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291화 (291/805)

291화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임을 하던 도중에 졸다니, 어지간히 지루했나 보군.’

유더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저를 보고 있는 키시아르를 멍하니 응시했다. 방금 귀에 파고든 소리는 눈앞의 사내가 게임판 위에 패를 내려놓으면서 난 소음이었다. 그는 검은색 판 위에 어지럽게 놓인 패를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충 보아도 그의 패가 완벽하게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게임을 지속할 맛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그냥 이대로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집중을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새벽에 갑자기 침실 창문을 넘어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게임판을 꺼내든 건 단장님이 아니십니까?’

‘단장님이라니.’

‘아, 네. 지금은 공작님이시지요.’

짜증이 은은하게 뒤섞인 유더의 대꾸에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몇 번을 말해도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 모양이군.’

‘예. 저는 호칭을 구분하며 살 일이 없던 평민 출신이라 어쩔 수가 없군요.’

싸늘한 빈정거림에도 키시아르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대단히 관대한 사람이었다.

‘많이 피곤한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유더는 며칠간 카치안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궁에서 지내느라 마병단에 있는 단장 숙소에 돌아온 것도 간만이었다. 줄곧 풀지 못했던 긴장을 겨우 풀고 좀 잠들까 싶었던 참에 들이닥친 불청객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래… 오늘은 날이 안 좋았나 보군.’

‘오늘만이 아니라 언제나 안 좋습니다. 마병단에 오실 거라면 이런 식으로 자꾸 몰래 들어오지 마시고 기별이라도 좀 하고 오시면 안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건 유드레인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키시아르는 마병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펠레타로 돌아간 뒤 한 번도 수도에 다시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만 그랬다는 소리다. 카치안 황제가 붙인 눈과 귀가 펠레타 주변에 깔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귀신처럼 잘도 빠져나와 마음대로 불쑥 유더의 침실에 침입하고는 했다. 펠레타 공작이 화장실만 가도 당장에 큰일이라도 난 양 보고하는 이들이 안다면 놀라 자빠질 사실이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지금 단신으로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수도 전체가 뒤집어지겠지. 그것도 마병단 내에서 태연하게 전술 게임이나 두고 있다는 걸 안다면 더더욱.

어차피 키시아르가 이곳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게임이나 좀 하고,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다 잠을 자고 가는 것뿐이었기에 여태까지는 그 일탈 행위를 보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들어온 소식 이후로는 정말 이 상황을 묵인해도 괜찮을지 의문스러웠다.

펠레타 공작이 펠레타에서 개인 기사단과 사병을 끌어모아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런 소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한 일이었다. 젊은 황제는 제국민들에게 전에 없이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 칭송받고 있으나 배신 행위에는 결코 자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경계하는 키시아르 라 오르가 만든 마병단이 여태까지 잘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카치안 황제가 그들을, 그리고 유더를 쓸모 있는 패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카치안 황제가 그 소식을 알게 된다면…….

유더는 전술 게임판을 살피며 말없이 생각에 잠긴 키시아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소문이 진짜냐고 물어보았자 과연 답해주기는 할까? 단장 자리를 내놓고 가던 순간까지도 유더에게 제 계획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마병단이 어린 시절 가지고 놀다 버린 장난감보다 큰 가치가 있기는 할지도 의문이었다. 유더는 갑갑한 마음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키시아르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저 수련이나 하고,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살던 때가 그리웠다. 단장 자리에 올라서 좋았던 것보다는 귀찮은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이 짐덩어리를 강제로 제게 안기고 간 사내가 바로 눈앞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유더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졸음이 좀 깼나 싶더니 이제는 쓸데없는 생각이 드나 보군.’

마치 유더의 생각을 읽은 듯 키시아르가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마정석 난로에 비친 얼굴이 오색으로 일렁였다. 예전보다 살이 빠져 날카롭게 드러난 턱선과 생기 없이 어두운 눈 밑이 볼품없어 보일 만도 하건만, 저 사내는 그런 모습마저도 숨이 막힐 만큼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무래도 계속할 분위기가 아니니 게임은 이제 그만하지.’

키시아르가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패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좀 더 나를 재미있게 해 줬으면 좋겠군.’

‘저는 바쁩니다. 게임 상대라면 펠레타에도 많지 않으십니까.’

‘없어.’

없기는 뭐가 없단 말인가. 증거를 내놓으라 할 수 없으니 저 성의 없는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저러는 것이었다.

‘제 전술 게임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면서 매번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몇 번을 해도 자네의 게임 버릇이 그대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재미있는 걸 어떻게 하나?’

유더는 코끝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의 패만 먼저 앞으로 내세우는 버릇을 고치라는 말씀을 이제는 그런 식으로 하시는군요. 핑계는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언제 돌아가실 겁니까.’

키시아르가 흐릿하게 눈을 휘었다가는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가 드러낸 변화라 할 만한 건 고작 그 정도였으나, 유더는 묘하게 쑤셔 오는 가슴 안쪽을 느끼며 손으로 옷 위를 지그시 짓눌렀다. 또 시작이었다. 키시아르와 마주하고 있을 때면 늘 이랬다. 아무 이유 없이도 갑자기 가슴이 찡하게 아프거나, 혹은 고통스러울 만큼 가쁘게 뛰어대기 일쑤였다.

그는 고통을 주는 키시아르의 시선에서 도망치듯 일어나 마정석 난로로 향했다. 새로운 마정석을 좀 더 집어넣기 위해 옆에 놓인 그릇 안에 손을 넣었다 빼는 순간 등 뒤에서 단단한 팔이 다가와 그를 끌어당겼다.

손에서 미끄러진 마정석 한 개가 바닥을 굴러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유더는 그것을 주울 틈을 얻지 못했다.

‘글쎄……. 언제 돌아갈까?’

확실한 건 그게 지금은 아니란 거야.

귓가에 쏟아진 금빛 머리칼이 뺨을 간지럽혔다. 지독하게 낮고 버석한 목소리가 허리 안쪽을 깊이 울렸다. 유더는 제 옷자락 안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손길에 몸을 퍼뜩 떨었다. 가죽 장갑이 맨살을 더듬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육신은 아주 익숙하게 등 뒤에 닿은 몸에서 풍기는 아찔한 체향에 반응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열이 오르기 시작한 몸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음식을 앞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입안이 질척해지고 배 아래가 뜨거워지는 감각에 유더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힘이 빠지는 허리를 가볍게 당겨 품에 안은 사내가 붙잡은 손목 안쪽에 입술을 농밀히 문지르며 침대로 이끌었다.

‘그래……. 사실 게임 같은 건 핑계였을지도 모르겠군.’

흰 시트 위로 무너진 몸을 조금의 틈도 없이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사내에게서 고통스럽게 느껴질 만큼 가쁜 호흡이 울렸다.

‘이제야 살 것 같아.’

…….

***

유더는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멍하니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붕대가 감긴 눈 때문에 현실과 꿈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하필 꿈을 꿔도 그 시절 꿈을.’

꿈속에서 그는 마병단 단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를 보았다. 키시아르가 은퇴를 해 놓고도 틈만 나면 단장실에 들락거리며 그를 놀라게 했던 때였다. 그가 펠레타로 돌아간다기에 더 이상 육체관계가 지속되지 않을 줄 알았던 게 멍청한 생각임을 깨닫는 데에는 10일도 채 안 걸렸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생에 손꼽을 만큼 어이없었던 일이었다.

유더는 꿈속의 키시아르와 대화를 하던 도중 제가 느꼈던 가슴의 통증을 떠올리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분명 내 기억에는 그냥 짜증만 났었던 것 같은데……. 그런 통증에 내가 그렇게 익숙했었나?’

아주 낯선 감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했던 그 감각. 마치 비어 있던 퍼즐 하나가 또다시 맞춰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유더는 이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페투아멧을 잡고 나서 힘이 모두 소진되어 잠시 전신의 감각이 끊겨 있던 짧은 순간 떠올렸던 과거의 기억 속에서였다. 이전에는 기억에 없었던 감정이 문득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빈자리를 메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의문이 이번에도 똑같이 찾아들었다.

그 감각은, 그 감정은 대체 뭘까.

제 것이 아닌 듯하면서도 제 것 같던 선연한 고통.

멍하니 그 자취를 더듬듯 가슴 위로 손을 올리는데 갑자기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나?”

유더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지만 여전히 눈앞은 검기만 할 뿐이었다.

“……단장님.”

“악몽을 꾸는 것 같더군. 호흡이 여러 번 변했어.”

키시아르의 목소리는 화가 난 사람이라 느끼기 힘들 만큼 침착했다. 그러나 그 기묘한 침착함 때문에 오히려 듣는 이의 감각을 오싹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슨 꿈을 꾸었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악몽이 아니라 음란한 꿈 쪽에 더 가까웠기에 유더는 거짓말을 했다. 키시아르도 더 묻지 않았다.

주변은 무척 조용했다. 귀를 기울여도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칸나와 루산의 기척도, 바깥에서 느껴지던 떠들썩했던 소음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 조용함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의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유더는 제 곁에 있는 사내의 존재를 몹시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다른 이들이 있었을 때와는 달랐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존재만은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낯선 감각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는 애써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습니까?”

“하루 정도.”

키시아르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밤인 것 같은데 단장님께서는 안 주무십니까?”

“…지금 나를 걱정하나?”

메마른 반문이 돌아왔다.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유더는 곧장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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