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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305화 (305/805)

305화

“도련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나한은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걱정 어린 목소리에 말고삐를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가일과 두일이 다음에도 여기에 남겠다고 하면 정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실 생각이신가요?”

“약속했으니 그렇게 해야겠지.”

“하지만…….”

무어라 말할 듯했던 호산라의 말은 한참 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나한은 코끝으로 작게 숨을 내쉬고는 고삐를 조금 더 강하게 잡아당기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해, 호산라. 내가 그들을 다른 이유로 두고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생각은…….”

“사실 네 생각이 맞다. 나는 가일과 두일이 마병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내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순간 호산라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설마 마병단과… 적대하실 생각이신 건가요?”

“아니. 몸을 둔 곳이 다르다 해도 마병단원들 또한 결국은 우리의 형제자매다. 적대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그게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는 뜻 또한 아니다.”

나한의 하얗게 죽어버린 눈동자가 먼 곳을 지나는 황궁기사단원들의 모습을 훑었다. 누구도 이 평범한 짐마차를 이상히 여기지 않았으나, 그들을 보는 나한의 눈에는 한없이 차가운 감정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추적하고 있으니, 우리 또한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해.”

“하지만 현자께서는…….”

“내부의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때로 내 손발조차 속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감정 없는 목소리가 너무나 차가워서, 호산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저는 그저, 도련님께서 요즘 현자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고 다들 말이 많았는데… 거기에 이번 건까지 합쳐지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어서…….”

“호산라.”

낮은 부름에 호산라의 몸이 흠칫 뛰었다.

“나의 신념은 나그란의 별이 만들어지던 그날부터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건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지, 나를 위한 일이 아니야. 그러니 우리 중 누군가 먼저 손을 놓은 듯 보인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현자 쪽일 거다.”

달리는 마차는 이후 오랫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면… 도련님께서는 서부에 다녀오신 이후에 다시 가일과 두일을 찾아가실 생각이신가요?”

“그래.”

나한은 기사단에서 일하는 이들이 출입하는 샛길로 빠져나가며 짧게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 거점을 옮기는 일을 두고 이렇게 의견이 둘로 갈릴 필요도 없다 생각하지만, 이번에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형제자매들이 계속 혼란스러워할 테니까.”

“마병단이 거기에 있다면 전에 만났던 그 마병단원도 거기 있을지 모르는데… 부디 조심하세요.”

호산라가 말하는 그 마병단원이 누구인지 나한은 바로 알아차렸다. 드문 우연으로 여러 번 마주쳤던 검은 머리칼의 마병단원을 떠올리자 문득 흥미로운 감정이 조금 샘솟았다.

“……그래.”

***

“유더. 들었어? 드디어 마법사들이 널 낫게 할 만한 뭔가를 발견했나 봐.”

유더는 침대에 기댄 채 아침을 먹던 도중 문을 열고 들어온 칸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발견했다고?”

“단장님께서 가케인과 힌, 핀을 시켜서 마력의 샘 유적 쪽을 살피라고 하셨어. 주변을 확인하는 일만 끝내면 바로 마법 준비에 들어갈 거래.”

유더는 곧바로 수저를 놓았다. 곁에서 그의 식사를 돕던 루산 사제가 흥분된 목소리로 “잘 됐네요!” 하고 말을 보탰다.

“그 커다란 몬스터 시체까지 전부 해체해다 여기로 끌고 오고, 온갖 짓을 다 하더니 결국 해내긴 했군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저도 놀라워요. 이번엔 정말로 제대로 된 답을 찾은 거겠죠?”

한참을 기분 좋게 무어라 떠드는 칸나와 루산의 대화가 들려왔으나 유더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은 거의 없었다.

‘정말로… 증폭진의 흔적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낸 건가.’

키시아르가 바라던 대로, 결국 두 번째 파견대가 오기 전에 기어이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 집념이 새삼 대단하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형체 없이 뒤엉킨 채 흐늘거리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는 어느새 두 사람이 나가고 다른 이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평소보다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지?”

“…….”

서늘한 체향과 함께 옆자리에 앉은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습관처럼 유더의 이마와 뺨을 가볍게 매만져 열을 쟀다.

“뜨겁군. 물수건을 올려야겠어.”

“단장님. 증폭진의 흔적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내셨다는 게 정말입니까?”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자 곁에서 느껴지던 움직임이 잠시 끊겼다.

“칸나에게 들었나? 그래. 맞아.”

유더의 이마 위로 차갑게 식힌 물수건이 올라왔다.

“빠르면 내일 저녁쯤 해제 마법을 시행하게 될 예정이지.”

“그러면 저는 뭘 해야 할까요.”

“뭘 해야 하냐고?”

물수건을 짚은 키시아르가 참으로 귀여운 말을 한다는 듯 짧게 웃는 소리가 났다.

“당연히 당사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네. 준비는 나와 마법사들이 할 테니까.”

“…마력의 샘 유적지를 살피라 명하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그간 그 샘을 살핀 결과, 마력을 뽑아 쓰는 정도로는 큰 위험 소지가 없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말이야. 내 마력을 직접 쓰지 않고 그곳에서 빌려 올 생각이라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좋아하지 않으면 어쩔 텐가. 날 좋아해 주는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뿐이면 충분해.”

나머지는 여분에 가깝지. 중얼거리며 유더의 손을 쥔 사내에게서 평소보다 훨씬 따뜻하고 밝은 감정이 느껴졌다. 아닌 것 같아도 드디어 해답을 발견하여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안 자체는 애초에 서부 연합 쪽 수장이 내었던 생각이야. 시전자가 그에서 나로 바뀐 것뿐이니 할 말이 있을 리 없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키시아르의 마력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그의 몸에 그리 큰 부담이 가지는 않으리라. 마력의 샘을 건드리는 게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그 부분이야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알아서 고려했을 테니 크게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유더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처럼 키시아르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번 일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쩌면 이 마법의 시전이, 오랫동안 비밀로 남아 있던 대삼림의 생장력을 조금이나마 자세히 파악할 만한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네.”

해제 마법과 대삼림의 생장력이 무슨 상관인가.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이어나가던 유더의 머리에 잠시 후 어떤 답이 떠올랐다.

“대삼림의 생장력과 마력의 샘 사이에… 혹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직까지는 가설이지만, 그래.”

우아한 목소리가 그간 마력의 샘을 돌아보며 파악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설명해 주는 동안, 유더는 순간적으로 잠시 넋을 잃었다. 넋을 잃는 건 직접 눈으로 키시아르의 얼굴을 볼 때에나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은 목소리만 듣고 있을 때에도 종종 멍해질 때가 있었다.

귀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와 피부로 닿는 촉감만으로도 전신의 감각이 순식간에 키시아르를 향해서만 쏠렸다. 그 편향이 지나쳐 다른 것까지 파악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이상한 균열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 것도 그렇고, 아마도 나는 그 샘 내부에 고인 마력이 일정한 균형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네.”

열과 기분 좋은 목소리에 취해 멍하니 부유하던 의식이 균열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균열… 말입니까?”

“그래. 그 균열은 몬스터가 발생할 때에 나타나는 균열과 형태가 거의 비슷하지 않던가? 물론 조금 더 크고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예.”

“태양신 경전을 비롯하여 오래된 역사서와 고문서들은 몬스터가 나타날 때 발생하는 그 균열이 세상의 균형이 이지러지는 불길한 현상이라 일컫고 있지. 마력 또한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힘 중 하나일 테니, 그것이 흐트러진다면 충분히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나.”

세상의 균형이라. 유더는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이전 생에 재앙의 해결 방법을 찾으러 돌아다닐 때에 몇몇 이들에게서 그 비슷한 말을 들어본 듯도 했다.

‘거대한 재해와 몬스터들이 자꾸만 나타나는 이유는 세상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며, 결국 모두 다 멸망하게 될 거라 말하던 멸망론자들이 주로 그런 말을 했지.’

“내일 시전할 마법에는 엄청난 마력이 필요해. 오랫동안 고이고 증폭되기만 한 마력을 대단위로 소진한 후, 샘과 대삼림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본다면 그 상관관계를 좀 더 잘 알 수 있을 거야. 마력의 흐름과 변화를 제대로 살피기 좋은 기회지.”

“그렇군요.”

“이제는 거의 관측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옛 마법사들의 일지를 보면 엄청난 규모의 마법이 일어난 장소에서는 때로 주변 자연환경에 며칠, 혹은 몇 년에 걸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네. 꽃이나 풀이 전부 말라 죽어 자라지 않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거나, 계절이 바뀌거나 하는 식이었다고 하지.”

그러니까, 키시아르는 그 비슷한 현상이 마력의 샘과 대삼림 사이에서도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했다. 유더는 몹시 흥미로운 듯 이야기하는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듣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음? 그렇게 티가 났나?”

유더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참. 눈이 안 보여도 내 보좌를 속일 수는 없군. 상으로… 그래. 산책이라도 나가 보겠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더는 잠시 멈칫했다. 그동안 방 안에만 있었던 게 답답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열이 오르고 있는 데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데 나가도 괜찮을지 자신이 없었다.

“몸이 이런데…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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