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292화 (292/805)

292화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 사과는 상대에게 오히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죄송이라… 뭐가 죄송하단 거지?”

방금보다 더 버석해진 속삭임이 희미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여기서 그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고 만 사과라고 말했다가는 저 목소리가 부서져 버릴 듯한 기분이 들어, 유더는 필사적으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에… 다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혼자 무모하게 굴지 말라고도 하셨는데 나섰고…….”

“…….”

“그리고…….”

머리가 멍한 탓에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평소보다 어려웠다. 그러고 보면 입 안도 평소보다 훨씬 메마른 듯했고, 내뿜는 숨도 뜨거웠다. 잠들기 전 루산이 했던 말대로 진통 성분이 든 약의 힘이 다해 피부에 스며든 몬스터의 독성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느리게 이어나가던 말이 멈추고 침묵이 찾아오자 키시아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숨소리가 어쩐지 심장을 찌르는 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전부 어기고 나섰다는 건, 그만큼 그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말해 그랬지만, 유더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다시 한 번 같은 기회가 돌아오더라도 그는 페투아멧을 죽이기 위해 나섰을 것이다. 그 몬스터가 어떤 재앙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고, 결과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페투아멧이 죽었으니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을 테고,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온 유서 깊은 도시와 마을들도 부서지지 않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리라.

그리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힘겹게 버티다 쓰러져 갔던 마병단원들과, 단신으로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페투아멧을 상대했던 그들의 단장 또한 이번에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될 것이었다.

비록 키시아르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유더에게 있어서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번 일의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았다. 유더는 눈을 가린 어둠 속에서도 아직 선명히 떠오르는 절벽 위의 흰 옷자락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리고 키시아르가 무어라 화를 내더라도 그가 감내할 당연한 벌이니 얌전히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영웅이었어.”

그러나 돌아온 말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매일 제국의 초대 황제와 그를 도운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었지. 몸을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걸 억누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는 주변의 부탁을 참을 수가 없었어. 옳은 일을 위해서 목숨마저 기꺼이 불사르고,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영웅이 되고 싶었네.”

조용히 이어나가던 말이 마지막 부분을 내뱉은 이후 잠시 끊겼다. 작은 웃음소리가 허탈하게 새어 나왔다.

“그때는 몰랐지. 영웅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지를.”

“…….”

“역사에 남을 과업을 달성한 대가로 초대 황제께서 일찍 신의 부름을 받은 뒤, 그 자리를 대신한 황후께서 훗날 유언으로 두 사람의 관을 나란히 눕히지 말고 영원히 마주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눕혀 달라는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나?”

유더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 움직임만으로도 뇌 전체가 흔들리는 듯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사람들은 당연히도 그 유언을 들어주지 않았어. 그래서 그분은 황제의 관과 그냥 나란히 눕게 되셨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단장님.”

희미하게 부르자 다가온 손이 유더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평소에도 그리 체온이 뜨거운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그 손끝이 차게 느껴졌다. 역시 제 몸 상태 쪽이 비정상인 모양이었다.

“유더 아일. 자네는 영웅적인 일을 해냈어. 순간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의 목숨과 나아가 모두를 망칠 뻔했던 자들 대신 거대한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곳 전체를 구했지. 그건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아주 훌륭한 일이야. 그런 자네의 상관인 나 또한 당연히 그 행동을 치하해야겠지.”

일부러 공적인 어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뺨에 닿은 손을 통해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전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뺨에 닿은 손가락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로 네가 죽을 뻔한 걸 칭찬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전의 나는 어떻게 그런 일을 잘도 해냈는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아. 그저 끊임없는 되새김질과 후회만이 가득해서…… 원하는 대로 데려가는 쪽이 옳았을지, 아니면 내가 남는 쪽이 나았을지를 두고 몇 번이나 생각했음에도 답을 얻을 수가 없었지. 어쨌든 너는 무사하니 괜찮다고, 상황은 잘 종결되었고 이전의 계획보다 훨씬 유리하게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는 말이야. 그 모든 게 끔찍해 참을 수가 없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나?”

키시아르의 목소리 속에 담긴 괴로움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는 유더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의심하고, 원망하는 중이었다. 분노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느껴진 순간, 유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단장님.”

유더는 힘겹게 그를 불렀다. 그러자 뺨을 감싸쥔 채 떨리던 손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유더는 지금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사내의 얼굴이 어떤 상태일지 이토록 절실히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저지른 일에 후회가 없다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처럼 가슴속 어딘가가 마구 고통스러워졌다. 마치 조각가가 정을 들고 갈비뼈 안쪽을 쪼아 파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마물의 독보다 더한 고통을 삼키며 재빨리 입술을 달싹였다.

“단장님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그냥 제게 화를 내십시오. 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저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가득 차 주변을 떠올리지 못한 건 제가 아닙니까. 마법사들이 증폭진을 해제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고도 말했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자 생각나지 않아서…….”

“그자들이라면 기다리지 않은 쪽이 현명했다.”

잠긴 목소리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예?”

키시아르는 말이 없었다. 끓는 듯한 침묵 속에서 그저 유더의 뺨에 닿은 다섯 개의 손가락만이 그의 존재를 깨닫게 했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받아들이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긴 손가락 끝이 눈을 감은 붕대 위를, 이마를, 머리칼을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신없이 매만졌다. 루산도, 칸나도 모두 했던 행동인데 키시아르의 손길은 그들과는 무언가 근본적인 부분이 다른 듯 느껴졌다. 유더는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아프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처음 느껴보았다.

“내 품에서 네 숨이 꺼진 줄 알았던 순간, 다시 눈을 떠줄 때까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

“…….”

“정말로, 아무것도…….”

반복하여 속삭인 사내가 유더의 머리칼을 넘어 귓가를 하염없이 더듬었다.

“그런데 정작 눈을 뜬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웃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나?”

유더는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을 읊조리려 했으나 입술 아래쪽을 지그시 누른 손끝이 움직임을 막았다.

“너는 언제나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을 가르치지. 어느 때에는 유일하게 나와 같은 사람 같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나를 세상에 다시없을 무력한 멍청이로 만들어. 하지만 그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살아 있다면 그런 건 상관없으니…….”

메마른 입술 끝을 살며시 누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유더는 기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욱신거리는 가슴 안쪽의 고통을 참았다.

정말로, 차라리 몇 대 얻어맞거나 고함을 치며 화를 내 주었다면 차라리 그쪽이 훨씬 견디기 편했을 것이다. 키시아르가 새카맣게 탄 재처럼 힘없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무력한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을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듣는 일보다 고통스러운 형벌은 세상에 다시 없을 듯했다.

이전 생에서 그를 죽인 유더 아일 따위가 뭐라고 키시아르 라 오르씩이나 되는 사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기분이 이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진심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더욱 심장을 조였다.

‘……진심.’

그 낯선 단어를 다시 한 번 되새김과 동시에 깨어나기 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그때 유더를 찾아왔던 이전 생의 키시아르도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늘상 장난스러운 태도만 유지했던 건 아니었다. 단순히 제 후임을 괴롭히고 싶다는 이유로, 누구와도 할 수 있는 게임이나 성교를 하기 위해 굳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펠레타에서 이곳까지 온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는 그가 왜 굳이 자꾸 제 곁으로 찾아오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꿈속에서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꽉 끌어안던 팔이 주던 간절한 온기 속에는 분명 그가 말로 내뱉지 않은 진심이 어려 있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