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04화 (304/805)
  • 304화

    제국 전체의 이목이 마병단에 쏠려 있는 상황이었으나 정작 황궁기사단 부지 내의 마병단 건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산했다. 두 번째 파견대가 서부를 향해 떠난 뒤 남은 이들이 거의 없었던 탓이었다.

    덕분에 그곳에서 일을 하던 단원 외의 사람들도 모처럼 일손을 놓고 쉴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그중에는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던 두 각성자, 가일과 두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은 청소도, 설거지도 할 게 없네. 정말 이러구 놀아도 되는겨?”

    “그렇다잖어. 인상 푸근한 아저씨가 밥 먹고 싶으면 먹구, 운동하고 싶으면 뒤쪽에 가서 하랬어.”

    세 명의 부단장 중 마병단을 지키기 위해 남은 유일한 사람인 스티버를 형제는 그저 맘씨가 좋은 아저씨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스티버 외에도 그들이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그들에게는 대부분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귀족 집에 나한을 도우러 갈 때만 해도 잡히면 그냥 죽을 줄 알았는디… 요즘은 그냥 이렇게 평생 살아두 될 것 같어.”

    “사실 나도.”

    마병단원들은 정말 이상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가일과 두일을 고문하지도, 괴롭게 만들지도, 강제로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가끔 뭔가를 물어보기는 했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해서 답을 강요하는 일도 없었다. 방에만 있는 게 답답하다고 했더니 부지 내에서만은 돌아다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고, 좀이 쑤셔 잡일을 돕고 싶다고 하자 오히려 난감해했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들을 아직 여기에 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음 잡혀 왔을 때 가졌던 두려움과 거부감은 이미 마음속에서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형제는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여유롭게 텅 빈 정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깥세상은 어떤지 몰라도 형제의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웠다.

    “두일. 이번에 그짝들이 돌아오면 우리 정말루 여기서 잡일 하면서 지내도 되냐고 한번 물어볼까?”

    “된다구 하겠어? 우리 출신이 있는디……. 그리구 현자님께서 혹시 우릴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두 여기 있을 거여?”

    현자라는 말에 가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웅얼거리며 ‘어차피 모두 우릴 죽었다 생각하고 잊었을 것이다. 그러면 배신한 것도 아닌데 여기서 좀 지낸들 무슨 상관이냐.’ 하는 주장을 더듬더듬 입에 담았다.

    “말이야 나와서 말인데, 나는 거기서 자꾸 검 들구 훈련하라구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 너두 피 보는 거 싫다구 그랬잖아.”

    “…….”

    “눈 딱 감고 다신 현자님네 안 만난다고 하구, 여기서 일하면서 돈을 받자. 너두 봤지? 그때 귀족 집에서 구출되어서 우리랑 같이 여기로 온 각성자들도 여기서 일하면서 돈 받는 거. 얼마 받는지 저번에 슬쩍 물어봤는디, 그거 몇 년만 모으면 아예 목장을 사겠더라.”

    “진짜?!”

    “우리가 현자님이나 나한에 대해 별루 아는 게 없다는 건 그짝들도 이미 다 알잖어.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몰라.”

    일생을 남에게 고용된 목동으로 살아 왔던 형제의 평생 소망은 자신들만의 양과 집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혹하여 흔들리기 시작한 형제의 뒤쪽에서 어느 마병단원이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거기! 잠깐 여기로 와서 일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본래 형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는 세 명의 부단장과 단장보좌를 비롯한 한정된 인원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인원이 자리를 비웠고, 혼자 남은 부단장 스티버는 이곳에 없었다. 그들을 부른 일반 단원은 형제가 그저 단 내에서 잡일을 돕는 평범한 사람이라고만 여긴 모양이었다.

    “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도와 달래잖어. 얌전히 잘 도우면 나중에 그짝들이 왔을 때 점수 좀 따지 않겠어?”

    형제는 쭈뼛거리며 단원에게로 향했다. 검은 제복을 걸친 마병단원은 품속에서 편지를 몇 개 꺼내 황급히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이것 좀 대신 부쳐주세요. 심부름 값은 드릴 테니까요. 제가 지금 일이 있어서 직접 나갈 수가 없거든요.”

    “어… 어어…….”

    “조금 있으면 매일 황궁기사단 부지를 도는 짐마차가 정문 앞까지 올 테니까, 그때 마부한테 건네주면 돼요. 그럼 부탁해요!”

    형제의 손에는 순식간에 편지 몇 개와 동전 몇 개만이 남겨졌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마병단 정문까지만 가는 거라면 부지 내를 벗어나는 일도 아니니 괜찮을 듯했다. 형제는 얼떨떨한 얼굴로 정문으로 향했다. 단원의 말대로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달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여, 여기! 멈춰요!”

    가일이 손을 흔들며 소리를 치자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어 그들의 앞에 멈추어 섰다. 형제는 마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마부를 향해 어색한 몸짓으로 편지를 건네려 했으나, 잠시 후 얼어붙은 얼굴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자를 벗은 마부의 얼굴이 여기서 보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자였던 탓이었다.

    “나, 나, 나한?!”

    “조용히 해.”

    마부 복장을 한 나한이 혀를 차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형제는 기겁하여 입을 다물었다.

    “나한. 네가 여기 대체 어떻게…… 우릴 버린 것 아녔어?”

    “이곳까지 구하러 온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쇠처럼 차가워 보이는 회색 눈동자가 형제의 얼굴을 훑었다.

    “얼굴들이 좋아 보이는군. 여기서 아주 잘 지낸 모양이야.”

    형제의 얼굴이 일시에 붉어졌다. 그들은 나한이 아무런 고문도 당하지 않고 편히 지내다 막 배신을 꿈꾸었던 자신들을 비웃는다고 생각했다.

    “다 너 때문이잖어! 네가 우릴 버리고 가는 바람에 우린 여기서……!”

    “아, 아니야. 그건 다 나 때문이야.”

    그때 마차 안에서 얼굴을 내민 또 다른 남국인 청년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나한은 싫어해도 그 청년을 향한 호감은 아직 남아 있던 형제가 동시에 움찔 놀라 어쩔 줄 몰랐다.

    “호산라! 너까지 여기에 왔단 말여? 대체 어쩌려구……!”

    “정말 미안해. 내가 너희에게 괜한 부탁을 한 탓에 이런 일을 겪게 하고… 그래도 이젠 괜찮을 테니까…….”

    “한가로운 대화는 나가서들 하지.”

    나한이 짤막하게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심을 사지 않을 방법으로 잠입하고 너희를 불러내느라 며칠이 걸렸어. 어서 나와. 돌아가야 하니까.”

    “우, 우릴 불러? 네가 언제? 우린 편지를 부쳐 달라고 부탁받은 건데……?”

    나한이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이 시간에 너희들에게 편지를 부쳐 달라고 부탁하는 이가 운 좋게 나타난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어?”

    형제는 입을 떡 벌렸다. 나한이 그들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빨리 마차에나 타. 이 주변은 전부 고대 마법으로 보호 중이라 호산라의 이동 능력도 사용할 수 없고, 나도 환상 능력을 사용하기가 어려워.”

    “하지만…….”

    형제는 떨리는 눈동자로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꿈만 꾸던 구출의 기회가 드디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그들은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찰나의 망설임을 읽어낸 듯 나한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혹시, 나가고 싶지 않은 건가?”

    “아. 아니야.”

    두일은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가일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가일?”

    나한의 곁에 선 호산라가 불안하게 입을 열었다. 가일은 주먹을 꽉 쥐고 나한을 노려보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움직이던 추가 방금 한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다.

    “그래. 난 가기 싫어.”

    “가일! 왜 그런 말을 해. 혹시 세뇌라도 당했어? 아니면…….”

    “아무도 그런 짓 안 했어!”

    가일은 버럭 소리를 높여 외쳤다.

    “아무도 우리한테 억지루 안 물었고, 우리두 아무것도 안 말했어. 배신 같은 거 안 했단 말여. 그러니까 우린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두고 가. 너희가 왔다는 것두 비밀루 할 테니께.”

    순식간에 차가운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가일은 나한을 조금 두렵게 바라보았으나 꽉 쥔 주먹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호산라가 나한을 올려다보자 그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나야 형제들이 원하는 게 그거라면 들어줄 마음이 있지만, 과연 현자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현자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분이라면 틀림없이 이해해 주실 거여.”

    “그럴까?”

    나한의 시선이 가일과 두일을 넘어 마병단 건물 쪽으로 향했다.

    “서부에 있는 거점 근처에 마병단이 대거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들이 마병단인 줄조차 몰랐던 형제자매들이 뒤늦게 아주 깜짝 놀랐다더군. 듣기로는 그들에게 거점 위치까지 들킨 모양이야.”

    “무, 무어…?”

    갑자기 퍼부어진 소식에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형제를 향해 나한은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너희도 한때 그 거점에서 머물렀었지. 정말로 너희가 그들에게 우리의 서부 거점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나?”

    “우린 아무 말도 한 적 없다고! 그래서, 그쪽 거점 형제들이 마병단에게 죽기라두 했단 말여?”

    “아니. 하지만 곧 이사를 하게 되겠지. 기껏 힘들게 만든 거점인데, 많은 형제자매들이 슬퍼할 거야.”

    형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너희가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정보를 현자에게 보고했어. 돌아가지 않겠다는 보고를 할 경우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

    “나한, 너…….”

    창백해진 형제를 보며 숨을 내쉰 나한이 차갑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당연히 형제들이 돌아올 줄 알았고, 혹 호산라와 내가 위험해질 경우를 대비해야 했으니까 보고했을 뿐이지. 하지만… 그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도 도와줄 수는 있어.”

    어떻게. 하고 묻는 듯한 두 쌍의 순박한 눈동자를 보며 나한은 조용히 대답했다.

    “너희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보고는 일단 하지 않겠어. 다음에 우리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너희도 이곳의 형제들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서 이리 내버려 두는 건지 아닌지를 잘 생각해 보도록 해. 다음에 왔을 때도 의견이 변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너를 어떻게 믿고.”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한 말은 반드시 지켜. 알 텐데?”

    그제야 형제들은 나한의 말을 믿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떠나가는 짐마차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밀이 생겨버린 마음이 몹시도 불편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