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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10화 (310/805)

310화

키시아르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더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칸나와 다른 이들도 함께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잠시 살필 것이 있어서 마법사들 쪽으로 보내두었네. 도착하면 내려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언제나 느끼는 점이었으나 상대는 눈치가 지나치게 빨랐다.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더 할 말이 없었기에 유더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가까워졌고, 키시아르는 그제야 유더를 내려놓고 가볍게 어깨를 잡아 기댈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유더! 왔구나!”

가장 먼저 달려온 칸나가 스스럼없이 유더의 반대쪽 팔을 붙잡았다.

“다, 단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저희가 부축할 테니 놓아 주셔도…….”

뒤이어 다가온 에문이 조금 겁을 집어먹은 기색으로 우물거리자 잠시 답이 없던 키시아르가 느릿하게 어깨를 잡은 손을 풀었다. 다른 이들은 그 움직임에서 딱히 이상한 기색을 느끼지 못한 듯했으나, 유더는 아주 미약하게 드러낸 아쉬움을 읽었다.

“그래. 가지.”

마력의 샘 주변은 이전과 비슷한 듯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주변을 가득 두르고 있던 경계용 마법과 증폭진은 대부분 가동을 멈추었고, 그 사이사이에 새로운 마법진이 들어찼다. 총 14개의 진 중 12개의 제어를 맡은 마법사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으므로 유더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이런. 오셨군요.”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서부 마법사 연합 수장 미칼린 펀트가 더러워진 손을 문질러 닦으며 다가왔다. 노마법사는 동료들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유더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그것을 조용히 갈무리해 숨겼다.

“저희 측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시작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언제든 진을 가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주변을 느리게 훑은 키시아르의 시선이 아직까지 잠잠한 마력의 샘 쪽으로 향했다. 벽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마법진들이 사라진 바위 틈새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마력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랫동안 증폭되어 더욱 짙어진 순수한 마력 덕분에 이 일대는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한 힘으로 약동하는 상태였다.

언제 내려올지 모를 명을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을 지나쳐 나아가던 붉은 눈동자는 두 명의 동료에게 부축당한 상태로 고요하게 서 있는 유더의 얼굴 위에서 마지막으로 멈추었다. 그의 열이 크게 오르지도, 그렇다고 차가워지지도 않는 얼마 안 되는 시기를 기다려 데려왔음에도 이마와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이 벌써 송글송글했다. 그런데도 힘들다는 표현 한 번 없이 침착하게 버티는 건 수치심에서 비롯된 오기와 같은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런 상태에 지나치게 익숙해 보였다. 붕대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얼굴은 이 상황이 힘들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은 듯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부상을 당하고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 줄곧 그랬다.

붉은 눈이 미세하게 어두워진 순간, 기다리던 마지막 마병단원들이 드디어 도착했다.

“단장님. 저희 모두 도착했습니다!”

“전원 위치로.”

키시아르는 몸을 돌리며 모든 이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제 오랫동안 구해 온 답의 결과를 실제로 볼 시간이었다.

유더를 부축한 이들이 그를 마력의 샘에 가까운 진 위에 앉혔다. 미칼린을 포함한 12명의 마법사들이 각자의 진을 찾아갔고, 마병단원들은 그 주변을 보호하듯 넓게 둘러섰다. 그리고 키시아르는 유더를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에 그려진 가장 거대한 진 위에 섰다.

키시아르가 제 위치에 선 것만으로도 모든 이들은 지휘관이 제자리를 찾아 맨 앞에 선 듯한 압도적인 기분을 느꼈다. 그가 서 있는 진을 중심으로 12개의 진이 거미 다리처럼 연결되어 있었기에 유더가 앉은 진은 마치 그 다리들에 감싸인 먹이처럼 보였다.

“첫 번째 진을 가동하겠습니다.”

첫 번째 마법사가 긴장한 목소리로 선언한 뒤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발밑의 진이 빛을 내면서, 마력의 샘 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지랑이 같은 마력이 일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진이 주변의 마력을 정상적으로 빨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마법사들도 같은 선언을 하고 진을 가동시켰다. 마정석을 양손에 쥔 그들이 힘겹게 팔을 휘젓고 주문을 외칠 때마다 발밑에 그려진 진이 점점 하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열한 번째 진을 가동하겠습니다.”

“열두 번째 진을 가동하겠습니다.”

거대한 힘의 회오리 속에서 마침내 미칼린이 열두 번째 진을 가동시켰다. 주변의 나무와 숲이 일제히 파르르 흔들리며 거센 바람이 일었다. 마병단원들은 혹여나 그 힘에 휩쓸려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발에 힘을 주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런 광경을 볼 것이라는 설명을 간략히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보면서 느끼는 감각은 차원이 달랐다.

하나의 진이 가동될 때마다 더욱 짙어진 흰 빛은 다리처럼 연결된 선을 따라 중앙의 키시아르가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마지막 열두 번째 진까지 모두 가동되고 나자 모여든 빛이 너무 강해 키시아르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의 단장이 마법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이번에야 처음으로 알게 된 마병단원들은 키시아르가 괜찮을지 걱정하며 몹시 긴장했으나, 12명의 마법사들은 그들과 다소 다른 이유로 긴장했다.

오늘 시전할 마법은 펠레타 공작이 이 거대한 마력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각각의 진을 조정할 수 있는지에 모든 승패가 달려 있었다. 보통 그런 중요한 작업은 가장 능숙하고 경험이 많은 이가 맡게 마련이었으므로 당연히 수장 미칼린이 할 예정이었지만, 펠레타 공작은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모든 진을 제어하는 중이었다.

키시아르는 양손에 금빛 마력을 휘감은 채 진에 모여든 빛을 제어했다. 중앙에 모여든 흰 빛이 색을 바꾸어 푸른색으로,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다시 달아오르는 동안 마력의 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더욱 많아지면서 주변을 휩쓰는 파동도 점점 더 강해졌다.

시간이 지나 마법사들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진 전체를 제어하는 키시아르의 숨도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을 때쯤, 드디어 중앙에 모인 빛이 검게 물들며 거셌던 바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것은 그들이 진을 통해 완성시키려 한 힘이 드디어 형태를 갖춘 순간이었으며 비로소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법사들은 키시아르의 제어를 통해 중앙 진에 모인 검은 빛을 향해 일제히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그 빛을 유더의 진에 덮어씌웠다. 검게 물든 진이 허공에 떠올라 휘몰아치자 그 안에 가린 유더의 모습도 잠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저거… 잘 되어가고 있는 것 맞겠지?”

칸나는 바로 옆에 서 있던 에문의 헐떡이는 중얼거림을 들으며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유더가 있는 곳의 진은 마치 살아 있는 듯 회전하며 쏟아져 들어오는 모든 빛을 탐욕스럽게 삼키는 듯 보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빛을 모았다 쏟아부었음에도 사라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순식간에 유더의 모습이 다시 모든 이의 눈앞에 드러났다.

마법사들이 더욱 강하게 주문을 외치면서 마력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아지랑이도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유더의 진은 끊임없이 빛을 삼키고 또 삼켰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나자 마침내 한 명의 마법사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소…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그가 지나친 소모를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자, 중앙 진으로 향하던 마력의 흐름이 일순 휘청였다. 양손에 금빛을 휘감고 있던 키시아르의 한쪽 팔도 동시에 움찔 굳었다.

“단장님!”

누군가 소리를 쳤으나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키시아르는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한 손을 작게 휘둘렀을 뿐이었다. 마력의 샘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순간 폭발하듯 늘어나면서 그의 손을 감싼 금빛도 껑충 커졌다. 그 빛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출렁이던 힘은 금세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로도 몇 명의 마법사가 더 무릎을 꿇었으나 키시아르는 그때마다 같은 방법으로 빛을 더욱 강화하여 불안정해진 진의 힘을 보충하고 제어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눈앞에 있는 유더 아일에게만 향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마법은 완성되었지만, 대상이 요구하는 마력이 그보다 너무 많아요. 이대로라면 마력이 부족해서 깨져버릴지도 모릅니다.”

에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중얼거리자 그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7번째 진의 마법사가 헐떡거리며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칼린 이외의 모든 마법사들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쯤, 유더를 감싼 진이 흡수하는 빛은 거의 금빛 기운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대체 언제까지…….”

누군가 지쳐 중얼거렸을 때, 마침내 미칼린 펀트마저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노마법사는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주문을 멈추지 않았으나 중앙 진을 향해 흘러들어가던 힘에는 일순 빈틈이 생겼다.

흘러들어가는 빛이 마력의 샘을 통해 이끌어 온 키시아르의 금빛밖에 남지 않게 된 그때, 모든 이들은 곧 일어날 실패를 예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키시아르의 선택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효용을 잃은 12개의 진 대신 마력의 샘을 향해 직접 손을 뻗었다. 금빛 마력이 폭발적으로 넘실거리며 복잡한 빛의 궤적을 그렸다. 그 위로 겹쳐진 서로 색이 다른 기운이 마력을 보호하듯 휘감자 마법사들이 포기했던 진 위로 갑자기 새로운 빛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을 띤 마법이 빠르게 짜여가고 있었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얼 나간 숨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새로이 완성된 마법이 다시 유더의 진 위로 덮어씌워졌다. 거대한 빛이 터져 나오며 모든 이들이 눈을 감았다. 거센 바람이 몸을 훑으며 지나가는 감각이 선득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사람들은 모든 빛이 사그라지며 바람이 가라앉는 광경을 보았다. 진은 아직 깨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실패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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