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키시아르가 말했던 가느다란 실과 이전 생의 유더가 느꼈던 찢겨 꿰매지는 듯했던 감각. 둘은 아주 다른 듯 보여도 상대와 ‘연결’된 듯 느꼈다는 측면에서만큼은 비슷했다.
이전 생에서 어떤 2성 발현자도 느꼈다 말한 적이 없었던 경험을 이제 와 다시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무어라 말로 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지?”
그때, 근처에서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그제야 긴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로 그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소리 없이 땅을 딛는 맹수처럼 조용하면서도 존재감만은 피부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크고 확실한, 키시아르 특유의 기척이었다.
“그냥… 있었습니다.”
“입술이 이렇게 파란데 이불도 덮지 않고?”
창문을 닫은 키시아르가 다가와 이마를 짚었다.
“역시 차갑군. 잠시 기다리게.”
수시로 열이 올랐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유더의 곁에는 수건과 대야, 그리고 덥히면 온기가 오래 지속되는 방한용 곡식 주머니가 항시 놓여 있었다.
유더는 안개처럼 형체 없는 힘이 바로 곁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배 위에 놓인 주머니에서 차가웠던 몸이 단숨에 풀리는 착각이 들 만큼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법을 쓰셨군요.”
“그게 느껴졌나?”
“네. 힘을 이리 함부로 쓰셔도 되는 겁니까?”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뒤로 어떤 감각들은 이전보다 더 예민해졌다. 특히 보이지 않는 기운을 감지하던 감각의 경우, 지금처럼 키시아르가 각성자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을 썼다는 것까지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몸에 이불을 둘러 주며 입을 열었다.
“마법이 확실히 다른 힘에 비해 사용 부담이 큰 편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상관없네. 아주 기본적인 가열 마법이니까.”
스스로 불 하나 불러내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마법사들 사이에서 저 말을 했다가는 아마 곱게 걸어 나가지 못했으리라. 유더는 가열 마법 정도를 쉽다고 언급하는 사내의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듯 키시아르가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며 입을 열었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한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솔직하게 대답하자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이론이나 마력 제어로는 누구와 다투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지만 사실 정식으로 배운 마법의 가짓수가 많지는 않아.”
“마력 제어를 잘 할 수 있다면 배운 마법이 적다는 게 실력과 무슨 상관입니까?”
“뭐, 그렇기는 하지. 혹시라도 배운 마법이 많아지면 무의식중에 그것들을 사용할지 몰라 제한을 둔 것뿐이니까.”
깔끔하게 대답한 키시아르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마법 실력을 다른 마법사들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말은 길었지만 무엇 하나 빠짐없이 평범한 수준을 넘어선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증폭진의 흔적을 해제하는 작업을 언제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 앞으로 종종 작은 마법들로 미리 준비운동을 할 생각이야. 그리고 방한용 주머니를 가열하는 정도는 아주 좋은 준비운동에 속하지.”
실로 유려하고 교묘한 언변이었다. 유더는 앞으로도 저 좋을 대로 마법을 쓰겠다는 말을 아주 그럴싸하게 마무리한 사내에게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다면 어서 나아주면 돼. 그러면 나도 이런 일은 안 할 것 아닌가?”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였다면 벌써 다 나았을 겁니다…….”
키시아르는 하루의 대부분을 마법사들이 있는 곳에서 연구를 도우며 지냈지만 남는 시간에는 반드시 유더를 보러 와 직접 붕대를 갈거나 상태를 살피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 외에도 무언가 일을 더 한다고 했으니 대체 그가 언제쯤 혼자서 쉬는 시간을 가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오늘은 꽤 성과가 있었어. 몬스터의 혀가 증폭진을 이루었던 마정석과 접촉 상태에서 상호 동조 반응을 일으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걸 토대로 재차 실험에 들어갈 예정이야.”
“그렇습니까.”
“재료가 필요하다는 생떼를 부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알아서 잘들 대체 방법을 찾아내더군.”
키시아르의 말투는 마법사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만큼은 여전히 온기가 없이 차가웠다. 유더는 그를 감싼 분위기가 더욱 차가워지기 전, 먼저 입을 열어 화제를 바꾸었다.
“저도 오늘 동료들에게 제 능력이 지닌 약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그랬군. 반응들은 어떻던가.”
마법사들에 대해 언급할 때와는 달리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화사하게 변했다. 유더는 저를 둘러싸고 떠들던 이들의 말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약점에 대해서만 언급했나? 다른 건?”
“한계 범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알렸습니다.”
“거대한 몬스터를 잡을 때 발휘했던 정도의 힘은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무리라고 했던 그 말 말이군.”
“네.”
키시아르는 이미 유더에게 거기까지는 들은 바 있었다. 그리고 오늘 동료들에게 같은 정보를 알린 이상, 유더는 그에게 조금 더 심화된 정보도 하나 따로 말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들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러자 유더가 덮은 이불을 매만지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잠시 후 키시아르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 더?”
“네. 이번 사건으로 대충 짐작하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몬스터에게 힘이 거의 통하지 않기 때문에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물건에도 마찬가지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힘줄로 만든 밧줄이나 이빨이나 뼈를 갈아 만든 무기, 피를 섞어 만든 독약 등이 그렇다. 가공하기가 어려운 탓에 사용하는 이가 많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주 희귀하지도 않았다. 이전 생의 기억들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중얼거린 뒤 유더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것만은 단장님께서만 알고 계셨으면 하여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키시아르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어둠 속에 가린 표정이 궁금하다고 생각할 때 즈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래. 믿고 말해준 만큼 유념해 두지.”
그는 역시 유더의 말속에 내포된 무게의 뜻을 제대로 깨달았다. 유더는 겨우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는 결국 그날도 몇 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더의 체온이 다시 돌아와 잠이 들 때까지 오래도록 옆자리를 지키다 돌아갔다. 함께 보내는 시간의 무게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이 매일 겪어도 매일 놀라웠다. 유더는 제가 그 거대한 파도에 잠겨 익사하기 전에 어서 빨리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좋은 방법을 찾아내 주거나, 혹은 두 번째 파견대가 도착하기를 바랐다.
***
‘사라인 대삼림 내에서 땅이 뒤흔들리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이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변을 일으킨 건 자연재해도, 몬스터도 아닌 인간의 힘이라고 한다.’
그 소문이 처음 퍼져나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사라인 대삼림이 어디인가. 천 년 가까이 제국의 서부에서 야금야금 자라난 거대한 미로와도 같은 숲이었다. 그곳을 인간의 힘으로 정복하기 위해 그간 수많은 소드마스터와 마법사들이 나섰으나, 아무도 삼림의 성장력을 막지는 못했다. 인간이 그곳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작은 산장 몇 개를 짓거나 혹은 무역로로 사용할 작은 길을 내어 자라나는 나무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뿐이었다.
제국 서부에 본영지를 둔 타인 공작은 그런 허황된 말을 믿느니, 차라리 펠레타 공작이 신검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이 더욱 신빙성이 있겠다고 평했다. 실제로도 펠레타 공작은 그 일을 전후하여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마병단 내에서 칩거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새로운 소문이 날개를 달고 2차로 퍼지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누구도 그것을 허황되었다고 비웃기 힘들게 되었다.
‘실제로 대삼림 쪽에서 밤새도록 몬스터 울음소리와 지진이 계속되었다는 서부 국경지대 마을들의 믿을 만한 증언이 속출.’
‘그 일이 일어난 후 급격히 증가했던 몬스터의 이상발생도 뚝 끊겼다.’
‘이변을 일으킨 자는 서부에 일어난 몬스터 발생의 원인을 찾아 막기 위해 파견되었던 마병단 소속 각성자.’
‘또한 비슷한 시기, 서부 곳곳의 태양신 사제들이 대삼림 쪽에서 움직인 거대한 신력을 다수 감지했다고 알려져…….’
연달아 서부에서 흘러나온 소문과 증언들이 온갖 루트를 타고 이곳저곳에 퍼져나가자 많은 이들이 당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를 기다렸다는 듯 마병단에서는 공식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그 소식은 여태 마병단을 우습게 보고 하나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던 이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기에 충분할 만한 이야기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 마병단에서 1차로 파견한 자들이 벌써 서부에 가 있고, 그중에 신검을 든 펠레타 공작도 있다고? 곧 2차로 파견될 자들도 출발할 예정? 이걸 지금 제대로 된 소식이라고 들고 온 게냐!”
화가 난 타인 공작이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치자 하인들이 엎드려 떨었다.
“아직 펠레타 공작이 마병단 내에서 칩거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더니 이게 사실이라면 대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야.”
서부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타인 가에서 그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무력 집단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비웃음을 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