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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16화 (316/805)

316화

기사들만 만나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갑자기 심각하게 변하자 에문과 루산은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유더는 두 손을 모아쥔 채 끊임없이 입 속으로 기도문을 외는 루산과 허리에 찬 단검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에문을 보며 그들이 죽고 죽이는 일보다는 아직 평화에 익숙한 사람들임을 새삼 인지했다.

‘내 힘이 절반이라도 돌아온 상태였다면 안심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는 가느다란 물줄기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적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각성자가 아니라면 걱정할 이유는 더 줄어들 터였다.

“저기 4번째 거점이 보이는군.”

앞서 나가던 키시아르가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죽은 기사들이 향하려 했을 마지막 종착점이 있었다. 제멋대로 자라난 풀과 나무 사이에 방치된 작은 집 주변으로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유더는 그 바람이 피부에 닿은 순간 저도 모르게 눈가를 움찔 굳히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없었지만……. 감각이 아닌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낯익은 기묘함을 느꼈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 살피기 전에, 먼저…….”

“잠깐! 위험합니다.”

유더는 본능에 따라 가장 앞에 선 키시아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앞쪽에서 날카로운 살의를 띤 공격이 날아들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유더의 모든 감각이 최고조로 확장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언제부터, 아니. 어디서부터……!

“이런, 결국 들켰군.”

눈앞에서 공간이 찢어지며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얼굴들이 나타났다. 경계심을 잔뜩 곤두세운 채 양손을 올리고 있는 여자와 평온한 표정을 지은 남자 한 쌍이었다. 유더는 그중 남자 쪽의 얼굴을 확인하고 숨을 삼켰다.

“……나한.”

“아직 이름을 기억해 주고 있었다니 기쁜데.”

한쪽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져 뭉그러진 사내가 유더를 보며 유쾌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못 본 사이 몸이 많이 안 좋아진 듯해 안타까웠는데, 역시 그 예민함은 여전하군. 훌륭해.”

“…….”

“형제의 무용담은 여기에 오자마자 엄청나게 들었어. 기왕이면 만나지 않고 지나가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말이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저번에 분명 경고했을 텐데.”

감정을 조금도 담지 않은 유더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은 나한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거부해도 혈연 간에 피를 나눈 게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듯, 힘을 나눈 우리들은 모두 형제요 자매야.”

힘이 남아 있었다면 이쯤에서 한 방 날렸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유감이었다. 유더는 나한의 도발 같은 발언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타이누에서 온 기사들은 너희가 죽였나?”

“내가 한 일은 아니야. 옆에 있는 에르시가 했지.”

가볍게 대답한 나한이 곁에서 숨을 몰아쉬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허리 옆에 피가 묻은 가방을 꽉 묶고 있었다.

“에르시는 참을성이 없거든. 뭐, 찢겨 죽을 만한 일은 그들이 먼저 했고, 자비롭게도 고통 없이 보내줬으니 저세상에서도 불만은 없을 거야.”

나한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태연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피비린내 나는 말을 해대는 면모도,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재단하는 면모도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다를 바 없는 그대로였다.

‘하필 이럴 때 마주치다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힘이 전부 돌아온 상태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나한을 상대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름을 보니 저자가 바로 너와 두 번 만났다던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인가?”

그때, 딱딱하게 굳은 유더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여 낮게 속삭였다.

“네.”

“그래… 오랫동안 찾아도 만나지 못했던 자를 드디어 여기서 보는군.”

붉은 눈동자가 나한의 모습을 느리게 훑었다. 그제야 나한 또한 유더의 곁에 있던 키시아르를 제대로 인식한 듯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살인을 저질렀다고 직접 자백했으니 여기서 잡혀도 아무런 불만은 없겠지. 일단 가방부터 회수하고, 그다음에 자세한 정황을 듣도록 해 볼까.”

“단장님.”

유더는 금방이라도 나설 듯한 키시아르의 옷자락을 슬며시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키시아르의 강함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보호할 이들이 딸려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한과 같은 정신 계열 능력자를 상대로 등 뒤에 약점을 두고 있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렇군. 그쪽이 그 유명한 마병단장, 펠레타 공작인가…….”

유더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은 듯한 나한의 눈빛 속에서 여태까지의 여유 대신 묘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호기심과 경계가 반쯤 뒤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지. 내가 본 중 가장 강한 형제를 아래에 둔 사람은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이건 또 굉장히 의외인데.”

“왜. 예상보다 더 잘 생겼나?”

“하하. 그럴 리가.”

키시아르의 반문에 고개를 저은 나한의 시선이 유더에게로 돌아왔다. 유더는 미묘한 웃음을 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기이한 불안감을 느꼈다.

“굳이 말하자면… 이미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 놀랐다고 해야겠지.”

불안이 현실이 된 순간,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이 전신을 둔중하게 울렸다.

유더는 이전에 나한이 제게 환상 능력을 사용했었을 때 나타났던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떠올렸다. 그건 그저 실제와 다른 환상일 뿐이었고 금방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능력 시전자인 나한은 유더가 무엇을 봤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너…….”

“그래서, 시체에게서 빼앗은 가방으로는 뭘 할 생각이지?”

유더와 나한 사이에 오간 모종의 기류를 보지 못했을 키시아르는 나한의 말을 무시하며 그저 담담히 다음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걸로 뭘 할지는 에르시의 몫이니 그쪽에 묻도록 해. 에르시, 그걸로 뭘 할 생각이냐고 저분께서 묻는데.”

“…….”

여자는 대답 대신 입을 벌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진한 살의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무엇을 할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타인 가의 불법 무역 건은 현재 나도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야. 거기에 제3자가 끼어드는 건 달갑지 않은데.”

“우린 끼어든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겠지, 단장 나리.”

나한이 재미있다는 듯 대꾸하며 양손을 가볍게 올렸다. 능력을 쓰지 않은 작은 동작에도 순식간에 경직된 분위기를 보며 그는 즐겁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건 살인이 아니라 단죄야. 에르시는 그들에게 피해를 입고 도망쳐 우리 쪽으로 들어온 피해자로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것뿐이고 나는 그걸 지켜보았을 뿐이었어. 거기에 마침 지나가던 마병단이 끼어들었는데, 이대로라면 누가 누구의 일에 끼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붉게 일그러진 눈이 키시아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페토의 쓰레기들도 전부 살려 준 자비로운 마병단이 타인 쪽까지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 우리 탓은 아니겠지.”

“그런 말은, 옳지 않아요. 잘못한 이들은 물론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당신의 몫이 아닙니다!”

루산이 앞으로 나서서 나한의 말에 반박했다.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꼭 쥔 상태였지만 아까 본 시체의 참혹한 모습이 젊은 사제에게 입을 열 용기를 준 듯했다.

“흠.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에게 맡기란 소린가? 그것도 아니면 편파에 휘둘리는 멍청한 인간? 그도 아니면… 우리와 같은 힘을 지니지 않은 적들의 발아래 그저 엎드려 있을 뿐인 마병단?”

사제복을 걸친 루산을 바라보는 나한의 눈빛은 지극히 평온하고도 차가웠다.

“아니. 아니지. 너희가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도 굳이 멍청한 이들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

지독하게 비틀린 살의를 띤 섬뜩한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루산은 저도 모르게 공포에 질려 휘청거렸다.

“으, 으윽, 아……!”

“사제님!”

“이건 대체, 아. 안돼, 아……. 살려, 살려줘……!”

유더는 황급히 루산을 부축했다. 루산은 순식간에 닥쳐온 환영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허우적대며 비명을 질렀다. 살려 달라는 비명 속에 고통스럽게 휘젓는 팔다리를 보며 유더가 막 능력을 쓰려 한 순간, 키시아르가 먼저 손을 올려 손끝을 가볍게 퉁겼다.

수확철 축제 때 보았던 것과 비슷한 빛 덩어리가 순식간에 나한과 동료의 주변에 있던 건물과 나무를 부수었다. 부러지고 폭발하는 폭음과 함께 루산이 기절해 축 늘어졌다. 유더는 뒤이어 곧바로 앞을 향해 몸을 날리는 키시아르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문. 사제님을 부탁할게!”

“안돼, 유더. 단장님께서 널 보호하라고……!”

뒷말은 듣지 않고 뛰쳐나갔다. 유더는 폭음 뒤에 사라진 세 사람의 자취를 쫓아 달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멈추어 서 있는 키시아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단장님!”

“…만일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말을 안 듣는군.”

키시아르는 혼자였다. 나한과 그의 동료는 그 짧은 사이를 틈타 제대로 몸을 피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붉은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 주변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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