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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14화 (314/805)

314화

움직이지 않고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눈앞에 있는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뿐이었기에, 유더는 흐릿한 시야에 비친 잘난 미모를 감상하며 자연스레 과거의 어느 한때를 떠올렸다.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가득했던 이전 생에 그들은 자주 한 침대를 썼다. 당연히도 대부분은 관계를 위함이었다. 빛을 밝히지 않은 밤의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눈이 좋아도 상대의 얼굴은커녕 윤곽을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때문에 유더의 기억 속 키시아르와의 동침은 대부분 엎드려 있을 때 허리를 움켜쥐던 손이나, 잠에 취해 있던 도중 옷 속으로 파고들던 차가움, 혹은 옆으로 누워 있는 등 뒤에 닿던 찰나의 체온 정도로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새삼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보여주면서 몸은 잘도 섞었군.’

키시아르가 죽은 뒤에는 누구와도 동침하지 않았다. 연인도 만들지 않고 황제가 직접 건넨 결혼 제의도 거절한 채 홀로 지내는 그를 다른 이들이 꺼림칙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딱히 다른 이와 함께 몸을 맞대고 눕고 싶지도 않았던 데다 섹스를 할 시간에 일을 하는 쪽이 어느 모로 보나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평민 출신인 유더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없었으니 그 선택은 지금도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다시 침대에 함께 눕게 된 이가 키시아르라니. 그에게 향하는 이끌림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새삼 쓴웃음이 흘러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리 생각하면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여기인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똑같이 침대에 누워 있어도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일단 마주 누운 채 이런 식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부터가 이전 생에는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키시아르가 알파 각성자이며, 작정하고 힘을 쓴다면 언제든 짓눌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몸은 조금도 상대방에게 경계나 긴장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에 있는 얼굴을 먼저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고 있을 정도이니 그 변화가 실로 소름 끼칠 정도였다.

이리 변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오늘은 새삼스레 그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만약 2성 발현 이전에 키시아르가 이런 식으로 침대에 끌어들였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힘을 써서 빠져나오는 걸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을 터였다.

다른 감정과 달리 믿음과 신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벽을 부수는 것을 좋아한다던 사내는 그 말대로 유더의 주변을 두르고 있던 수많은 벽을 오랜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철저히 부수어 놓았다.

이렇게까지 하여 벽을 모두 부수고 손에 넣은 뒤, 저 사내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이전까지의 유더 아일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키시아르가 내보이는 끝없는 인내에 이제 안도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들킨다면, 그들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키시아르는 이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유더에게 건네주었다. 유더는 아직 제 손에 들어온 그 작은 열쇠의 무게를 실감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어쩐지 그것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 무엇이 바뀌게 될지 알 것 같은 어렴풋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든 바뀌어버릴 것이다. 이 안온하면서도 팽팽한 고요함도, 그리고 달콤한 평온 속에 두 사람이 각자 녹여 뭉쳐 둔 충동들도.

농축된 것들이 열린 문 바깥으로 튀어나와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리리라.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리겠지.

과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냉정하게 자문하는 머리와 달리, 가슴 안쪽에서는 불온한 울렁거림이 뜨거운 불꽃처럼 일어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키시아르를 깨울 때까지 아주 잠시만 그렇게 있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

유더는 제 몸에 바르게 꼭 덮어 둔 이불을 내려다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베개 위에 반짝거리는 종이로 접은 꽃이 곱게 놓여 있었다. 그것이 제가 어제 아침에 먹고 놓아둔 사탕 포장지로 만든 것임을 알아차린 순간,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막힌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몸이 나은 것을 축하하며. 진짜는 나중에.’

혹시나 싶어 종이꽃을 펴 보자 마치 놀리는 듯한 한 줄의 글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웬 장난인가 싶었는데,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나은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로 꽃을 주고 싶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필요 없다는 말을 전달해 둬야겠군.’

유더는 말없이 그것을 도로 접었다. 키시아르가 일어나서 이걸 쓰고 꽃이나 접고 있을 동안 하나도 모른 채 잠을 잤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넘어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유더는 그 종이꽃을 없애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다른 이들이 찾지 못할 짐가방 가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

유더가 제 발로 걸어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로 나았다는 사실에 마병단원들은 모두 기뻐했다. 밤새 교대로 마력의 샘 유적지를 지켰지만 피로해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마력의 샘 유적지 안쪽에서는 밤새도록 바람이 새고 땅이 울리는 것 같은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했다. 단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 상태를 살핀 키시아르는 그의 예상이 맞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드디어 서부 마법사 연합 수장 미칼린과 단둘이서 마주 앉아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칼린은 방에서 나온 뒤 피로와 경탄, 미약한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앞으로 연합에서 진행할 연구를 펠레타 공작이 전폭적으로 후원해 주기로 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밝혔다.

다만 그 연구는 마력의 샘 유적지에 존재하는 마력을 가두고 증폭시키는 것이 아닌,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는 현 상황과 이후의 변화를 살피고 대삼림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연구하는 쪽으로 주제를 수정하게 될 터였다. 많은 것이 변한 듯해도 결국 순수한 마력의 영향에 대해 연구한다는 본질은 같았다. 남아 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그 제안에 기꺼워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어떤 재앙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지를 이미 두 눈으로 보고 무언가를 느낀 바 있었다. 결국 그 길이 최선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했다.

“어차피 올해 안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면 서부 연합은 이 연구를 그만두어야 할 상황이었다고 하더라. 마법 연구를 하는 데는 돈이 아주 많이 드니까 잘 되었다고 생각했겠지.”

“사실 순수한 마력을 증폭시켜 이용하겠다는 꿈만 큰 말보다, 증폭진의 힘을 흡수한 몬스터의 영향을 해제하는 방법을 발견한 업적이 마법사들 쪽에서는 더 알아주는 결과가 될 거라는 정보도 읽었어. 몬스터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잖아. 이번 결과가 엄청 좋은 선례가 될 거래.”

가케인의 말에 이어 칸나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단장님하고 유더가 무섭고 미안해서 동의한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역시 아무런 이득을 따지지 않고 계산한 건 아니란 거네.”

에문이 투덜거리자 다른 단원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침을 먹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전서조를 직접 받기 위해 나간 키시아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유더는 동료들의 이야기 소리를 반쯤 흘려 들으며 멀지 않은 곳에서 간간이 지나다니는 마법사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거점 한복판에 당당히 자리를 깔고 앉은 마병단원들 가까이에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돌아다니고는 했는데, 어쩌다 유더와 눈이 마주치면 아주 두렵고도 신기한 무언가를 본 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사라지고는 했다.

‘내 소문이 엄청나게 나긴 한 모양이군.’

그때, 문이 열리며 키시아르가 들어섰다. 그는 한 손에 작게 접은 편지를 들고 있었으나 나갈 때와는 달리 표정이 다소 심각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당장 모두 이동해야 할 것 같군.”

그가 단원들을 돌아보며 내뱉은 말에 모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단장님?”

“어제까지만 해도 대삼림 내에 있었던 ‘마을’이 오늘 아침 갑자기 사라졌다는 모양이야.”

뭉뚱그려 마을이라고만 표현했지만 대삼림 내에 존재할 마을은 하나뿐이었다. 유더는 머릿속에 떠오른 나그란의 별의 일원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사라졌다면… 저희를 피해 도망친 겁니까?”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키시아르는 나그란의 별이 만든 거점 마을에 펠레타 기사단의 기사를 몰래 보내 정보를 파악하고 접선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유더에 대한 소문이 퍼진 이후 그들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측하기는 했으나, 이토록 아무 낌새도 없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줄은 기사들도 몰랐던 듯했다.

“마을 내에 있던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도 전부 사라졌나요?”

“보고로는 그래 보인다고 하는군. 하지만 전부는 아닐 수도 있으니 수색하는 중이야.”

펠레타 기사단은 현재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마을과 구성원들을 추적하고, 마을 내에서 그들과 연이 닿은 이들이 남겼거나 혹은 남겨줄지도 모를 정보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각성자가 아닌 펠레타 기사들만으로는 대삼림 내에서의 수색과 추적에 한계가 있었다. 키시아르는 단원들 일부를 그들과 합류시켜 수색을 돕고, 곧 도착할 두 번째 파견대와 협력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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