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타인 공작은 한참을 화를 내다 겨우 속을 가라앉히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다. 순순히 그놈들의 말만 믿을 수는 없지. 황제 폐하께서 반편이 동생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요즘 꽤 수작을 부리셨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일이니 이번에도 분명 그 수작이 들어갔을 거야.”
타인 공작은 일단 타이누 쪽에 당장 연락을 넣어 수도에 도는 소문이 사실인지 낱낱이 확인하라고 일렀다. 그 뒤 키시아르가 정말 마병단 내에 없는지를 알려 줄 테오라도 황궁기사단장에게도 본가에 찾아오라 일렀으나, 돌아온 답은 좋지 않은 소식만을 전했다.
타이누의 빌름 남작이 다급하게 보낸 전서에는 ‘정말 마병단이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삼림 내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난 것은 맞다. 그곳에 보낸 이들과 연락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 그리고 테오라도 황궁기사단장으로부터는 ‘훈련 일정 때문에 바쁘니 한동안은 방문할 수 없다. 당분간 연락을 자제해 달라’는 단답이 적혀 있었다. 타인 공작은 두 개의 편지를 들고 한없이 분노했다.
“기가 막히는군…….”
마병단에서 서부로 사람을 보낸다면 반드시 서부의 대도시 타이누에 들러 빌름 남작을 만나지 않을 리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빌름 남작에게 그들의 처리를 맡긴 것인데, 돌아온 결과는 고작 이것이었다.
마병단이 정말 대삼림 내에서 뭔가를 했다면 그들은 타인 공작인 자신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타이누에 들러 보지도 않았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저 대신 서부를 돌볼 의무가 있는 빌름 남작은 대체 일이 이렇게 되는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전에 보낸 편지에서는 투자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대삼림 쪽에 마법사들과 기사를 보내 정리 중이라더니, 그게 사실이라면 삼림 내에서 일어난 일을 어찌 그가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답은 뻔했다. 빌름 남작이 겉으로만 그의 명에 수긍하는 척하고 뒤로는 일을 소홀히 처리한 것이다. 가문의 일에 원래부터 이렇다 할 관심이 없는 사촌 테오라도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를 무시한 게 뻔한 펠레타 공작과 마병단, 그리고 빌름 남작은 도무지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빌어먹을. 그 일들은 일단 넘어가더라도, 그동안 공들여 만들고 있던 서부 무역거점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조차 확실히 알 수가 없으니.’
남부에 투자한 건들도 아직 성과가 나오려면 이른 참인데, 거점을 완성하기만 하면 돈을 끌어모으리라 기대했던 서부에까지 일이 생길지 모른다 생각하자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타인 공작은 짜증이 날 때면 늘 그러했듯 자주 방문하는 고급 도박장으로 향했다. 그는 어서 골치 아픈 일들을 잊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자신의 뒤를 은밀하게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폐하. 타인 가에 서부에서 날아온 전서조가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했다는 소식입니다.”
멀찍이서 들려온 시종장의 보고에 한창 서류를 살피던 케일루사 황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래…. 소식을 들었겠군. 반응은?”
“화를 냈다고 합니다만 일단 현재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알겠다. 그의 행방을 놓치지 말고 계속 주시하라 이르도록.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즉시 펠레타 공작과 내게 연락하라.”
“예.”
시종장의 기척이 사라진 뒤 황제는 펜을 놓고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온갖 찻잔들을 내려다보았다. 찻잔 옆에는 은은한 검붉은 색을 띤 돌이 쌓인 바구니가 있었다. 그것은 키시아르가 황제를 위해 보내 준 붉은 돌의 힘이 담긴 매개체였다. 황제는 그 돌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손에 쥐었다. 내려다보는 눈빛 위로 잠시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바보 같은 녀석.”
잠시 후 그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매개체를 떨어트렸다. 급히 틀어막은 손수건 위로 핏물이 번졌다.
“폐하!”
다시 안으로 들어온 시종장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황제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한참 동안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입술을 물들인 피를 느리게 닦아내며 고개를 든 황제의 눈 밑이 새카맣게 죽어 있는 광경을 본 나이 든 시종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폐하…….”
“손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시종장이 침통하게 말했으나 황제는 듣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주치의를 부르면 안 되느냐는 말도, 궁중마법사청장에게 연락하겠다는 말도 모두 단호하게 거절했다.
“모두 다 필요 없어.”
“하지만 고통을 줄이는 처방만이라도 받으셔야 합니다. 며칠째 잠을 주무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것으로 고통은 잠시 줄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지 그뿐이다. 머리를 멍청하게 만드는 약은 싫어.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계속 그렇게 시끄럽게 굴 거라면 차라도 새로 내어오거라.”
이런 순간의 황제가 원하는 차는 하나뿐이었다. 황후가 직접 키워 보낸 약초로 우려낸 차였다. 황제는 시종장이 가져온 차를 마시기 위해 펜을 내려두고 안경을 벗었다. 차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창백했던 피부 위로 잠시나마 온기가 돌았다.
“황후는 오늘 무얼 하고 계신가.”
“업무를 마치신 뒤 온실을 돌보러 가셨습니다. 폐하와 내일 저녁 식사는 함께 하고 싶다는 말씀도 전하셨습니다만…….”
“그래…….”
이렇다 할 승낙의 말 없이 말끝을 흐린 황제가 눈을 내리깔았다.
“카치안은, 아직도 궁에 틀어박혀 있나?”
“예.”
암살자의 공격에 당한 상처는 자국 하나 없이 치유되었지만 카치안 황태자의 정신은 조금도 낫지 않았다. 그는 이전까지의 영악한 웃음이 마치 환상이라도 되는 양 매일 패악을 부리며 집기를 깨부수었다. 얼굴에 난 붉은 흉터를 참을 수 없다는 게 광증의 주된 이유였다.
“디아카 공작도 근심이 크겠어.”
“그런 모양이더군요. 광증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온갖 곳을 수소문한다고 합니다.”
“기다리기만 하면 손에 들어오리라 여겼을 자리가 위태로워졌으니 얼마나 엉덩이가 뜨겁겠나.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이번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자들이 거기에만 신경 써 주면 좋겠군.”
웃음기 하나 없이 신랄하게 디아카 공작을 비웃은 황제가 다시 몇 번 작은 기침을 했다.
“헤른 쪽이 이쯤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쪽은 아직 정신이 없는 모양이지.”
“예. 헤른 가에 문제가 있다면 황후 폐하께서 이미 언질을 주셨을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황후의 이름이 나오자 황제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가는 이내 그 미소를 지웠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 위로 깊은 어둠이 서렸다.
“갈 길이 아직 먼데… 내 목숨은 너무 빨리 꺼져가는군.”
“폐하…….”
쓰디쓴 한 마디 속에 담긴 아쉬움을 알고 있는 시종장의 눈빛이 덩달아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걱정 마라. 이대로 맥없이 죽을 생각은 없으니.”
황제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안경을 썼다. 그때, 창밖에서 전서조가 맴도는 모습이 시종장의 눈에 띄었다.
“폐하. 서부에서 새로운 새를 보냈습니다.”
“펠레타 공작인가?”
“예.”
그는 즉시 전서조가 가져온 편지를 읽었다. 그리 길지 않은 편지를 읽는 동안 안경 속에 가린 눈이 몇 번 크게 뜨였다가는 다시 가늘어지기를 반복했다.
“…마병단에서 두 번째 파견대를 빠르게 불러들이려 하기에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전하께 어떤 일이 생기셨습니까?”
키시아르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일이 생긴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새로 생긴 보좌였다. 황제는 키시아르가 처음 대삼림 내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편지로 적어 전했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마터면 대삼림을 넘어 서부 전체가 휘말렸을지도 모를 만큼 거대한 몬스터를 단신으로 상대한 끝에 결국 언덕 하나를 무너뜨리며 승리했다는 어느 마병단원의 이야기를 처음 보았을 때, 황제 또한 그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진의를 의심했었다. 그의 동생이 이런 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마병단원은 몬스터를 죽인 대가로 큰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키시아르는 그를 고칠 방도를 찾기 위해 본래 계획했던 바를 바꾸면서까지 대삼림 내에 머물기로 한 상태였다.
황제는 눈이 부실 만큼 잘생긴 제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키시아르는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즉흥적으로 사는 것 같아 보여도 실은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이였다. 편지에는 단순히 제 보좌를 치유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사할 것들이 늘어났다는 둥 하며 온갖 이유를 대고 있었지만 황제의 눈길은 오로지 키시아르가 보좌의 이름을 적어 둔 한 곳에만 줄곧 머물렀다. 그건 같은 피를 이은 자의 감에 가까웠다.
‘보좌… 유더 아일이라. 누구였지.’
이전에 키시아르를 따라온 마병단원 몇 사람에게 작위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따라왔다면 분명 얼굴을 보았을 텐데, 기억이 희미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는 키시아르의 편지를 접었다.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수족처럼 아끼던 나단 주커만이나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키운 펠레타 기사단을 향해서도 이런 조급함을 내비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정말 별일이군.’
키시아르는 편지 속에서 황제에게 몇 가지 일을 부탁했다. 거대한 계획을 함께하고 있는 형제로서 들어주기 어렵지 않은 일들이었다.
“서부에 있는 이들에게 좀 더 말을 빨리 퍼트리라고 전해라. 펠레타 공작이 새로운 신검의 주인이라는 걸 하루빨리 인지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군. 그리고 진주탑 측에도 연락을 넣고.”
“진주탑…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삼림 쪽에서 그쪽에 보낸 죄인들이 몇 있나 본데, 아무래도 펠레타 공작이 그들을 쉬운 처벌로 넘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지시를 더 들은 뒤 시종장은 공손히 물러났다. 황제는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몸을 이끌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이 마치 피처럼 보였다.
저 피가 곧 서부를 손에 쥔 이들의 머리 위로도 공평하게 쏟아질 것이다. 적어도 그날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