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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11화 (311/805)

311화

부러지고 꺾인 나뭇가지로 마력의 샘 주변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폭발적으로 마력을 뿜어내었던 바위 틈새도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키시아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병단원들을 보았다.

“칸나 완드, 가케인 볼룬발트. 유더 아일의 상태를 확인하도록.”

그의 명에 따라 두 사람이 유더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마법사들은 나머지 단원들에게 부축받으며 진 바깥으로 물러났다. 이제 진 안에 있는 사람은 오직 키시아르와 유더뿐이었다.

“유더. 괜찮아? 우리 말이 들려?”

“…….”

동료들의 부름에 유더가 미약하게 머리를 움직였다. 그는 사실 본격적으로 마법이 시전된 이후부터 몸을 감싼 거대한 힘에 휩쓸려 외부를 살필 정신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오로지 힘만을 느낀다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붉은 돌의 힘 때문에 생겼던 반점이 크게 번지던 순간처럼 전신이 불에 타는 듯 화끈거렸고,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부감이 머릿속에서 파도처럼 일어났다 겨우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끝까지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제 앞, 보이지 않는 장벽 너머 어딘가에 키시아르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몸 주변을 타고 도는 거대한 힘 속에 녹아들어 있던 낯익은 기운. 그건 분명 이전에 직접 보고 만져 보았던 키시아르의 힘이었다. 그 기운이 유더를 진정시키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받아들인다… 그래.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아.’

몸에 흡수된 페투아멧의 체액 속 독성을 계속해서 증폭시키던 마법진의 흔적을 해제하는 마법이라기에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유더의 몸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운을 받아들여 탐욕스럽게 내부를 채웠다.

유더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 보며 제 몸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몸 안쪽이 잔열이 남은 난로처럼 뜨거웠지만 이전처럼 손가락 하나 들지 못할 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칸나와 가케인이 동시에 안색을 환히 밝혔다.

“효과가 있었나 봐!”

“얼룩, 얼룩도 사라졌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유더의 깨끗해진 몸을 보며 누구라 할 것 없이 환희에 찼다. 마법을 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몸은 검은 멍처럼 번진 얼룩투성이였다. 아무리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가려도 다 감출 수 없었던 흉한 얼룩이 지금은 놀랄 만큼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환호하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양손을 올려 눈을 가린 붕대를 스스로 풀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풀어낸 끈이 목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감고 있던 눈에 힘을 주어 여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잠시 느껴졌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유더는 몇 번 반복하여 신중하게 눈을 깜박였다. 시야는 이전과 비슷하게 검은 얼룩으로 가득했다. 한쪽 눈은 여전히 빛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른 한 눈은 지금이 밤이라는 것과 주변에 있는 이들의 형태와 색을 구별할 정도는 되었으니 이전보다 훨씬 나았다.

“…….”

유더는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마법진 위에 우뚝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도 그가 누구인지 몰라볼 유더가 아니었다. 전신의 감각이 이토록 한 곳을 향해 쏠리는 이가 키시아르 라 오르 외에 또 있을 리 없었다.

흐릿하게 이지러져 겹친 시야 속에서 유더는 문득 그가 웃었다고 느꼈다.

심장이 크게 뜀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단장님!”

놀라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자마자 등 뒤에서 천둥과 같은 울림이 길게 땅과 공기를 울렸다.

“마, 마력의 샘 유적 쪽에서 뭔가가……!”

멀리 물러나 있던 마법사들이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유더의 등 뒤에 있던 바위 틈새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마구 떨렸다. 그대로 두면 폭발하거나 무너질 것 같았으므로 유더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힘을 발했다.

그러나 움직이려 했던 땅의 힘은 바위 근처만 한 번 들썩거리게 만들었을 뿐,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젠장. 아직 힘은 회복이 덜 되었나.’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하려던 순간 또다시 땅이 울리며 가케인이 불러낸 그림자 분신이 유더를 보호하듯 감쌌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안주머니에서 돌처럼 생긴 것이 굴러떨어졌다.

‘매개체!’

유더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것을 잡아채며 가케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케인. 내가 아니라 칸나와 단장님을 먼저 보호해. 물러나.”

“뭐? 무슨 소리야.”

“물러나!”

힘만 발휘할 수 있다면, 자연은 유더를 해칠 수 없었다. 유더는 그림자 분신을 뿌리치고 제 발로 섰다. 손에 쥔 매개체에 힘을 쥐어짜 불어넣는 순간, 매개체 안에서 붉은빛이 환하게 터져 나왔다.

타이스 율만의 제자 알릭 펠긴이 힘을 썼을 때와는 전혀 다른 광경에 놀라 멍해진 사이, 유더는 제 오른손에서도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같은 색을 띤 두 개의 빛이 연결되며 유더의 몸 안이 또다시 터질 듯 약동했다.

잠시 후 매개체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빛이 꺼졌으나 유더의 손은 그대로 붉게 빛났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각성자들이 지닌 가장 순수한 힘의 형태가 지금 유더 자신의 손 안에서 약동하는 중이었다.

그 힘을 쥐고 있는 한, 해내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듯했다.

유더는 폭발할 듯 움직이는 바위 틈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대로 힘을 사용하여 억지로 내리누르자 뒤흔들리던 바위가 조금 멈추었지만 손에서 통증이 일었다. 이를 악물며 한번 더 힘을 쓰려 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유더의 등 뒤에서 손목을 붙잡았다. 흠칫 몸을 굳히며 뒤를 보려 한 순간 단단한 가슴이 등에 부딪혔다.

“……억누르려 하지 마.”

키시아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웠다.

“오랫동안 뭉쳐 있던 마력이 일시에 소진되면서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갑자기 빠져나오고 있는 거야. 억누르면 오히려 더 해가 될 테니… 그래. 천천히 진정시킬 수 있겠나?”

“단장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나는 괜찮아.”

키시아르가 손을 놓아주었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간 붉은빛이 조금 더 강해졌지만 이제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등 뒤에 버티고 선 이의 무게를 느끼며 유더는 힘을 한결 부드럽게 다루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음울하게 울리던 땅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거칠었던 바람도 함께 잦아들어 갔다.

아주 느리게 사그라진 진동이 마침내 완전히 멈추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유더는 손 안에 스며들 듯 사라지는 붉은 빛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키시아르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더 아일.”

“네.”

“내가 보이나?”

붉은빛에 대해 물을 줄 알았는데, 그는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입니다.”

잘 보인다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겠지만 그래도 키시아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유더가 이전에 손끝으로 만져 보았을 때 머리로 그렸던 것과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듯 낯설었다.

유더는 밤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받아 빛나는 금빛 머리칼을, 조금 여위어 날카로워진 덕에 오히려 묘하게 관능적인 분위기를 머금게 된 뺨을, 지쳐 보이지만 깊은 감정으로 들끓고 있는 붉은 눈동자와 그것을 감싸 그림자를 드리운 긴 속눈썹 등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분명 오늘 새벽까지도 함께 있었던 그 사내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제가 만지고 끌어안았던,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던 존재임에도 너무나 오랜만에 다시 만난 사람처럼 느껴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안쪽에서 울렁이며 치미는 감각을 내리누르며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 동안 키시아르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유더를 보고 있었다.

“……저기. 이제, 그. 폭발은 다 끝난 겁니까?”

잔뜩 지친 목소리로 누군가 멀리서 소리치고 나서야 유더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까 그 붉은빛은 대체…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력의 샘 유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희가 그쪽으로 가서 살펴도 될까요.”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잊고 키시아르를 쳐다보았다는 사실에 당혹하는 사이, 미칼린이 빠져나와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제야 유더에게서 시선을 돌린 키시아르가 침착한 목소리로 아무 일도 없던 듯 입을 열었다.

“아직 위험할 것 같으니 당장은 말고, 내일 하도록 하지. 그때까지는 마병단이 교대로 이곳을 지키도록. 물론 일단 거점에서 재정비를 마친 후에.”

“알겠습니다.”

키시아르는 모든 이들에게 수고했다는 치하를 간략히 전했다. 마법사들은 제 발로 일어나 선 유더를 보고 무언가 감동에 찬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그들은 키시아르의 명에 따라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마병단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갔다.

유더도 드디어 제 발로 거점에 다시 돌아가 안에서 내내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루산을 마주했다.

“세상에, 유더 님! 드디어 나으셨군요!”

달려 나온 젊은 사제는 유더를 위아래로 훑은 뒤 감사의 기도를 하기 위해 손을 맞잡았다. 유더는 마법사들의 앞에서는 애써 평정을 지키려 노력했던 동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힘 조절도 하지 않고 끌어안는 통에 몇 번이나 토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힌, 핀. 그만해. 유더가 터지겠어!”

유더는 동료들의 손 안에서 흔들리며 고개를 돌렸다. 몇 발짝 뒤에서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려 웃고 있었다. 평소의 무기처럼 두른 여유로운 미소와 다른 그 작고도 보잘것없는 웃음이 유더의 머릿속에는 오히려 깊이 남았다.

그는 유더의 몸이 낫도록 만들겠다는 말을 끝내 지켰다.

그 말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차마 어느 정도인지 잴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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