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꿈속에서 느꼈던 감각이 다시 한 번 유더의 심장을 찔렀다. 피부에서 올라오는 열보다 더욱 뜨겁게 가슴을 불태우는 고통의 이름을 그는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후회였다.293화
그때, 키시아르에게 왜 자꾸 저에게 찾아오느냐고 물어보았더라면 어땠을까. 날이 갈수록 여위어 가는 몸 상태에 대해 자세히 캐물어 보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물론 당시 짐작했던 대로 솔직히 답해주지 않고 또 벽을 쳤을 확률이 높기야 하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유더 아일을 적대시하여 수없이 암살 시도를 했던 수많은 정적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벽도 아니었다.
지금 유더의 눈앞에서 자책감과 자기혐오로 괴로워하고 있는 키시아르 라 오르는 심지어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꿈속의 키시아르보다도 더 어리고, 죽기 전의 유더보다도 훨씬 젊었다.
유더는 피를 나눈 하나뿐인 형제인 케일루사 황제와 황후가 사망한 뒤 홀로 떠난 펠레타에서 키시아르가 보냈을 시간들을 여태까지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가 입에 올리지 않으니 자신도 굳이 들쑤시지 않으려 했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키시아르라 해서 그런 시기가 힘들지 않았을 리 없다. 어쩌면 꿈속의 키시아르는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저를 찾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숫제 기름을 들이부은 불처럼 커져 명치까지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전 생에는 키시아르가 그저 범접할 수 없이 멀고 어렵기만 한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갓 20살이 된 시골뜨기 애송이의 눈에 비친 공작 전하는 그가 알던 상식대로 이해해 보기에는 너무 낯선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겉모습은 여전히 20살의 유더 아일일지 몰라도 속에 든 알맹이는 그때의 모나고 앳된 구석이 닳아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꿈속의 시기 이후로도 십 년을 넘게 나이를 먹어버린 유더와 달리 키시아르의 시간은 지금과 거의 다름없는 모습에서 영원히 멈추었다.
“…….”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이후로도 줄곧 이전 생의 기억이 크게 남아 무의식중에 키시아르를 저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알기 힘든 존재처럼 여겨 왔다는 사실이 쓰라렸다.
키시아르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순진한 꿈을 꿀 줄 알았다. 그도 아끼는 존재를 위해 고통스러워할 줄 알았으며 들끓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를 향한 자책과 혐오를 드러내고 마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유더는 지금으로부터 11년 뒤의 제 얼굴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키는 아주 조금 더 자라다 멈추고, 얼굴은 메말라 더욱 날카로워진다. 몸에는 지워지지 않은 큰 흉터가 여럿 생기고 날씨가 궂을 때는 간혹 오른손이 둔했다.
마병단의 다른 단원들의 몇 년 뒤 모습도 떠올리려면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에버는 긴 머리를 짧게 쳐내고 뺨에 긴 흉터가 생기며, 마병단을 그만두기 전의 엘더 남매는 키가 많이 자라 누구도 그들을 어린아이 취급하지 못한다. 나이를 먹은 카치안 황태자는 어떤 모습이 되는지, 키시아르가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4대 공작가의 일원들은 또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두 다 알았다.
하지만 키시아르 라 오르의 나이 든 모습만은 영원히 떠올릴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에서 올라오는 쓰라린 고통이 피부에서 오르는 열과 뒤섞여 죽음을 맞이하던 날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다시 돌아온 이래 한 번도 굳이 돌이켜 보려 하지 않았던 마지막 그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단두대 아래 엎드린 채 소리 없이 분노하고 절망한 끝에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누군가의 얼굴이 눈을 가린 어둠 속에서 다시 피어났다.
더 이상 억누를 수단이 없어질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떠올렸던 그 얼굴.
그것은 키시아르의 얼굴이었다.
“…….”
등줄기를 타고 고통이 전율처럼 흘러내렸다.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끔찍한 벌이었던가?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자기 자신에게서는 도망칠 길이 없었다.
키시아르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유더는 무엇보다도 지독한 벌을 받은 기분으로 숨을 헐떡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이 아픈가?”
가빠지는 숨결을 확인한 키시아르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얼굴을 매만지던 손을 떼어냈다.
“…을 가져올…… 잠시…….”
멀어지는 그의 기척을 느끼며 유더는 몸을 태우는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입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정처 없이 흔들대던 의식이 또다시 검어졌다. 유더는 어둠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도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키시아르 대신 다른 이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유더. 정신을 차렸어? 의식이 돌아왔으면 입을 열어 봐.”
“……가케인.”
“응. 나야.”
여전히 눈앞을 가린 어둠 속에서 가케인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한 손 안쪽에서 가케인이 느끼는 깊은 안도감이 전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일 때문에 나가 있어. 네 안정에 방해가 될까 봐 번갈아 가며 너를 돌보는 중이야. 아, 목은 안 말라? 물을 줄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조심스럽게 유더의 입 안쪽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뒤이어 루산 사제가 나타나 몸 상태가 어떤지를 묻고는 피로한 목소리로 상황을 알려주었다.
“정신을 잃고 계시는 동안 열이 계속 크게 올랐다 떨어지기를 반복했어요. 체온 변화가 너무 커서 깨어나시더라도 제정신을 차리실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으시다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유더는 열이 오를 때는 머리에 올려 둔 물수건이 순식간에 미지근해질 만큼 크게 열이 오르다가도, 떨어질 때에는 동상을 입은 사람처럼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체온이 떨어졌다가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하는 도중이라 멀쩡하게 느껴지는 듯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신성력도 여전히 통하다 말다를 반복하는 중이에요. 부어넣으면 피부에 스며든 검은 독이 좀 사라지지만 치료를 끝내면 다시 본래대로 돌아오죠. 그래도 이전처럼 더 크게 번지는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이 치료가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유더는 루산에게 미안함을 담아 사과를 했다.
“가케인 님. 물수건과 약초를 새로 가져와 주시겠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그곳에 있습니다.”
“네.”
가케인이 나간 뒤 루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장님께 들었습니다만, 유더 님께서는 몬스터에게 약하시다면서요. 정말인가요?”
키시아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갑자기 가슴속이 또다시 크게 울렁였다. 유더는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고개를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네.”
“미리 알았다면 몬스터를 단신으로 해치우실 수 있다고 해도 말렸을 텐데……. 정말 후회되네요.”
“왜 사제님께서 후회하십니까. 그건 제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몬스터를 상대로는 힘이 평소보다 약하게 발현되는 게 맞지만… 확실히 해치울 자신이 있었기에 갔던 겁니다.”
말을 한 뒤 유더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 마디를 덧붙였다.
“피를 뒤집어쓴 것만으로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건 정말 큰 의문점이었다. 아무리 페투아멧이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몬스터라고는 해도, 독성이 있는 피를 뒤집어쓴 것만으로 몸이 이렇게 될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신성력을 부어도 효과가 없고 며칠째 앞도 보지 못한 채 누워 있다는 건 독에 의한 부상 때문이라 여기기엔 뭔가 이상했다. 아무래도 다른 원인이 개입했을 확률이 높았다.
유더의 말에 루산이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동의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단장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신성력이나 치료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가 변하지 않는 원인이 다른 데 있는 듯하니 그걸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고요. 그래서 지금은 다른 분들과 함께 서부 연합의 마법사 분들을 만날 거라고 하시더군요.”
아주 오랜만에 듣는 듯한 마법사들의 이름에 유더는 조금 놀랐다. 그들에 대한 유더의 마지막 기억은 부상을 입은 뒤 깨어났을 때 밖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던 폭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체 제가 기절한 뒤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겁니까? 이 안에만 있으려니 상황을 하나도 알 수가 없어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했다가 설마 또 관심을 돌리기 위해 수면제를 털어 넣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지만 다행히도 루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음……. 단장님께서 그분들과 대화를 하실 거라고 했으니 이젠 말씀드려도 되겠죠. 다시 일어나시면 최대한 심신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셨거든요.”
그 말에 또다시 유더의 뱃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산은 유더의 몸에 두른 붕대를 갈면서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는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거의 못 들었습니다. 제가 그분들의 협력을 기다리지 않고 몬스터를 처리한 게 오히려 잘 되었다는 말씀만…….”
“그거면 다 들으신 것 같은데요.”
짤막하게 대답한 루산이 붕대를 갈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유더 님이 몬스터를 잡으러 떠나신 동안 위층에서는 수장님과 다른 분들이 혀를 가지고 흡수한 마법의 힘을 분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시고, 그 외의 다른 마법사 분들은 거점을 지키기로 했었죠. 이건 기억하시죠?”
“기억합니다.”
“수장님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더 님께서 몬스터를 유인하여 마력의 샘 유적지 근처에 거의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 마법사 몇 사람을 그쪽으로 미리 파견해 증폭진과 보호진을 거둬 두라고 명령하셨어요. 아직 해제 방법을 완전히 찾지 못한 상태였지만 언제라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던 거죠.”
미칼린의 명은 어느 순간까지는 제대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명을 듣고 마력의 샘이 있는 유적지로 향하던 마법사들이 작은 페투아멧을 발견했을 때, 그들 중 일부의 마음속에서 순간적인 욕심의 불꽃이 일어나며 문제가 발생했다.
서부 연합의 마법사들 중에는 유더를 도왔던 이들처럼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려 노력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위험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도 연구를 망칠지 모른다는 데 대한 분노와 집념이 더 큰 자도 있었다.
그들은 작은 페투아멧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면 이후 연구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한 번 욕심을 내기 시작하자 그들 스스로 마법진을 거두는 일조차 불공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더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만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그들은 페투아멧 몇 마리를 몰래 기절시켜 생포했다. 그리고 미칼린이 명령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채로 거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실은 키시아르의 명을 받고 마법사들의 정보를 샅샅이 읽기 시작한 칸나에 의해 금세 탄로 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