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밤은 유난히도 빠르게 찾아왔다. 유더는 마지막으로 그를 돌보아 준 가케인이 잘 자라는 인사를 한 뒤 빠져나감과 동시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다른 이들에게 물어본 결과 키시아르가 한 말이 놀랍게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유더가 페투아멧을 죽인 사건과 관련한 소문이 그토록 빨리 퍼진 건 다른 단원들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듯했다.
‘우리도 정보만 들었을 뿐이라 실제로 어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몰라. 하지만… 마법사들의 분위기도 전과 좀 달라지기는 했어.’
아마 부상이 전부 낫고 나면 좀 놀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던 가케인의 말뜻을 알기 위해서라도 내일 있을 증폭진 흔적 해제 마법이 성공하기를 바라야 할 듯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침대 신세를 졌으니…… 조금이라도 나아서 돌아다닐 정도만 되면 좋겠는데.’
처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정말 불편했었는데, 심심할 틈 없이 교대로 자리를 지켜 주는 동료들 덕분인지 지금은 밥을 먹고 잠만 자며 하루를 보내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바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거의 모르는데도 이토록 안정적인 기분이 들 수 있었던 건 분명 그들과 키시아르가 그만큼 유더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리라.
키시아르를 떠올리자 생각의 흐름이 자연히 오늘 있었던 대화로 흘러갔다. 사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중에도 키시아르가 했던 말들은 줄곧 유더의 머릿속을 맴도는 중이었다. 워낙 충격적인 대화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키시아르는 유더와 함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추문이라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단호했던 한마디를 다시 곱씹어 보는 순간 또다시 가슴 안쪽이 저릿하게 울렸다.
그 기분을 대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충격? 아니면 고통?
설마 다른 이도 아니고 이전 생에서 추문으로 엮인 당사자였던 키시아르 본인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그 추문과 관련해 시비가 걸려 내가 싸우고 올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언급한 적은 없었지.’
유더도 키시아르가 무어라 말해 주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 또한 당연히 불쾌하게 여기리라 생각했고, 그 불쾌한 소문에 대해 실수로라도 제 입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을까.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그 소문을, 그리고 소문의 진상을 모두 불쾌한 추문이라 생각했을까?
‘……알 수 없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이전이었다면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어딘가에 뚫린 구멍들이 검은 입을 벌리고 뻐끔거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지금은 거기서 끝낼 수가 없었다. 유더는 지금껏 알면서도 알지 못했던 꿈과 기억들을 통해 보았던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떠올렸다.
죽는 날까지 차갑고 두꺼운 벽으로 스스로를 감추고 있었던 남자. 그로 인해 유더가 느끼는 감정들을 알았을 텐데도 제대로 된 한마디 설명조차 해주지 않은 채 사라진 멀고 먼 과거의 인연.
하지만 결국 그가 강제로 가르친 것들이 유더 아일을 여기까지 버티어 살도록 만들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아무 의미 없는 상대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상대는 어땠던 거지.’
과거의 키시아르는 과연 유더 아일을 어떻게 생각했던 걸까.
뒤를 이을 차기 단장, 혹은 손쉽게 몸을 섞는 상대. 혹시 그 외의 뭔가가 더 있었을까?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이번 생은 물론이고, 저번 생에도 그는 키시아르가 저를 어떻게 여기고 생각하는지 굳이 궁금해했던 적이 없었다.
‘이전 생과 이번 생에 나를 다르게 대하는 사람들은 키시아르 이외에도 많았는데… 왜 그만이 이렇게 묘하게 느껴지는 걸까.’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관계를 쌓았는지, 어떤 일들을 함께했는지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가케인이, 엘더 남매가, 이논이, 그리고 마병단의 다른 동료들이 그걸 증명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키시아르가 지금의 유더에게 내보이는 투명하고 솔직한 감정 또한 그런 변화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설마 벌써 자고 있나?”
그때, 창문 쪽이 덜걱거리더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익숙한 기척이 넘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순 당혹감이 샘솟았다.
“왜 문이 아니라 그곳으로 들어오시는 겁니까……?”
“아무도 모르게 다녀와야 하니까 창문을 넘어왔지.”
유더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여긴… 2층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걱정 말게. 황궁에 있었을 때는 5층도 잘만 넘어 다녔거든. 아무도 내가 나갔다 들어오는 줄 몰랐어. 물론 오늘도 그렇겠지.”
유더는 순간적으로 이전 생의 그가 은퇴하고 나서도 종종 단장실 창문을 넘어 들어오곤 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온갖 감시를 뚫고 잘도 빠져나와 침입한다 싶더니, 원래부터 그런 일을 자주 해 보았던 모양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보다도 황족다운 우아함을 갖출 수 있는 남자가 체통도 없이 창문을 넘어 다니는 모습을 떠올리자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위험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은 스스로를 향해서 좀 더 들려주었으면 좋겠군. 자, 나갈 준비는 되었나?”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기척이 가까워졌다. 거의 다 내린 열을 재고 입고 있는 옷을 확인한 사내가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깨 위에 얇고 긴 담요를 둘러주었다.
“좋아. 담요를 가져오길 잘 했군. 오늘 밤은 쌀쌀하니 이게 도움이 될 거라네. 그러면…….”
다리와 등을 받친 손이 아주 가볍게 몸을 들어 품에 안았다. 유더는 순식간에 키시아르의 체향 속에 파묻히는 기분을 느끼며 몸을 굳혔다.
“긴장할 필요 없어. 나갈 때는 잠깐 능력을 쓸 테니, 놀라지 말게.”
성큼성큼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 키시아르가 잠시 후 망설임 없이 몸을 내뻗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유더는 미약한 기운이 몸을 가볍게 휘감는 감각을 느꼈다.
‘이건… 각성자의 힘인가?’
그가 여태까지 안다고 여겼던 키시아르의 힘은 육체를 강화하여 사용하는 신과의 전형적인 특성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직접 체험해 본 그 힘은, 이상하게도 이전에 파악했던 것과 어쩐지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강화 계열은 몸에만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기운은 몸만이 아닌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움직이는 중이었다.
‘땅 쪽으로 힘을 움직여 마치… 밀어내듯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느리게 추락하던 몸이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최대한 느리게 내려왔는데, 떨어지는 게 무섭지는 않았지?”
“…방금, 뭘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음?”
“단장님이 지니신 각성자의 힘으로 하신 게 아닙니까?”
“맞아.”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던 순간, 쉿 하는 소리를 낸 키시아르가 걸음을 옮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어쨌든 둘만의 산책 아닌가.”
눈이 보이지 않아 어디를 걷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키시아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해서 이동했다. 대삼림의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는 걸 보아서는 숲 안쪽까지 들어선 모양이었다.
“마력의 샘 쪽으로 가는 길이야. 이제 곧 나무 위로 올라설 예정이지.”
궁금해하지 않도록 가는 방향을 알려 준 사내가 잠시 후 예고한 대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번에도 침실에서 떨어질 때와 비슷하게 각성자의 기운이 몸을 감싸더니, 위쪽에서 뭔가에 휙 이끌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자. 다 왔다.”
“……나무 위가 목적지셨습니까?”
“아까 올라와 봤는데 여기가 가장 달이 잘 보이더군. 느껴지나?”
유더는 고개를 저었다. 붕대로 막아 둔 눈으로는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햇빛과는 달리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니 그저 그런가 보다 싶을 뿐이었다.
키시아르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 유더를 한 번 고쳐 안았다. 그가 얼마나 조심스레 어깨를 감싸주는지, 몸이 다 절로 근질거릴 정도였다.
“아쉽군. 오늘은 초승달이 떴지만 구름 하나 없이 아주 밝거든. 마치 햇빛 아래에서처럼 선명하게 얼굴을 볼 수 있지.”
얼굴도, 머리칼도. 하고 느리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유더는 귀 안쪽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감각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래봐야 결국 키시아르의 품 안쪽이었기에 도망칠 곳은 없었다.
“춥지는 않나?”
“…네.”
“지금 우린 발 아래로 바다처럼 움직이는 나무의 숲을 두고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숲이 일제히 한쪽으로 휩쓸렸다가는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마치 파도 같군. 혹시 바다를 본 적이 있나?”
유더는 잠시 침묵했다. 이전 생에서는 본 적이 있지만, 이번 생에는 아직 보지 못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자 다행히 답을 재촉하지 않고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낮의 바다도 아름답지만, 밤의 바다는 더욱 아름다워. 해질녘이 되면 낮 내내 고기를 잡아들인 배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배들 위로 새들이 수도 없이 달라붙어 춤을 추며 따라다니지.”
유더의 기억에 남은 바다는 그저 물결치는 바다 그 자체였을 뿐, 거기에서 사는 다른 사람들이나 배의 모습은 조금도 인상 깊게 남지 않았다. 하지만 키시아르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검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그가 묘사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바다를… 자주 보셨나 보군요.”
“펠레타는 바닷가에 위치한 곳이지 않나.”
부드러운 웃음이 귓가를 스쳤다.
“성 꼭대기에서 매일 검은 바위절벽과 그 아래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