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순간적으로 치민 당혹감은 이내 빠르게 사라졌다. 유더는 저를 안은 채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키시아르를 올려다보았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 위로 스민 감정들을 제 눈으로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조심스레 손을 올리자 키시아르가 눈을 내리깔며 뺨을 가져다 댔다. 아름다운 맹수가 스스로 몸을 비비는 듯한 모습에 손끝이 저릿했다. 피부에 닿은 흰 뺨은 놀랄 만큼 매끄러웠고, 또 뜨거웠다. 닿은 가슴 사이로 누구의 것이라 할 것 없이 크게 쿵쿵대는 박동이 느껴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문득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중얼거린 한 마디는 유더 자신의 귀로 듣기에도 몹시 서툴게 느껴졌다. 키시아르는 대답 대신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풀어주었다.
감정을 갈무리한 뒤에도 그는 유더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시선을 떼지 않았다.
“루산 사제에게 나를 살피라고 부탁했다면서.”
“아, 네.”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피로한 기색이 느껴지는 키시아르가 혹 몸에 이상이 일어났음에도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었다. 유더의 말을 들은 키시아르는 그 덕에 루산을 피해 빠져나오느라 힘들었다는 말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몸도, 그릇도 멀쩡하니 걱정 말게. 내가 기력이 빠져 보인다면 그건 아마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갑자기 힘을 사용하려 한 누군가 때문일 테니까.”
“…….”
상대를 향한 걱정이 갑자기 자신을 향한 창이 되어 돌아왔다. 유더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당시에는 매개체가 손에 있었고,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힘을 쓰고 본 것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키시아르의 입장에서는 놀랄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쓴 매개체와 그 힘에 대해 제대로 묻는 걸 잊었군. 대체 그건 뭐였지?”
키시아르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매개체로 향했다. 유더는 그것을 집어 들어 내부를 살피는 키시아르를 보며 지금껏 자신이 했던 추측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키시아르도 무언가 짐작했던 부분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는 동안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매개체 내부의 힘을 끌어냈다……. 그래. 그편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추측이겠군.”
“…….”
“아프지는 않았나?”
붉은 눈동자가 유더의 얼굴을 웃음 없이 바라보며 물었다. 실은 아주 아프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는 그리 믿는 것 같지 않았지만 일단 그 이상 묻지 않고 매개체를 수거해 품에 넣었다.
“이건 내 쪽에서 다시 살피도록 하지. 혹 몸 상태에 변화가 있다면 숨기지 말고 말해 주게. 마법사들이 묻거든 각성자의 능력이라고만 대답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움직이기 전에 예고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어. 마음의 대비라도 하면 조금 나을 것 같으니까.”
불시에 또다시 찌르는 창을 느끼며 유더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마력의 샘 유적 쪽은 괜찮을까요. 혹시 또 전처럼 몬스터가 이상발생하거나 이상한 균열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지금 말을 돌리는 건가?”
키시아르가 눈을 가늘게 떴으나 그는 이내 한숨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고는 유더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뭐, 장담은 어렵겠지만 일단 내 생각에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네. 아까 흔들리던 땅을 진정시킬 때 내가 말했던 것, 기억하나?”
“증폭되어 고여 있던 마력이 사라지고 깊은 곳에 남아 있던 것들이 올라오는 것이라 말씀하셨었지요.”
“그래. 어젯밤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지.”
키시아르는 그간 유더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개인적으로 마력의 샘 주변을 살피며 마법사들의 연구내용을 몇 번이나 읽었다. 마법사들은 오랫동안 남아 있던 순수한 마력이 고인 장소라는 특수성에 눈이 뒤집혀 ‘마력의 샘’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 주었지만, 힘에 집착할 이유가 없는 이의 눈에는 전혀 다른 부분들이 보였다.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곳에 오랫동안 마력이 고여 정체되어 있었던 건 확실해. 하지만 오래되었다 하여 그게 꼭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뜻은 아니지.”
키시아르는 마력의 샘을 제일 처음 발견한 마법사가 쓴 연구일지 속에서, 그 아래 고인 마력의 힘을 탐지할 수 있는 범위가 놀랍게도 대삼림 전체와 ‘우연히’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우연일 리 없었다. 마법사들은 그저 그 사실보다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쪽을 더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키시아르는 오랫동안 대삼림 아래에 고여 있던 마력이 우연히 빠져나올 만한 틈새를 찾아 흘러나온 것이 바로 그 ‘마력의 샘 유적지’이며, 고인 마력이 미치는 힘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대삼림도 함께 넓어져 간 것이 아닌가 하는 대담한 가설을 세웠다.
“그런 식으로 고이고 고여 작은 틈새로 비져나올 만큼 가득 차버린 주머니를 오히려 더 부풀리려 한다면 터지는 게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나.”
대삼림은 오랫동안 비정상적인 성장환경으로 골머리를 앓아 왔다. 서부 국경 지대는 예부터 몬스터가 많이 발생하기로 유명한 지역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만약 마력의 샘에 고인 마력이 그 원인이라면, 답은 가두고 증폭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소진하고 밖으로 빼낼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일 터였다.
오늘 밤, 키시아르는 유더 아일의 몸에 남아 있는 증폭진의 흔적을 해지하는 거대한 마법이 성공함과 동시에 일어난 지진이 땅 아래 고인 힘이 나올 수 있는 새 길의 가능성이라 판단했다. 아직까지는 예상일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확실히 알게 될 터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올해 이후로 이토록 심각한 수준의 몬스터 이상발생은 없을 거야. 대삼림의 팽창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무언가 변화가 생기겠지.”
꿈만 같은 예측이었다.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대삼림을 향해 달려올 욕심쟁이들을 우선 막아야겠지?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좀 더 쓸모 있는 연구도 시켜야 할 테고.”
“…하려고 하겠습니까?”
“안 하면 어쩔 텐가. 그들은 우리에게 진 빚이 많아. 나는 그걸 봐주지 않고 아주 성실하게 받아낼 생각이라네.”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몹시 많은 뜻을 내포한 미소가 화사하게 피었다. 그제야 유더 또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발견한 그 이상한 균열과 같은 현상이 다른 곳에서 더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거야.”
유더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재앙의 전조와도 같은 그 균열에 대해 탐색할 의지가 있다면,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이는 바로 유더 자신일 터였다.
“그 일…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안 돼.”
기다렸다는 듯 단호한 답이 되돌아왔다. 유더가 눈을 크게 뜨자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리며 코끝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고 싶으면 다 나은 뒤에 지원하게.”
“…….”
“그렇게 봐도 안 되는 건 안 돼.”
제가 대체 뭘 어떻게 봤다고 자꾸 웃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는 다시 한 번 부탁을 하려 했으나, 키시아르가 시간이 늦었다는 말과 함께 그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자, 상태가 나아진 걸 확인했으니 이제 눕게. 빨리 낫고 싶다면 많이 자야지?”
“단장님도 바로 주무시러 가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숲으로 가서 단원들을 살필 예정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쉬어야 할 사람은 유더가 아니라 키시아르였다. 유더는 여전히 피로해 보이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단장님께서도 쉬십시오.”
“아직도 나를 걱정하나? 괜찮다는데도.”
“교대 정도는 지시가 없어도 다들 알아서 잘할 겁니다. 정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눈을 붙이고 가십시오. 제가 깨워드리겠습니다.”
“잠깐…….”
끌려오던 사람이 갑자기 반대로 자신을 끌기 시작하자 키시아르가 드물게 당황한 티를 냈다. 유더는 그 틈을 타 그를 침대 위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방비하게 침대에 누운 장신의 사내가 흐트러진 옷자락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채 유더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참, 색다른 기분인데. 아래에서 보니 평소보다 더 매력적인 것도 같고.”
“농담하지 마십시오.”
시트에 파묻혀 헝클어진 금발 아래 호선을 그리는 고혹적인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홀릴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유더는 간신히 그것을 외면했다. 겉옷 자락을 벗기는 동안 혹 키시아르가 일어나서 다시 나갈까 싶어 경계했지만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그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제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나자 별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찼다.
“힘들어 보이는데.”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 눕지 그래.”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더는 어젯밤 키시아르가 앉아 있었을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다른 곳 한 번 보는 일 없이 움직임을 따라오는 붉은 시선에 피부가 다 따끔거렸다.
“……약속대로 깨워 드릴 테니 이제 좀 쉬십시오.”
“이게 쉬는 거야.”
“저를 계속 보시면 주무실 수 없지 않습니까.”
“이제야 되찾은 눈을 쳐다도 보지 못하게 하다니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낮게 웃은 키시아르가 이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더의 눈에 고정된 상태였다. 유더는 검게 얼룩진 왼쪽 눈을 보는 키시아르의 눈빛 속에서 저릿함을 느꼈다.
마치 유더의 모든 것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한, 끝을 알 수 없는 갈망이 어른거리는 눈이었다.
“주무십시오.”
“…잠이 안 와.”
그런 말을 할 나이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싶지만 키시아르의 눈빛은 진지했다. 유더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손이라도 잡아 드릴까요.”
“잡아 줄 건가?”
“원하신다면 잠드실 때까지 잡고 있겠습니다.”
키시아르가 해 주었듯이,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었으나 예상과 달리 상대는 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유더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사내의 얼굴 위로 문득 열기를 띤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네가 쉬기를 바라고, 너는 내가 쉬기를 바라니 아무래도 가장 좋은 건 역시 함께 쉬는 게 아닐까 싶은데.”
“네?”
“기왕 잡아줄 거라면 그냥 같이 눕지.”
키시아르는 기어이 얌전히 누워있기를 포기하고 유더를 잡아끌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가 벌린 이불 속에 갇혀 누운 상태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자, 이러면 우리 둘 다 쉴 수 있어. 잘 자게.”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유더는 저를 끌어안은 채 잠이 오지 않는다던 눈을 잘도 감은 키시아르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주무십니까?”
“…….”
“장난치지 마시고 놓아주십시오.”
“…….”
“단장님.”
유더는 몇 번의 부름 끝에 결국 숨을 몰아쉬며 몸에 힘을 뺐다. 누군가 들어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있는 키시아르에게 힘을 사용해서까지 밀쳐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밀쳐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