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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99화 (299/805)

299화

이후 키시아르는 유더의 어깨 위에 고개를 숙여 가볍게 얹은 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더 또한 그의 어깨를 감싼 손을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기대어 있는 가슴 언저리에서 규칙적으로, 그러나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죽은 이에게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생명의 증거였다.

서로가 서로를 구속한 모양새나 다름없었으나 답답함도, 이상함도 없는 기묘한 평온함만이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감돌았다. 현실은 더 나아진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모든 것이 완벽해진 듯한, 실로 말도 안 되는 기분이 잠시 찾아들었다. 이전 생에서 제가 죽인 사내를 끌어안고서 느끼기에는 몹시 기만적인 감정이었다.

이 기묘한 충족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유더는 조용히 자문해 보았다. 답은 당연히도 알 수 없었다. 씁쓸하고 낯선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는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다른 이들도 서로 안고 있을 때 이런 기분을 느낄까.’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과 충동 아래서 이제까지의 자기 자신이라 믿었던 존재가 녹아내리는 충격을 매번 감내하는 게 당연한 것일까.

유더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남은 기력을 쥐어짜는 노력을 하면서까지 닿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을 리 없다. 키시아르였기 때문에 움직인 것이다. 쓰디쓴 고통에도 불구하고 결국 끌어안은 손을 떼어내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열망이 유더의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감정이란 이상하지.”

문득 키시아르가 작게 입을 열었다.

“논리와 인내로 무장한 이성에 비해 무기라 할 만한 걸 전혀 쥐지 않은 주제에 누구보다 빠르게 목표를 쓰러트려 패배자로 만들어. 감정에 패배한 결과가 항상 이렇게 달콤하다면, 누구도 처음부터 싸우려 하지 않게 될 거야…….”

아무래도 그 또한 유더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피부를 간지럽히는 한숨을 내쉰 사내가 그를 안은 유더의 어깨 위로 지친 사슴처럼 머리를 기대었다.

“고작 이것만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다니, 그간 자만해 왔던 게 우습군.”

“우습지 않습니다.”

상대가 먼저 내민 손 하나로 모든 감정이 누그러진 사실이 우스운 거라면 유더 자신은 벌써 몇 번이고 웃음거리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야말로 키시아르의 손짓 한 번에 언제나 스스로를 잃고는 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을 지속하고 싶어서 다른 할 일들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그건… 저도 비슷한 듯하니 더더욱 우습지 않습니다…….”

망설이다 대답하자 낮은 웃음이 어깨를 통해 진동처럼 느껴졌다. 유더는 제 몸을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 팔을 느꼈다.

“그래. 그러면 조금만 더 이렇게 욕심을 부려 보지.”

깊은 호흡을 반복할 때마다 맞닿은 몸에서부터 머리가 멍해질 만큼 좋은 향이 은은하게 났다. 인간이 만들어 낸 향수와는 전혀 다른 그것은 키시아르 특유의 체향이었다. 평소에는 아주 간혹 느껴졌던 향이 순식간에 이토록 진해진 듯 느껴지는 것은 그의 감정이 그만큼 격렬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리라.

코끝을 넘어 피부를 감싸 파고드는 그것을 들이마시자 제 몸속의 무언가도 덩달아 이끌리듯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연기처럼 스며든 보이지 않는 손이 내부에 잠든 무언가를 부드럽게 주물러 얽혀드는 것 같은, 간질거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이었다.

유더는 새삼스레 그도, 자신도 2성 발현자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달콤하군.”

순간적으로 제 생각이 입을 타고 흘러나간 줄 알았으나, 입을 연 이는 키시아르였다. 그는 유더의 목줄기에 머리칼을 느릿하게 비비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향은 대체 무엇을 위해 생겨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아.”

코끝이 턱 아래를 간지럽게 훑자 등줄기가 부르르 떨렸다.

“이 달콤함을 몰랐다면 아마도 그때 네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찾을 수는 없었겠지…….”

그때라는 말에 의문을 품었던 머리가 곧 답을 찾아냈다. 키시아르는 어둠 속의 사라인 대삼림을 뚫고 페투아멧을 단신으로 상대한 유더를 찾아냈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유더는 멍하니 ‘그러고 보면…….’ 하고 조금 늦은 의문을 느꼈다. 늦게 도착한 키시아르가 그토록 빠르게 정확한 장소를 찾아온 건 드넓은 사라인 대삼림에서는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법사들이 유더를 안내하기 위해 나무 위에 걸어두었던 색 변환 마법은 일시적인 수단이라 금방 사라져 남아 있지 않았을 테고, 키시아르에게는 길을 알려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망설임 없이 그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때 저를 그리 빨리 찾아내신 게… 설마 향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어떻게…….”

“글쎄. 나도 아직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잘 모르겠군.”

다만 유더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몸 안쪽에서 오감을 넘어선 무언가가 눈을 뜬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확실한 건 그 순간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는 것뿐이야. 갑자기 내 안에 나조차 몰랐던 가느다란 실이 있고, 그게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 왠지 모르게 그 끝에 네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아무 이유도 없음에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한 확신이 들었던 것 같아.”

그는 그 감각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숲을 달렸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한 실을 따라 달려갈수록 그가 찾아 헤매던 답이 가까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느다란 끈에서 미약하게 달콤한 향이 났다.

“그건 분명 네 향이었어.”

중얼거린 키시아르가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너를 찾은 이후에는 그 감각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꿈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말 그대로 불가사의한 체험이었다. 이전 생의 기억을 통틀어도 그런 일을 겪었다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향은 2성 발현자라면 대부분 가진 특성이었다. 발정기 때가 가까워질수록 의지에 반하여 점점 짙어져 상대 성을 이끄는 효과를 지녔을 뿐, 특정한 누군가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실……. 그리고 연결이라.’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머리가 멍해서인지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감사한 일이지. 아무튼 덕분에 널 찾아냈으니까.”

조금 더 빨리 찾아냈다면 더 좋았겠지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유더는 제 눈가가 위치한 부위에 감긴 붕대 위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눈을 마주 볼 수 없다는 게 이토록 안타까운 일인 줄은 몰랐지.”

그 목소리 속에는 조금 더 일찍 도착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숨길 수 없이 묻어 있었다. 덕분에 유더 또한 불시에 가슴속이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키시아르는 무슨 표정으로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을까. 상상해 보려 해도 그려낼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유더를 향해 키시아르가 조용히 물었다.

“보이지 않는 게… 무섭지는 않나?”

무섭지는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고 힘을 쓸 수 없다 해도 그것이 유더에게 후회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부를 통해 선명히 느껴지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제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만은 아쉬웠다.

“……무섭지는 않지만,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어떤 부분이?”

유더는 부서지는 햇빛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있을 법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런 말을 해도 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일순 머리를 스쳤으나 입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지… 볼 수 없으니까요.”

키시아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깜짝 놀랄 만큼 뜨거운 무언가가 맞닿은 피부 사이로 훅 일었다. 그 감각에 놀라기도 전에 유더의 귓가로 아 하는 떨리는 숨결이 울려 퍼졌다.

“…정말 미칠 것 같다는 게 뭔지 알겠군.”

뜨거운 입술 끝이 귀 바로 아랫부분에서 달싹이는 감각이 오싹했다.

“얼마나 참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질이 너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나?”

조금 아플 만큼 끌어안은 채 떨리던 팔이 몇 번의 호흡 끝에 간신히 떨어져 나갔다.

“나를 아픈 사람을 상대로 만져도 되느냐고 묻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말아.”

키시아르가 발하는 뜨거운 열망이 눈을 가린 어둠을 넘어서도 손에 만져질 듯 선명히 전해져 왔다.

그는 유더 아일을 원한다.

그가 지닌 감정은 유더가 전신에 독을 뒤집어쓰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끔찍한 꼴이 되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토록 철두철미한 사내가 제 앞에서 이토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유더의 내부를 아프도록 두드렸다.

“그렇다면, 제 쪽에서는 만져 보아도 됩니까?”

“어디를?”

유더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힘겹게 손을 움직였다. 볼 수는 없어도 만져 본다면 그가 짓고 있을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손끝에 턱 부근이 살짝 닿자 피부가 긴장으로 슬며시 굳어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금 더 만져 보고 싶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미끄러지는 손을 붙잡아 부드럽게 끌어당긴 키시아르가 잠시 후 제 뺨을 어루만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 원한다면 어디든 좋아. 도와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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