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단장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던 때라 우선 숨겨 둔 몬스터들을 압수하고 해당 마법사들을 따로 구금했습니다.”
“순순히 조치를 따르려 하지 않았을 텐데… 다른 마법사들의 반발은 없었습니까?”
유더의 염려 섞인 반문에 루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있었지만… 단원 분들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모두 그냥 잡아다 가두었습니다.”
“……그랬군요.”
유더는 동료들이 그의 생각만큼 어리고 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키시아르가 없는 상황에서 갓 임무를 맡아 세상에 나온 단원들이 마법사들에게 밀렸을까 걱정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단호한 조치였다.
“다행히 수장님을 비롯한 다수의 마법사 분들이 도와주셨기에 그 과정에서 큰 다툼은 없었습니다. 하긴, 명예와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들을 감쌀 수는 없지요.”
다시 붕대를 감기 시작한 사제의 손에 이전보다 훨씬 강한 힘이 들어간 듯 느껴진 건 착각이 아니었다. 루산은 몬스터를 생포하여 숨겨 온 마법사들에 대한 분노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단장님께서 유더 님을 데리고 오신 뒤에는 치료를 하느라 하룻밤 내내 그 일을 제대로 보고할 수 없었습니다. 보고를 한 건 날이 밝은 뒤였는데…….”
유더의 치료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뒤에야 키시아르는 비로소 방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서슴없이 모자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그를 마주한 마법사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입을 벌렸다.
분명 마병단원들 중에 유달리 키가 큰 사람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워낙 말이 없던 탓에 누구도 그를 그리 중요히 여기지 않았었다. 설마 투박한 모자와 망토 속에 저런 숨 막히는 얼굴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얼굴 하나로 마법사들의 경계심을 녹였던 가케인 볼룬발트조차도 그의 곁에서는 빛을 잃었다.
그 정체불명의 사내는 자신의 정체를 묻는 마법사들을 향해 짤막하게 대꾸했다.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다.’
서부 마법사 연합 전체가 그 말 한마디로 충격에 빠졌다. 마법사들은 평범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지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그들도 제국의 황족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게 비록 머리가 좀 모자란 탓에 황가의 골칫덩이라는 소문만 짜하게 난 펠레타 공작일지라도 말이다.
펠레타 공작이 마병단 단장이라는 사실은 알았으되 그가 이런 험한 곳까지 와 있었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마법사들이 당혹감을 삼키는 사이, 수장 미칼린이 앞으로 나서서 그를 상대했다.
‘정체를 숨기고 계셨던 것입니까?’
‘훤히 드러내고 돌아다닐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이해해 주리라 믿네.’
이후 거점의 현 상태를 묻는 몇 마디 대화만 오갔음에도 마법사들은 눈앞의 사내가 소문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금방 깨달았다. 키시아르는 평소 무기처럼 두르고 있던 미소 대신 서릿발처럼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제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서로 간에 진솔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된 듯하군.’
키시아르는 모두의 앞에서 칸나와 다른 단원들이 알아낸 정보와 루산이 유더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보고받은 뒤, 미칼린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다. 미칼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칸나가 알아낸 사실 중에는 심지어 수장인 그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휘하 마법사들의 위험한 발언과 행동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그대들을 구하기 위하여 나선 끝에 저곳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데, 누군가는 협력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고 제 욕심만 차릴 만큼 이 일이 우스웠던 게로군.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장으로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이끌었던 마법사들의 불찰이니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부끄러움에 희게 질린 채 두 눈을 질끈 감은 미칼린의 뒤편에서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이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병단장으로서 나는 결코 이 일을 쉽게 넘길 생각이 없네.’
본래 죄를 지은 마법사의 처벌은 다른 마법사들이 내리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였다. 비밀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마법사 집단은 외부의 간섭을 여간해서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미칼린과 함께 죄지은 마법사들의 처벌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수도에 있는 궁중마법사청과 진주탑에 이번 일을 알리겠다는 일방적 통보 앞에서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키시아르는 마병단을 이끌고 죄를 지은 마법사들과 만났다. 분한 눈빛 속에 마병단을 향한 불만과 무시를 숨기지 못한 이들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미소를 흘린 사내의 눈빛에 한기가 가득했다.
죽일 테면 죽여 보아라. 하지만 그 즉시 마병단은 전 마법사들의 공적이 될 것이라 말하는 치기 어린 저주를 내뱉은 한 마법사를 향해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죽음 따위는 벌이 될 수 없겠지. 너희가 우습게 여기고 통제할 수 있다 여겼던 것이 무엇인지 직접 겪어보도록 해라.’
그가 내뱉은 처벌은 짐짓 간단해 보였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병단원들은 키시아르의 명에 따라 마법사들을 끌어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몰래 생포하여 증폭진을 구성하던 마정석 일부를 먹인 채 기절시켜 두었던 작은 몬스터 한 마리를 데려와 앞에 두었다.
‘이 몬스터를 상대하여 이긴다면 수장이 무어라 해도 너희를 처벌하지 않겠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도록 하지.’
마법사들은 얼어붙었다. 연구를 목적으로 생포해 왔을 뿐, 그것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가정을 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병단과 동료들 앞에서 창피하게 손조차 올리지 않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페투아멧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위력이 큰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괜찮았습니까? 그 몬스터가 또다시 커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일을…….”
마법사들이 연구를 위해 또 다른 페투아멧을 만들어내려 했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지만, 키시아르가 그것을 막지 않고 아예 제대로 상대해 보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피가 식을 만큼 놀라웠다. 유더의 경악을 이해한 듯 루산이 낮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단장님께서 사전에 단원 분들과 서부 연합 수장님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미리 알려주시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장담하신 뒤 시작한 일이니까요.”
결론은 아주 빠르게 났다. 마법사들은 공격할 때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페투아멧을 보자마자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들 대부분은 마도구 없이 쓸 수 있는 마법의 종류가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이들이었다.
손바닥만하던 크기가 조금 더 커졌을 뿐임에도 몬스터의 공격 몇 번에 그들이 애써 복구시켜 두었던 거점의 보호진과 남은 건물들이 사정없이 부서져 날아갔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겁에 질려 도망치려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마병단원들이 그들을 그렇게 놓아두지 않았다. 단원들은 자리를 벗어나려 하는 마법사들을 가로막고 몇 번이나 다시 냉정하게 페투아멧 앞으로 내몰았다. 엘더 남매 같은 이들은 그 틈을 타 손발이 미끄러진 척하면서 몬스터가 부순 것보다 더 많은 마법진을 부수기도 했다. 죄를 지은 마법사들이 악을 쓰며 그들을 뿌리치고 공격하려 해도 그런 약한 공격에 맞아줄 만큼 무른 단원은 마병단에 없었다.
말 한 마디 없이 싸늘한 대응 속에서 마법사들은 상대와 자신들의 격차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몬스터의 위력을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스스로 저지르려 한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를 몸소 느끼게 해 주는 처절한 광경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멀쩡한 마법사들은 속이 쓰린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끝이 날 때까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유더 님이 처음 깨어나신 것도 그때쯤이었어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면 유더가 놀라 뛰쳐나오려 할 것이 뻔하다 여겼기에 그들은 벌어지는 상황을 비밀로 했다.
키시아르는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르다 결국 쓰러진 마법사들을 지켜보는 내내 단 한 번도 동정의 기색이나 웃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를 따르는 단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든 마법사들이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에야 상황이 종결되었다. 꽤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누구도 몬스터를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그저 몬스터가 더 커지지 않도록 도망 다니며 제 몸을 보호하려 노력했던 부끄러운 행동들뿐이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키시아르는 몸소 나서서 검을 뽑아 작은 몬스터를 베어 죽였다. 마법사들은 손조차 제대로 댈 수 없었던 몬스터를 그는 손짓 한 번으로 무력화시키고 혀를 잘라내어 삽시간에 싸늘한 사체로 만들었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하는 욕심의 말로가 무엇인지 명심하도록. 이번과 같은 행운은 두 번 오지 않는다.’
결국 죄를 지은 마법사들은 서부 마법사 연합에서 쫓겨나 진주탑으로 돌아가는 벌을 받게 되었다. 진주탑으로 돌아간 뒤에 그들을 기다리는 건 동료들의 환대가 아닌 제대로 된 조사와 냉정한 처벌뿐일 터였다.
진주탑은 제국 내에 존재하지만 그들이 가진 위상은 한 나라에 속하지 않고 전 대륙의 마법사를 모두 아울렀다. 그런 집단에서 벗어났을 때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넓은 듯 좁은 마법사 집단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