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그가 기억하는 한 가장 어릴 때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식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상대가 키시아르라는 사실이 더욱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이런 일을 했던 적이 없었다. 이전에 꾸었던 꿈에서처럼 서부 몬스터 토벌 초반에 유더가 양팔 부상을 입었을 때 한 번 찾아왔던 이후로, 그는 유더가 어떤 부상을 입든 다른 단원들에 비해 과도하다 여겨질 만한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더 또한 그의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 여겼다.
발현 때 일어난 사고의 여파로 친분 관계에 비해 지나치게 자주 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 종종 단 내에서조차 비아냥을 듣던 참에 키시아르가 지금처럼 그를 품에 안은 채 식사를 도와주려 했다면 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구보다 단호하게 거절했으리라.
일주일에 걸쳐 두 사람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었던 사고의 입단속은 그럭저럭 잘 처리했다 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유더 아일은 바꾸지 못했다. 그는 키시아르가 죽을 때까지 언제나 조금 뛰어난 능력 이외엔 지도자로서의 어떤 자질을 보이거나 주변의 납득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쉽게 부단장 자리와 차기 단장 자리를 거머쥔 젊고 건방진 오메가 각성자 취급을 받았다.
그때는 상황을 바꿀 의지도,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할 마음도 없었기에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거나 지나치게 짜증 나게 굴면 힘으로 눌러 버리는 방법으로 강하게 응수했다. 물론 그와 같은 방법은 대개 늘 상황을 더 나쁘게만 만들 뿐이었다.
키시아르는 그가 단원들과 부딪치는 사고를 칠 때마다 한숨을 내쉬며 조언을 주고는 했지만, 그때의 유더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여 따르기보다는 강제로 명을 내려 따르게 하는 방법 쪽이 더욱 빠르게 먹히던 애송이였다. 키시아르가 제 상황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안다고 볼 때마다 자꾸 말을 보태는지 알 수 없어 미약한 분노에 휩싸였던 기억이 났다.
유더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 뒤에도 한동안은 자신이 기억했던 일들에 의심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대체 제 기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가 느꼈었다 믿었던 감정과 생각들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여태껏 꾸어 온 꿈이 단순한 꿈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늘 해 왔었지만 페투아멧을 잡고 난 뒤부터는 단순한 짐작을 넘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유더 아일의 내부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깊은 어딘가에 존재했기에 스스로도 얼마나 많은 빈틈이 있는지 다 알 수가 없었다. 유더는 솔직히 말해 여태 제 안에 그런 구멍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구멍들이 진짜가 아니라면, 페투아멧을 죽인 이후로부터 과거를 떠올리거나 꿈을 꿀 때마다 느껴지는 낯설고 익숙한 기억과 감정의 파편은 대체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하나둘씩 나타나 다시 채워지는 듯한 작은 퍼즐 조각들의 존재는 곧 그가 잃고 있던 무언가를 상징했다. 그게 뭔지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키시아르와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제 기억과 감정을 믿을 수 없다면 다시 돌아온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토대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성은 그가 여태껏 해온 일들은 옳았으며 그리 깊은 의심을 품지 않아도 된다고 속삭였으나, 가슴속에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한 불꽃은 여간해서는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눈을 가린 붕대 때문에 유더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거기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키시아르가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메마른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단장님께서, 이런 일에 지나치게 익숙해 보이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현재의 키시아르는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유더에게 남다른 감정을 내보이는 중이었다. 그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웠다고 속삭였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리에 선해 지워지지 않았다. 유더는 그와 닿아 있는 감각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깊은 고통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동시에 느꼈다.
“오해하지 말아. 누군가에게 이런 걸 해 주는 건 처음이니까.”
다행히 키시아르는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다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이런 모습을 보면 저는 당장 잡혀갈 겁니다.”
“내가 있는 한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일 테니 안심하게.”
“다른 동료들이 들어오면…….”
“그만.”
짤막하게 말허리를 자른 키시아르가 수저를 놓고 유더의 머리를 제 품 속에 가볍게 눌러 안았다. 그가 내쉬는 한숨 소리가 몹시 크게 느껴졌다.
“그런 쓸데없는 곳에 상상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을 해 보면 어떨까.”
누가 보아도 황족 모독을 하고 있다 여길 만한 상황인데, 이게 쓸데없는 상상력 발휘라면 무엇이 더 현실적인 생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말이 되어 흘러나오지 못한 의문을 읽은 것처럼 키시아르가 대답해 주었다.
“그보다 궁금한 것들도 있을 것 아닌가. 루산 사제와 다른 이들에게 여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질문을 그리도 많이 했다면서.”
“물어보면 답해주실 겁니까.”
무심코 그렇게 물은 뒤 유더는 손끝을 움찔 굳혔다. 지금의 키시아르는 그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게 알려주겠다고 말했으며, 그 약속을 분명히 지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필요도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요 며칠 사이 계속된 꿈과 충격 때문이리라.
“그래.”
키시아르의 고요한 목소리가 파문이 이는 물결처럼 가슴 속에 울려 퍼졌다.
“왜 자꾸 네게 이러느냐고 묻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식사를 하고 말을 하는 도중에도 키시아르는 내내 유더의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빗어내리며 목덜미를 조심스레 매만지기를 반복했다. 짧은 머리칼을 반복하여 헤집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 움직임을 결코 멈출 줄 몰랐다. 유더는 그가 깨어나던 날 하염없이 볼과 귓가를 매만지던 손길을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두 번째 파견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둘로 나누어 하나는 타이누 쪽으로, 하나는 이곳으로.”
이미 가케인에게 들어 알고 있는 말이었지만 키시아르는 그들이 해 주지 않았던 말도 덧붙였다.
“몬스터 토벌도 중요하지만, 두 번째 파견대는 조사와 관련된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거야. 다양한 인원이 필요한 일이 많이 생길 테니까.”
“조사라면…….”
“짐작하고 있지 않나?”
“나그란의 별과 마력의 샘 유적에 대한 부분입니까?”
대답을 하자 긴 손가락 끝이 귀 뒤쪽을 칭찬하듯이 가볍게 문질렀다.
“그리고 하나 더. 타인 공작가와 관련된 일.”
짤막한 대답만으로도 눈을 가린 어둠 속에서 수많은 정보와 기억이 범람했다.
“마법사들에게 타인 공작가가 대삼림 내에 무역 거점을 새로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불법 무역을 시도 중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라 생각하십니까?”
“생각이 아니라 이번 일로 확신의 수준이 되었지. 소문 자체는 서부에 오기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어.”
운이 좋았다고 중얼거리는 키시아르의 목소리는 말과 달리 그리 기쁘게 들리지 않았다.
“나그란의 별 거점에 남겨 몰래 조사 작업을 지시한 펠레타 기사단이 보고를 보내왔네. 그곳에서 머물던 이들 중 불법 무역의 희생자가 될 뻔한 사람이 다수 존재하는 듯하다는 내용이었지. 이제부터는 그 부분을 파고들 생각이야.”
마법사들이 들려주었던 소문은 역시 허황된 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짧은 사이 나그란의 별 거점을 조사하는 일까지 놓치지 않은 철두철미함이 놀라우면서도, 그런 일을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전해 들어야 하는 상황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그란의 별 거점에 대한 조사는 계속 비밀스럽게 진행하실 예정입니까?”
“직접 본 바로 그곳에 이전에 아페토 가에서 마주쳤던 이들과 같은 의도를 지닌 듯한 각성자는 없었으니까.”
키시아르는 사라인 대삼림 내에 위치한 거점에 머무는 이들은 대부분 평범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심층부가 어떤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위험한 상황에서 굳이 요란한 추적과 조사를 이어나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정보를 수집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 일을 펠레타 기사단이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에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그런 일을 마병단원들만의 힘으로 진행해야 하는 날이 온다. 아직 갈 길이 먼데, 그의 몸은 하나도 낫지 않은 그대로였다.
“오늘 마법사들을 만나고 오신다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걸 이제야 묻는군.”
목소리는 여전히 무덤덤했으나 유더는 그의 입술 끝이 씁쓸하게 올라간 광경을 상상했다. 자주 보던 표정이라 곧바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나는 이 손에 있는 반점이 여태 일으킨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이 어쩌면 이번에도 어떤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짐작했다네.”
키시아르가 비어 있던 손으로 유더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서부로 향하기 직전, 네가 내 몸 안에서 힘을 흡수한 것 같다고 말했던 일과 같은 현상이 이번에도 일어났다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유더는 키시아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그 이야기만으로 곧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가 왜 마법사들을 만나 조언을 들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뒤집어썼던 몬스터의 피 안에서 어떤 힘을 흡수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군요.”
“정확히는 두 가지. 독성과 증폭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