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12화 (312/805)
  • 312화

    “자. 이제 그만 진정하고 상태가 어느 정도 나아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단원들은 유더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순수했던 기쁨의 포옹은 어느새 그간 참아온 분노의 감정을 쏟아붓는 강제 접촉의 장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다시는 혼자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꽉꽉 안아대는 손길에 유더가 작게 신음하자, 벽에 기대어 있던 키시아르가 그들을 말렸다.

    “하지만 단장님. 지금이 아니면 유더가 이걸 받아주기라도 할 것 같으세요?”

    “맞아요. 조금만 더 혼내게 해 주세요.”

    단원들이 아쉬워하며 항의했지만 키시아르는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그래? 계속할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나도 혼낼 순서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 어디 한번 참여해 볼까.”

    누가 유더와 함께 제 품에 안기고 싶느냐는 천연덕스러운 말과 함께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그를 보며 단원들은 순식간에 의지를 꺾었다. 유더는 겨우 몸이 터질 뻔했던 압박감에서 벗어나 숨을 내쉬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웃고 있던 루산이 다가와 유더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피부에 스며들었던 독성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네요. 체온도 정상이에요. 이제 신성력을 받아들이실 수 있는지 보지요.”

    루산은 유더의 팔다리에 감은 붕대를 풀고 아직 남아 있는 검은 얼룩의 범위를 상세히 살피며 신성력을 부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 얼룩들은 신성력을 받으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늘어나기를 반복했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얼룩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옅어진 뒤 다시 늘어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한 루산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떠올랐다.

    그러나 비교적 빠르게 힘이 돌아오는 몸과 달리, 눈은 처음 나아진 상태에서 그리 변화가 없었다. 특히 검은 얼룩이 번진 왼쪽 눈동자는 여전히 빛과 어둠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루산은 그것이 페투아멧의 체액을 가장 많이 흡수한 부위이기 때문일 것이며, 느리기는 해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고 유더의 몸에 몇 번 더 신성력을 부어 주었다. 유더는 동료들이 마력의 샘 유적지를 지키기 위해 물러난 사이를 틈타 루산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제님.”

    “그래서 한쪽 눈으로만 보면 거리감이 달라져 불편할 수 있으니 나으실 때까지는 가리고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네?”

    무어라 중얼거리던 루산이 뒤늦게 반응했다.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키시아르를 눈짓으로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 된 것 같으니 단장님의 상태도 보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장님요?”

    “네. 피로해 보이시니 방에 돌아가실 때 보아주십시오.”

    키시아르를 흘긋 본 루산이 의아하게 반문했다. 아무래도 그의 눈에 비친 키시아르는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더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키시아르가 다른 이들의 앞이라 평정을 가장하고 있을 뿐, 몹시 지친 상태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루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는 유더의 부탁대로 키시아르를 다른 이들 몰래 살펴 주겠다고 대답했다. 믿음직한 답이었으나 키시아르가 보통 사람과 다른 몸을 지녔다는 걸 아는 유더는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키시아르는 분명 오늘 밤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하겠다는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가 제 상태를 개인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또다시 다른 이들 몰래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나도 살피면 되겠지.’

    유더는 앞을 볼 수 있게 된 뒤 처음으로 제가 묵던 침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섰다. 앞이 안 보일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훨씬 넓은 방이었다. 이런 방이 보통 마법사들의 침실일 리 없다. 아무래도 제가 미칼린의 침실이나, 혹은 키시아르가 묵을 방을 빼앗은 게 분명했다.

    창문을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한 침대 곁에 대야와 물수건, 그리고 곱게 싸인 방한용 주머니가 보였다. 이제는 쓸모없어질 물건들이었다. 호화롭지는 않아도 갖출 것은 다 갖춘 가구를 훑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탁자와 의자에서 멈추었다.

    키시아르가 몇 번이나 자신을 옮겨다 식사를 먹였던 그 장소가 바로 저곳이었다. 유더는 그쪽으로 다가가 의자의 등 부분을 슬며시 어루만져 보았다. 이 낡은 나무 의자에 키시아르와 제가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등에 닿는 부분이 몹시 딱딱했다. 아무것도 없는 탁자를 내려다보다 눈을 조용히 감아 보자 방금 전과 달리 묘하게 익숙한 감각들이 슬그머니 오감을 자극했다.

    메마른 먼지 냄새. 창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대삼림의 짙은 풀 향기. 다리 어귀가 조금 맞지 않아 미세하게 삐걱대는 테이블의 흔들림.

    그리고 의자에 희미하게 배어 있는 서늘하고 싸한 체향의 흔적.

    “…….”

    유더는 다시 눈을 떴다. 느꼈다고 생각했던 미약한 흔적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뭘 하는 건지.’

    그 뒤에는 시력을 되찾은 뒤 처음으로 거울을 보았다. 얼룩이 다소 사라졌음에도 몸 곳곳에 남은 흔적들은 좋은 말로 해도 보기 좋지 않았다. 보이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이마와 눈의 흰자, 목이나 손등 이곳저곳이 얼룩덜룩하니 마치 역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 이보다 심한 꼴을 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아 준 동료들과 키시아르가 새삼 대단했다. 하물며 키시아르는 그가 충동적으로 입을 맞출 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본래 오른쪽 손등에 있던 옅은 자줏빛 반점은 검은 얼룩 사이에 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유더는 아무래도 그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일 듯하다고 짐작했다. 매개체를 사용했을 때 손등에서 흘러나왔던 붉은빛 때문이었다.

    ‘왜 알릭이 사용했을 때처럼 힘이 그냥 증폭되지 않고 붉은빛이 흘러나온 걸까.’

    다시 꺼내 본 매개체는 짙은 검붉은 색에 가까웠던 이전과 달리, 안쪽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하고 희미한 검은색으로 변한 상태였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힘을 불어넣어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유더는 매개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시 손을 들었다. 아주 작게 물의 힘을 써 보자 가느다란 물줄기가 손가락을 나선형으로 훑으며 올라가다가는 뚝 끊겨 떨어졌다.

    ‘회복이… 좀 된 것 같긴 하지만 이건 매개체를 쓰기 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여기까지 해 본 결과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전에 내 몸에서 나온 붉은 돌의 힘이 키시아르의 몸속에 있던 기운을 흡수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매개체 안에 든 붉은 돌의 힘을 끌어내어 이용한 게 아닐까.’

    매개체란 본디 마력이라는 연료를 넣어 주면 안에 새겨져 있는 지정된 마법을 자동으로 쓸 수 있게 해 주는 마도구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물건이었다.

    타이스는 마도구용 매개체에 마력을 넣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붉은 돌의 힘을 가두는 튼튼하고 새로운 매개체를 만들었다. 본래대로라면 출력될 마법이 없어 힘을 불어넣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매개체였다. 그러나 붉은 돌의 힘이 지닌 특수함 탓인지, 그것은 각성자가 힘을 불어넣으면 오히려 그 힘을 기이할 만큼 크게 증폭하여 내보내는 모습을 보였다.

    유더는 그 특성을 보고 제 몸이 어쩌면 살아 있는 붉은 돌의 힘 매개체가 된 것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그렇게 보자면 이번 일은 두 매개체가 동시에 힘을 발해 접촉한 셈이니, 다른 이들이 힘을 썼을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 것도 그 연장선일 수 있겠지…….’

    불어넣은 힘의 증폭이 아니라, 매개체 안에 든 순수한 힘을 제 손과 연결하여 뽑아낸 듯 느껴졌던 감각이 아직도 몸에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유더는 비어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역시 의식적으로 불러내려 할 때는 붉은 힘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힘은 유더가 다급하여 반쯤 제정신이 아닐 때에만 나타난다는 규칙이라도 지닌 듯했다.

    ‘아무튼 매개체가 투명해진 걸 보면 안에 담겨 있던 힘이 사라진 건 확실해 보이는군.’

    다행히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은 밤의 어둠이 내린 숲속에서 이루어졌다. 마법사들은 유더가 무엇을 했는지 보았더라도 정답을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매개체의 정체도, 붉은 돌의 힘도 아직까지는 모두 비밀로 두어야 할 사안이었다.

    ‘그보다, 마력의 샘 유적지 쪽은 어떻게 된 걸까.’

    유더는 제 손을 붙잡고 억지로 땅을 내리누르려 하지 말라고 속삭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의 말에 따라 땅의 움직임에 반발하지 않고 부드럽게 매만지며 달래듯 움직이자 지진은 곧 잦아들었다.

    키시아르는 그것이 오랫동안 고여 있던 마력이 사라진 탓이라고 말했다. 거대한 마법을 시전하느라 마력이 소진된 이후 유적 주변과 대삼림에서 일어날 변화에 대해 키시아르가 무언가 기대하는 듯 말했던 기억은 났지만, 설마 그게 지진이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마력의 샘에 고여 있는 마력이 소진된 게 지진의 원인이라면… 혹시 또 균형이 깨진 건 아닐까.’

    루산과 키시아르가 각각의 이유를 들어 추측했던 ‘균형’과 관련한 이야기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루산은 마력의 샘 유적지라는 거대한 힘의 균형이 흔들려 몬스터들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그리고 키시아르는 같은 이유로 균열을 비롯하여 대삼림의 비정상적인 생장의 원인이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또다시 균열이나 몬스터의 이상발생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몹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유더가 자리에서 일어날지 말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2층이라는 높이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평온한 안색의 키시아르가 문밖에서 장난스레 웃고 있는 중이었다.

    “들어가도 될까.”

    “…….”

    찾아올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게 창문은 아니었다. 유더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닫힌 문을 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왜 문으로 안 들어오시고…….”

    “두드렸을 때 열어주는 사람이 있는 기분이 궁금했거든.”

    능글대는 대답에 기가 막혔다. 유더는 창문을 닫고 주변을 둘러본 뒤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재미있으셨습니까?”

    돌아온 답은 강하게 끌어안는 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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