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301화 (301/805)

301화

다음 날은 정말로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상태로 일어났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며칠간 두 번의 생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을 잠을 잤고, 깨어나 있을 때는 늘 그의 곁을 교대로 지키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칸나는 밝은 목소리로 주변 소식을 들려주었고, 가케인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면 좋을지 열심히 고민하며 조언을 구했다. 엘더 남매의 정신없이 떠들썩한 말들을 듣다 보면 어느새 다시 잠들기 일쑤였고, 서부에 오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친분이 없던 에문과도 제법 대화를 오래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를 살뜰하게 보살피는 사제 루산의 잔소리에도 점점 더 익숙해져 갔다. 아마 이전 생에서 늙을 때까지 나이를 먹어 은퇴를 했더라도 그렇게 아무 일도 안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더 또한 그들에게 제 약점과 한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그의 가장 큰 비밀이었는데, 의외로 타인에게 털어놓고 보니 그리 대단한 약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 또한 그런 느낌을 더해주었다.

“그래도 몬스터에게 힘을 아주 못 쓰는 건 아니잖아? 전투 능력이 하나도 없는 나와 비교하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칸나 말이 맞아.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내 쪽보다 간접적으로 상대한다는 네 쪽이 더 강해 보이니까 그건 그리 큰 약점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이번 일 같은 경우가 더 생기면 안 되겠지만.”

칸나에 이어 가케인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야, 무슨 약점인지 알아 두고 나중에 장난치려고 했는데 그런 거라면 하나도 소용없잖아. 절벽을 만드는 힘 정도는 하루 한 번밖에 못 쓴다니, 그걸 애초에 하루에 한 번 이상 쓸 일이 뭐가 있어?”

“맞아. 지금 자랑해?”

“그래도 해결 방법을 이미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건 어떻게 생각했어? 나였다면 너무 무서워서 그냥 몬스터를 안 만나는 일만 하겠다고 했을 텐데.”

단숨에 흥미를 잃어버린 엘더 남매의 곁에서 에문이 진지하게 질문을 했다. 유더는 제게 힘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재를 치우는 열 가지 방법을 알아내라는 숙제를 내주었던 꿈속의 키시아르를 떠올렸다.

그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유더는 아마 제 힘에 대한 자신감을 모두 잃고 그대로 은퇴했을 터였다. 복잡한 상념이 치밀어오르다가는 작은 고통과 함께 사라졌다.

“…내가 생각한 건 아니야.”

“그러면?”

“직접적으로 힘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을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들었었어.”

무심코 흘러나간 말에 일순 모든 동료들의 눈이 반짝였다.

“와, 누구한테?”

“설마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에도 다른 각성자를 만난 적이 있었던 거야?”

“나 유더가 단에 들어오기 전 이야기를 들어본 거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그들에게 시간을 되돌려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유더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다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단원들은 그 미소가 긍정의 뜻이라고 짐작해 그저 신기해했다.

“신기하다. 산에서 혼자 살았다면서 어떻게 그런 인연을 만났어?”

“누구야? 그 사람도 우리 단에 들어온 건 아니지? 지금도 연락해?”

키시아르는 지금 마병단 내에 있다. 하지만 그 조언을 해 준 때의 키시아르는 죽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시간 속에 있었다.

유더는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못 만나.”

“응? 왜…… 아야!”

흥미롭게 질문하려던 에문이 칸나의 옆구리 찌르기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칸나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키고 있는 유더를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다 나머지 단원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너는 도대체가 눈치도 없느냐는 뜻이 담긴 강렬한 눈빛을 받은 에문이 입을 벌리고 대체 뭐냐며 한없이 억울해했다.

“미안, 유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우린 이만 가볼게.”

“그래. 너도 쉬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있었네.”

단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약간 부자연스러운 인사를 남기고는 사라졌다. 닫힌 문 바깥에서 아주 작게 ‘넌 유더 표정을 보고도 모르겠어? 누가 봐도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 ‘아니, 대체 그 무표정을 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마음 읽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투닥대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배려심 넘치는 동료들이 사라진 뒤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칸나를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직접적인 화제는 아니라도 이전 생의 키시아르에 대한 말을 누군가에게 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키시아르는 죽은 이후 모든 곳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를 기억하던 단원들은 대부분 단을 나갔고, 귀족들은 새 황제 앞에서 입조심을 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펠레타는 새로운 영주를 맞이하여 언제나와 다름없는 황폐하고 존재감 없는 땅이 되었으며, 한때 공작의 기사단이라는 위명을 지녔던 펠레타 기사단 또한 반란 모의 혐의로 해산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몇 안 되는 초기 단원들 또한 누구라 할 것 없이 키시아르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초반에는 유더에게 다가와 그가 키시아르를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묻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내 제각기 좋을 대로 판단한 뒤 사라졌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대륙 정세가 나날이 급변했다. 재앙과 혼란이 계속되며 급격히 힘을 잃어가는 오르 제국과 달리 넬라른이나 다른 몇몇 나라들의 세가 급성장해 제국을 자칭할 정도가 되었다. 지진과 가뭄, 온갖 재해가 계속되며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은 이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유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키시아르는 그가 처음으로 죽였던 사람이었으나 마지막으로 죽인 이는 아니었다. 그가 마병단에 내려온 밀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죽인 이의 시체가 키시아르 뒤로도 셀 수 없이 쌓여 산을 이루는 판에 처음에 죽인 이에 대해서만 특별히 더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한때 가졌던 기억도, 감정도 그런 식으로 퇴적되어 썩어 없어지는 게 당연한 순리라고만 여겼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

유더는 누군가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에 섞인 진한 풀 냄새를 맡으며 침대에 몸을 기댔다. 열이 떨어지며 체온이 낮아지는 시기가 돌아왔는지 평소라면 선선하다 여겼을 정도의 바람에도 입술이 차가워지며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는 이불을 덮지 않고 그저 그 싸늘한 추위를 감내했다.

‘기억과 감정이라.’

그는 페투아멧을 잡은 뒤 되돌아온 제 안의 퍼즐 같은 감정들에 대해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가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그 총천연색 감정들이 대체 어디서 왔으며, 왜 돌아왔는지 이유는 아직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키시아르가 이번에 느꼈다는 이상한 현상에 대한 말을 들은 뒤 무언가 떠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끈이니, 뭐니 하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 되돌아온 감정들 속에도 어떤 공통점이 있기는 했어.’

꿈속의 키시아르를 보고 있을 때 느껴졌던 숨 막히는 감정들 속에는 언제나 지끈거리는 통증에 가까운 감각이 동반되었다. 본래의 기억 속에서는 그런 감각을 느낀 적이 없었음에도 꿈에서는 묘하게 낯설고도 익숙하다 생각했던 부분이 겹쳤다.

‘그리고 또 하나. 그렇게 익숙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나는 그 고통이 온전하게 내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다는 점.’

제가 느끼는 감정인데 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여겼다는 건 여러모로 이상했다. 그게 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것이라 여겼단 말인가? 꿈에서는 워낙 당연하다 여겨 그냥 넘어갔었는데, 머리를 식히고 새삼스레 고민해 보면 평소의 저다운 부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생각과 감정 쪽이 오히려 진실이었다면…….’

그게 말이 되려면 짐작되는 원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부분이 키시아르의 이야기를 들은 뒤 느꼈던 기시감과 관련된 요소이기도 했다.

‘이전 생에서 2성 발현 때 일어난 사고.’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답답해지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해 유더는 아주 깊이 숨을 내쉬었다. 손이 더욱 차가워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 사고는 이전 생에 일어난 모든 일 중에서도 충격적이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사건이었다. 2성 발현과 동시에 발정기가 일어났는데 마침 동석했던 이도 같은 2성 발현자일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 나쁜 운이 겹친 바람에 유더는 며칠 내내 문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상관과 짐승같이 몸을 섞고, 만신창이가 되어 눈을 뜨는 불운한 일을 겪어야 했다.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 남은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렇게 몸을 섞고 있는 동안 장소가 바뀌거나 낮밤이 지나가는 줄은 몰랐지만 그럼에도 제 안의 무언가가 갈기갈기 뜯겨나간 뒤 외부에서 들어온 무언가와 엉망으로 뒤섞이고 있다는 생각만은 끊임없이 했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누더기 조각처럼 마구잡이로 함께 꿰매지는 듯했던 그 고통.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로 제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이전 생의 기억을 멀리 밀어두었다. 이제 그만 잊고 없던 일로 둘 수 있다 생각했었는데, 제 안에서 사라진 감정과 기억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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