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298화 (298/805)
  • 298화

    “정확히는 두 가지. 독성과 증폭의 힘.”

    유더는 키시아르의 손가락 끝이 제 검지와 중지를 부드럽게 감싸 쥐는 감각을 느꼈다.

    “그 몬스터는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증폭진의 힘을 먹어치워 흡수한 상태였지. 흡수한 마법의 힘은 몬스터의 육신에 영향을 미쳤고, 그건 즉…….”

    “체액에도 스며들어 있었으리라는 말씀이군요.”

    “맞아.”

    그리고 유더는 그 두 가지 힘이 녹아든 체액을 전신이 푹 젖을 만큼 뒤집어썼다. 유더는 페투아멧의 혀를 자르던 순간 제 몸을 뒤덮던 검고 차가운 액체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신력을 계속해서 부어 넣고 있음에도 몸에 스며든 독성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되돌아오거나, 심지어 범위를 늘리기까지 하는 건 증폭의 힘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탓이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어. 쉬면 회복되어야 할 능력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도 몸에 파고든 독의 뿌리를 막아내는 쪽에 더 많은 기력을 쓰고 있기 때문일 테고.”

    그의 말대로 유더는 아직도 힘을 거의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 시도했을 때 물 한 방울을 겨우 불러냈던 수준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 봤자 몇 방울 정도 증가한 차이에 불과했다. 회복했다고 말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마법사들을 만나 증폭마법을 만들었던 때 남긴 기록들과 전체 구조를 다시 한번 살피며 이야기를 들었네.”

    며칠 만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키시아르가 마법사들에게 증폭진의 구조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자, 미칼린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찬 펠레타 공작이 증폭진의 존재 자체를 이 세상에서 소멸시키라 명령할 경우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뇌했지만, 이야기가 끝난 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키시아르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는 그들에게 그날 밤 알아내려 했던 문제의 답을 다시 찾아내 달라고 부탁했네.”

    제가 미칼린에게 하고 온 말을 짧게 설명해 주는 키시아르의 목소리는 여태까지 유더의 귀에 들려주었던 것과 전혀 다른 딱딱함으로 가득했다. 마법사들의 앞에서도 저렇게 감정을 전부 차단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을까. 유더는 제가 보지 못한 키시아르의 태도를 목소리만으로 추측하려 노력하면서 느리게 반문했다.

    “그날 밤이라면…….”

    “네가 그들에게 주고 갔던 몬스터의 혀에 남아 있던 마법의 흔적을 탐색해 해제 방법을 알아내는 일.”

    미칼린은 유더가 페투아멧을 죽일 때까지 그 일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 이후에는 키시아르와 마병단을 상대하느라 작업을 재개하지 못한 채 중단한 상태였다. 쓸모없는 일로만 남았을 뿐이라 생각하고 잊고 있던 마법사들은, 그 작업을 재개해 달라고 말하는 키시아르의 요청에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네 몸에 파고든 독성을 없애려 해도 증폭의 힘이 방해하는 게 문제라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증폭진의 흔적을 찾아 먼저 없애는 쪽이 해답이 될 수도 있겠지.”

    그것이 키시아르가 그간 유더의 치료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유더는 제 몸을 단단하게 품고 있는 팔 안에서 방금 들은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마법에 대해서는 키시아르가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그 말이 정말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조금 있었다.

    “제가 힘을 흡수한 적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때는 제가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제 손에서 붉은 힘이 새어 나오는 걸 조금도 느끼지 못했는데…….”

    “같은 전투라도 공격과 방어는 다른 법이지 않겠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쉽게 생각하게. 네 몸이라는 전장을 배경으로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온 몬스터의 독성을 네가 가진 내부의 힘들이 막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지금은 증폭이라는 원군과 신력이라는 원군을 각각 데리고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는 중인 거지.”

    유더는 언젠가 이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력이 독을 해독하는 과정은 그것을 지워 없애는 게 아니라 약화시켜 동화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설명하던 그의 말이 키시아르의 설명과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마법사들이 찾아낸 답이 내게 확실히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불확실한 결과를 위해 마법사들에게 다시금 증폭진과 페투아멧의 혀를 손대게 만드는 게 과연 옳은 길일까. 키시아르가 저 때문에 괜히 불필요한 일을 하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하자 뱃속이 답답해졌다.

    유더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키시아르가 조용히 물었다.

    “내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키시아르의 선택. 그 말의 무게가 유더의 가슴을 무겁게 두드렸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이래 키시아르의 선택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번은 두 번의 생에 차이점을 만들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인 유더 자신과 관련된 일이었고, 이전 생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선택이었다.

    유더는 오랫동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 방법 외에도 다른 선택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해답을 좀 더 충분히 구해 보시는 방법도 있겠지요.”

    유더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이는 이논이었다. 그의 통찰력과 지식이라면 이 상황에 대해 좀 더 색다르면서도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글쎄……. 마병단에 남아 있는 나머지 의료부원 한 사람을 부르기는 했지. 2차 파병대를 빨리 부른 이유에는 그 이유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빨리 와도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테고, 와도 곧바로 어떤 해답을 주리라는 보장은 없어.”

    뜻밖의 말에 고개를 돌린 유더는 문득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그의 손을 붙잡는 힘을 느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을 뭐라도 더 빨리 해 보는 쪽이 낫지 않겠나? 나는…….”

    침착하게 내뱉던 말이 마지막 부분에서 묘하게 떨렸다.

    “이 이상 눈앞에서 네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아.”

    순간 또다시 심장 안쪽에서 무언가 크게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것을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지는 말아 주게.”

    몸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강하게 힘이 들어가며 두 사람의 몸이 이전보다 강하게 밀착되었다. 닿아 있는 몸이 기이한 열기와 고통을 동시에 전달했다. 가장 깊은 심해의 밑바닥처럼 어두운 목소리를 들으며 유더는 꿈속에서 들었던 그의 고통스러운 호흡을 떠올렸다. 키시아르가 이를 악문 채 숨을 몰아쉬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내 그릇이 매시간 점점 더 부서져 가는 걸 느꼈던 때보다도, 어떤 의미로는 지금이 더욱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어서 나아주지 않으면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어. 아무리 인내심을 기르려 해도, 결국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 모양이지…….”

    그러니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거절하지 말라는 속삭임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끓어오르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저를 안은 팔의 주인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저항하기 어려운 이끌림 속에서 그와 입을 맞추었던 때보다도 지금 느껴지는 열기가 더욱 강했고, 몇 배는 더 숨이 막혔다.

    차가운 머리로 생각한다면 조금 떨어져 달라고 말한 뒤 키시아르를 진정시키는 쪽이 맞았다. 그는 아무래도 걱정이 지나쳐 평소의 냉철함을 다소 잃은 상태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제 안에 난 수많은 구멍들을 걱정하며 두려워했던 마음도,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면 치밀어올랐던 불안감도 키시아르와 맞닿아 있는 순간 모두 저 멀리 사라졌다. 저를 걱정하여 평정을 잃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키시아르가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숨도 쉬기 힘들 만큼 끌어안겨 있는 이 상황이 기꺼운 듯 느껴졌다. 아무래도 냉철함을 잃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더는 누군가 들어올까 걱정했던 마음을 잊었다. 어쩌면 계속해서 이렇게 있어도 상관없을지 몰랐다.

    그것은 그가 키시아르에게 느낀 이끌림 이후 처음으로 다시 자각한 욕망이었다.

    당혹스러운 호흡에 섞인 떨림을 고통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키시아르가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놓고 몸을 조금 물렸다.

    “미안하군. 아팠을 텐데…….”

    그 순간, 유더는 힘겹게 손을 올려 그를 마주 안았다. 보이지 않아도 어디를 감싸 안아야 할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키시아르의 말이 일시에 멈추며 몸이 단단히 굳었다.

    “단장님의 선택이 틀릴 거라고… 제가 언제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한마디 말을 내뱉기가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지만 유더는 멈추지 않았다.

    “증폭을 해제하는 마법을 걸든, 뭘 하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뭐든지 할 테니… 그러지 마십시오. 가슴 안쪽이 자꾸 아파서… 차라리 맞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는 잘만 움직이던 혀가 왜 이런 때에는 제대로 된 뜻을 전달하기조차 힘든지 의문이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던 키시아르가 그를 훨씬 강하게 마주 안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면 안 되지.”

    키시아르가 웃으며 속삭였다.

    “지금도 아픈데 여기서 내가 더 아프게 만들면 안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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