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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295화 (295/805)

295화

미칼린이 죄지은 이들을 연합에서 내쫓겠다는 결정을 밝히자마자 키시아르는 기다렸다는 듯 거점 근처에 와 있던 펠레타 기사단 일부를 거점 내로 불러들였다. 그는 쫓겨난 마법사들이 잠시도 거점 내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없도록, 기사단과 함께 당장 진주탑까지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루산은 그 명이 마법사들에게는 오히려 잘 된 조치였다고 말했다.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았으면 처벌이 끝나고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다른 단원 분들 눈빛이 그만큼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물론 단장님을 포함해서요.”

그 일행에는 또 다른 이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바로 유더가 단신으로 때려잡아 가두어 두었던 암살자들이었다. 돈만 받으면 누구든 죽이는 일을 하는 가장 비천한 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함께 호송된다는 건 나름대로 특권을 누리며 살아왔던 마법사들에게 있어 참을 수 없이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 미칼린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가 진심으로 책임을 통감 중이라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마병단과 서부 마법사 연합 간에 진행되는 모든 일에 전폭적으로 협력할 것이며, 키시아르가 원한다면 연구를 모두 중단하고 연합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발언을 하여 휘하 마법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러나 키시아르가 노마법사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필요 없으니 나의 보좌 유더 아일의 부상이 나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 것.’

상대측에서 모든 요구에 굽혀 주겠노라 말한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가 바란 것은 본격적인 협상도, 분노를 터트리는 것도 아닌 침묵뿐이었다.

그리하여 마법사들은 유더가 회복될 때까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오늘,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낫지 않는 유더의 상태를 다른 방향에서 파악할 요량으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대화를 요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군. 그런데… 나그란의 별은 어떻게 된 걸까.’

모든 궁금증이 풀린 뒤에도 이번 일에 엮인 남은 한 조직인 나그란의 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루산도 마법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만 알려 주었을 뿐, 나그란의 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그 부분만은 공백으로 남은 상태였다. 나그란의 별에 대한 조사는 유더와 칸나가 중심이 되어 진행했던 일이니 칸나를 만나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듯했다.

‘별말이 없는 걸 보면 일단 큰 문제는 없었던 듯하지만…….’

“사제님. 말씀하셨던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여기 두면 될까요?”

때마침 가케인이 돌아왔다. 그는 루산을 도와 묵묵한 손길로 유더의 팔다리에 감긴 붕대를 갈고 약을 발라주었다. 칸나처럼 화가 났다는 말을 하며 마음껏 때려도 되련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가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케인.”

“응?”

“칸나와 사제님께 그간 있었던 일을 들었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을 텐데, 미안.”

그들은 유더를 위해 피로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달려왔고, 그가 크게 다쳤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슬퍼하며 화를 내 주었다. 이전 생에도 만났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음에도 그때와 지금은 서로를 향한 감정이 전혀 달랐다. 처음에는 그저 키시아르를 이전처럼 죽게 하지 않으려 움직였던 것뿐인데, 어느새 다른 이들의 존재까지 그의 안에서 이만큼 커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유더는 이전 생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담아 진심으로 그들에게 사과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자 가케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후 그는 조금 목이 멘 목소리로 대꾸했다.

“유더가 그런 말도 다 하고, 이번에 정말 아프긴 했나 보네.”

“…….”

“네가 모두를 지키려고 혼자서 나섰다는 걸 알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대가로 네가 죽었다면, 우린 하나도 안 기뻤을 거야. 알아?”

“…응.”

칸나처럼 네가 뭘 아느냐고 답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가케인은 다행히 그렇게까지 혼을 내지는 않았다.

“있잖아. 이번 일 때문에 다들 마법사가 싫어졌대. 나도 그래. 어떤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싫어해 볼 수 있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 알았어. 널 도와주려 한 사람들도 많았다는 걸 아는데도…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끝까지 화가 나더라. 그게 다 우리 입지가 아직 약한 탓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그렇게 말하며 기운 없이 웃음을 흘린 가케인이 유더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네가 없는 마병단은 정말 상상도 안 돼. 그러니까 얼른 나아. 단장님께서 두 번째 파견대를 부를 거라고 하셨으니 다른 사람들이랑 만날 때까지는 다 나아야지.”

“두 번째 파견대를?”

수도에 두고 온 이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아스라이 떠올랐다.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에게 침묵을 요청했다던 키시아르는 그래도 다른 일까지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철저한 태도가 평소의 키시아르답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의 흔들리던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명치 부근이 울렁거렸다.

제가 기절해 있는 동안 그는 어떤 기분으로 그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을까.

“응. 그쪽은 둘로 나누어서 반은 타이누를 비롯한 도시 쪽으로, 그리고 반은 여기로 올 거래.”

페투아멧을 잡았으니 두 번째 파견대의 규모를 축소할 줄 알았는데 키시아르는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뭔가 더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건가?’

“지금 또… 일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때 유더의 생각을 읽은 듯이 가케인이 말을 걸었다.

“안 돼, 유더. 넌 몸이 나을 때까지는 다른 일에 절대 관여할 수 없어. 지금은 다른 데 신경 쓰기보다 무조건 안정을 취할 생각부터 해.”

“…….”

아무래도 남에게 여간해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유순한 가케인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다른 동료들의 반응은 더 들어볼 필요가 없을 듯했다. 유더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가케인과 루산이 동시에 그러게 왜 그리 무모하게 굴었느냐며 한마음 한뜻으로 잔소리를 했다. 듣기는 괴로웠으나 덕분에 분위기는 어느 정도 밝아졌다.

“아 맞아, 유더. 단장님께서 두 번째 파견대가 오면 새롭게 발생하는 몬스터 토벌 관련 일은 나에게 맡기실 모양인 것 같아. 본래는 네가 했어야 할 일인데……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까.”

“토벌 관련 일을 네게?”

유더는 문득 가케인 또한 그가 미래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가케인 본인은 알지 못하겠지만 그는 유더가 아는 마병단원들 중 누구보다도 일찍 죽은 축에 속했다.

가케인이 이전 생에서 죽었던 때는 페투아멧이 죽고 나서 더 뒤의 시기였다. 모두가 포기하려 했던 서부에서 놀라운 승리를 일구어낸 마병단과 그 중심 전력들을 향한 귀족 및 온갖 세력들의 견제와 항의로 인해 유더가 더 이상 출전하지 못하게 된 뒤, 막바지에 이른 토벌을 마무리하러 떠났다가 사고로 사망했었다.

그때는 아까운 인재의 죽음이라는 애도의 말들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다. 친하지도 않은 남의 죽음에 신경을 쓰기에는 제 앞에 닥친 일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가케인 볼룬발트는 이런 곳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에는 정말로 아까운 인재였고,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나갈 가치가 충분했다.

‘…그때도 페투아멧이 죽은 뒤 사고가 났던 거라 왠지 좀 걱정이 되는데.’

입을 꾹 다문 유더의 얼굴에서 걱정을 읽은 듯 가케인이 웃었다.

“난 부단장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단원일 뿐이라서 잘할 수 있을지 아직 자신이 없지만… 내가 자꾸 못 한다고만 하면 날 가르쳐 준 너한테도 실례라고 칸나가 그러더라.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는 열심히 해 보려고.”

가케인은 보기보다 몹시 끈질긴 성정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는 열정을 지녔지만, 그에 비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은 부족한 편이었다. 키시아르가 토벌 담당으로 그를 택했다면 그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그러했을 확률이 높았다. 유더가 단장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터였다.

유더는 가케인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뀌어 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혼자서 헤쳐 나가려 하기보다는 주변을 향한 믿음도 필요한 때임을 알았다.

주변을 믿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건 여태 누구보다 먼저 앞에 나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치우려 했던 유더에게 무엇보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니 강제로라도 거기에 익숙해져야 할 듯싶었다.

“…잘 해봐. 너 정도 실력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

유더는 망설임 끝에 가케인을 향해 격려의 말을 던졌다. 깜짝 놀란 듯 말이 없던 가케인이 잠시 후 기쁜 목소리로 ‘고마워.’ 하고 작은 속삭임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단장으로 그토록 오랜 시간을 지냈음에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기분 좋게 새 붕대를 감아주는 가케인에게 그간 고민해 왔던 조력자 영입 제안을 하기로 했다.

“가케인. 내 상태가 나아지면 네게 할 말이 있는데…….”

“뭔데?”

“가케인! 나와! 교대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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