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그래. 원한다면 어디든 좋아. 도와주지.”
겹쳐진 두 손이 천천히 얼굴 위를 맴돌았다.
제 얼굴을 키시아르가 만질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제 손에 닿은 상대의 피부 감촉을 느끼고 있으려니 무언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유더는 매끄러운 뺨과 반듯한 코, 머리칼 사이에 가린 따뜻한 이마와 부드러운 앞머리칼을 차례차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머릿속에 키시아르의 얼굴을 그렸다.
긴 속눈썹이 손끝을 쓰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찰나의 감각만으로도 키시아르가 눈을 휘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슴이 점점 더 가쁘게 뛰었다. 유더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가자 키시아르는 겹친 채 지탱해 주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빼었다. 기력이 없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게 마치 거짓말처럼, 유더는 이제 완전한 스스로의 의지로 키시아르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조심스러웠던 움직임이 점차 홀린 듯 가쁘게 변해갔다. 한 손이 어느새 양손으로 바뀐 줄도 몰랐다.
‘이런 얼굴이었나.’
만질 때마다 손끝의 감각이 새로운 얼굴을 머릿속에 그렸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주 낯설게 여겨졌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어디를 만져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순종적으로 몸을 맡긴 채 간간이 열기가 담긴 호흡을 내쉴 뿐이었다.
유더는 마침내 코 아래쪽을 넘어 입술로 향했다. 의식적으로 피했던 부분이었지만 이제 남은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느리게 입술 윗부분을 어루만지다 끝부분으로 더듬어 넘어가자 그곳이 기다렸다는 듯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왔다.
아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을 담은 숨이 흘러나왔다.
“…간지러워.”
작게 속삭이느라 움직인 입술이 유더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 순간 유더는 더 이상 그를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부드러웠던 감정이 일시에 뜨겁게 끓어오르며 강렬한 허기로 뒤바뀌었다.
그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양손을 끌어당기며 몸을 움직였다. 마치 더욱 가까워지면 붕대 너머를 뚫고 볼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다가가자 웃고 있던 키시아르의 뺨이 굳었다.
방금까지 손으로 어루만졌던 입술에 제 것을 겹치는 순간, 안타까운 뜨거움이 머리를 잠식했다.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밀어내려는 듯했던 키시아르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었다.
“…….”
키시아르의 입술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순간을 제 입술을 통해 느끼는 건 상당히 묘한 감각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닿아보는지 모를 입술인데도 단지 제 쪽에서 먼저 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이 처음처럼 느껴졌다.
키시아르는 몇 번인가 그를 떼어내려는 것처럼 등 쪽에 손을 올렸지만, 유더의 움직임을 차마 막을 수 없었던 듯 옷자락만 붙잡았다 말기를 반복했다.
서툴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굳어 있는 혀를 건드렸다. 머뭇거리다 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물리려 했던 순간, 유더를 밀어내려던 손이 드디어 모든 인내가 바닥난 것처럼 방향을 바꾸어 강하게 끌어당겼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닿아 있는 열기만이 진짜 현실처럼 선명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허기에 허덕이는 호흡이 겹친 입술 사이로 가쁘게 흘러나오다 다시 멎기를 반복하는 동안 닿아 있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박동이 너무나 거세 터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제 박동인지, 키시아르의 박동인지 유더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손안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
지금까지 키시아르와 했던 몇 번의 키스는 모두 키시아르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번은 그 반대로 유더 쪽에서 먼저 움직였다. 깊은 자괴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치 이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왔던 듯한 기분이 유더를 사로잡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음에도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닿아 있는 순간에는 심지어 제 몸 상태가 어땠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숨을 몰아쉬다 부러진 갈비뼈에 자극을 느끼지 않았다면 아마 어디까지 계속했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치 감정에 눈이 먼 장님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지금은 장님이 맞긴 하군.’
유더는 키시아르가 갈아 준 새 붕대가 바스락거리는 감각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은 몰랐었는데, 기절한 동안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몸 쪽의 붕대를 갈아 준 사람이 모두 키시아르였다.
그런 일은 루산이나 다른 이들에게 도우라 해도 되었을 텐데, 제가 살피는 쪽이 가장 확실했을 뿐이라고 간결하게 대답하는 키시아르에게 차마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이제 끝이야. 아프지는 않나?”
“……예.”
마지막으로 허리에 붕대를 고정한 키시아르가 새 상의를 팔에 꿰어준 뒤 단추를 빠르게 잠갔다. 열기를 머금지 않은 손길이었으나 간혹 피부를 훑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부어오른 입술이 반응하듯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갈비뼈 쪽도 함께 욱신거렸기에 유더는 그 이상 감정에 집중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배가 더 고프지는 않고?”
“괜찮습니다.”
“열은… 다시 오르는 모양이군.”
막 일어났을 때 얼음처럼 몸을 가득 메우던 추위는 어느새 가신 지 오래였다. 뜨거운 이마를 짚은 손이 한숨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후회되는군. 참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다 낫고 나서 듣지.”
흐트러진 앞머리칼을 몇 번 위로 쓸어올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와 붙어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차가운 바람이 가슴 깊은 곳을 뒤늦게 싸늘하게 만드는 듯했다. 유더는 몽롱한 감각 속에서 침묵하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뭐가 또 그리 죄송할까.”
무엇이 죄송한지는 말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답을 다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더가 대답하지 않자 키시아르가 작게 숨을 흘렸다.
“나는 네가 잠들 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리고 마법사들과 함께 증폭진의 흔적을 해제하는 방법을 찾으러 가겠지.”
“단장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자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까. 답만 찾아낸다면 내가 직접 증폭진의 흔적을 해제할 생각이네.”
“…하지만 그러면 단장님께서 마법사로서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까지 모두에게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잊었나? 내가 여기에 신검의 주인임을 알리러 왔다는 걸.”
듣기 좋은 목소리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모두가 알아야지.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하여 다시는 누구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도록.
생략된 말이 머릿속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지닌 약점이 정확히 어느 정도 범위인지도 알아야 해. 최대한 현 상태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할 테니까……. 괜찮겠나?”
이전에 몬스터에게 힘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약점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키시아르가 지었던 표정이 유더의 머리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내심 그 사실을 섭섭해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감정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말해 주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는 모습이 새삼 놀라웠다.
“물론입니다.”
“현재까지 그 사실을 아는 건 나와 루산 사제뿐이네. 다른 이들은 스스로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 척해 줄 거야.”
별것 아닌 듯 말하지만 그건 다급한 와중에도 최대한 유더의 의지를 존중해 주려 했던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유더는 가슴속에서 또다시 치미는 따끔따끔한 고통을 억누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래.”
“단장님께는 지금 말씀드릴 테니…….”
“이렇게 뜨거운데 무슨 말을 하겠다고. 다음에 듣지.”
“하지만…….”
“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 그러나?”
정곡을 찌른 키시아르가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괜찮아. 물론 처음 눈치챘던 순간에는 적어도 내게는 미리 말해 주었다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 하지만 사실을 미리 알았어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막을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더군.”
“…….”
붕대투성이가 된 몸을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네겐 그저 그게 당연했던 거겠지. 혼자가 익숙했던 이의 성정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는 이번에도 유더에게 아무것도 깊이 묻지 않았다. 그 사실이 주는 무게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저는…….”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자주 했던 충고였다. 같은 뜻의 말임에도 꿈속에서 들었던 때와는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어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멍하니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자 키시아르가 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어 손가락을 얽었다.
“괜찮아. 그런 이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만족스러워. 그러니까 오늘은 더 노력하지 않아도 돼. 시간은 아직 많으니…….”
시간이 아직 많다니. 그렇게 이상한 말이 또 있을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보다도 그 말이 유더에게는 더욱 묘하게 느껴졌다. 그는 맥이 풀리는 기분과 함께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나쁜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군…….”
희미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