창백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부상을 입은 마법사들이 너무 많아서 본격적인 연구 전 인원과 시설 교체를 대대적으로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그 일을 어서 앞당기고 거점을 한동안 봉쇄하는 쪽도 생각해 봐야겠군요.”
미칼린이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는 동안, 에문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키시아르를 불렀다.
“단장님. 잠깐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칸나가 돌아왔습니다. 뭔가 우선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고…….”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자리를 벗어나 칸나를 맞이했다. 엘더 남매의 힘으로 혼자서만 먼저 돌아왔다는 칸나는 키시아르를 보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빠르게 보고를 시작했다.
“마을이 있던 곳 주변을 먼저 읽어보았더니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그곳에 왔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누구지?”
유더는 어쩐지 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칸나의 답을 기다렸다.
“나한이라는 자입니다. 그, 이전에 아페토 공작가에 나타났었던 이들을 이끌고 왔다는 환상능력자인데…….”
혹시가 역시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그자와 방금 마주치고 온 참이라네.”
“아무래도 그 사람이… 네?”
나한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려던 칸나가 놀란 얼굴로 숨을 삼켰다.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그들이 마주친 나한과 그의 동료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타이누에서 온 기사들을 죽이고 루산을 공격했으며, 타인 가의 불법무역과 관련된 증거가 들었을지도 모를 가방을 가지고 사라졌다는 말을 듣자 칸나의 표정은 몹시 다채롭게 변했다.
“……세상에.”
“그래서, 그자는 언제 그곳에 왔다고 하던가?”
“그건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마을을 내내 능력으로 숨겨 두다가 모두 이주한 후에 허물어뜨리고 드러낸 거라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 없어서…….”
하지만 칸나가 읽어낸 나한의 정보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이었다. 그는 나그란의 별 마을에서 일어난 싸움과 관련한 일로 그곳에 왔고, 이후 모두를 한곳으로 옮기게 했다. 그게 끝이었다.
“싸움이라……. 이주와 관련된 싸움일 가능성이 크겠군.”
“그럴 확률이 커 보입니다. 이주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두고 내내 불안해하던 사람들의 기억이 다수 읽혔거든요.”
‘이주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두고 고민했다는 건… 각성자만 데려갈지 말지를 두고 대립했다는 건가.’
“나한이라는 자의 권한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군. 각성자만을 위하는 자가 모두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유더의 생각과 비슷한 판단을 내린 듯, 키시아르가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읽어낸 것이 없나?”
“네. 아무리 읽어 보아도 확실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한 칸나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일과 두일 형제에게서 그간 읽어낸 정보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짚이는 부분은 있어요. 제 생각이 맞으리라는 확신은 없지만요…….”
“그 부분은 내가 가감해서 잘 들을 테니, 뭐든 떠오르는 게 있다면 말해 보게.”
키시아르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힘을 얻었는지 칸나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조금 사라졌다.
“전에 보고를 드린 적이 있지만, 나그란의 별 내부는 두 파로 나뉜 게 확실해 보여요. 아무리 나한의 권한이 크다 해도 반대파 쪽의 의견이 강했다면… 아주 거부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