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루산 사제는 잠시 후 데려올 이를 위해 치료할 여력을 남겨두도록.”
그리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홀로 사라졌다. 마병단원들은 그가 사라진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숨을 다시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다, 단장님은 어디로 가신 거야? 설마 혼자서 유더를 찾으러 가신 건가?”
“아마 그렇겠지. 사제님께 데려올 사람을 위해 힘을 아껴두라고 하셨으니…….”
에문의 질문에 가케인이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늘 유순하게 굴었던 가케인도 이런 상황에서는 평정을 지키기 어려웠는지 표정이 한없이 딱딱했다.
“칸나. 우리 정말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공격할수록 더 커지는 몬스터라니, 뭐 그런 게 다 있어. 유더가 아무리 세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혼자서 잡아?”
“나도 모르겠어…….”
칸나는 제 곁에 모여든 엘더 남매를 향해 멍하니 대답했다.
“그래도 일단은 시키신 걸 하면서 기다려야겠지.”
유더는 330명의 마병단원 중 이견의 여지 없이 가장 강한 단원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유더에게 능력 발전을 위한 도움을 받은 경험이 존재했다. 칸나는 키시아르를 믿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유더의 강함을 믿고 의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얼마 후 대삼림 전체가 무너질 듯한 엄청난 지진과 함께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
“그 지진 때…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그걸 네가 혼자 했다는 것도 아직 안 믿기는데 단장님이 널 데려왔을 땐 정말…….”
유더는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제 손을 잡은 칸나의 작은 손이 떨리는 감각을 느꼈다.
“우린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칸나.”
“있잖아. 다시는 그러지 마.”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칸나가 부탁했다.
“여기서 약속해.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앞으로는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 것 같아도 혼자 나서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 부탁을 한 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안심시키기 위해 그러마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칸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상대의 말속에 담긴 거짓과 진실을 바로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손을 계속 잡고 있던 게 다른 이유가 아니었군.’
침묵을 지키는 유더를 보며 칸나가 그의 손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약속 안 해줄 거야?”
“노력해 볼게.”
“…그게 최선이구나.”
알겠어. 짤막하게 대답한 칸나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정말 알아 둬. 네 몸은 하나야.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그대로 끝난단 말이야. 주변이 어떨지 생각해 봤어?”
유더는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전에 쌓아두었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하든, 재산이 얼마나 많고 힘이 얼마나 강하든 그런 건 죽을 때 함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알아.”
“아니, 알긴 뭘 알아. 넌 아무것도 몰라.”
여태까지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게 거짓말이었던 양 차갑게 대답한 칸나가 유더의 어깨를 한번 더 때렸다.
“네가 이런 바보라는 걸 이제야 안 게 너무 분해. 알았다면 단장님이 널 두고 간다고 했을 때 결사적으로 반대했을 거야.”
그건 유더도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그렇게 답했다가는 칸나가 더 화를 낼 것 같았으므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미안.”
“사과하지 마. 앞으로 안 나서겠다는 약속도 못 할 거면서 무슨 사과람?”
그렇게 말한 뒤 칸나는 속상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유더는 잠시 후 그의 곁에서 칸나가 뭔가를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뭐 같아?”
“……검?”
“그래. 네 검이야. 단장님이 널 데려올 때 미처 못 주워오셔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줬어. 그런데… 여기 이 부분을 만져봐.”
유더의 손을 끌어당긴 칸나가 어느 한 곳을 만지게 했다. 감각이 둔한 손끝에 거칠고 기다란 끈이 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손에 닿자마자 이내 바스라져 뚝뚝 끊어져 버렸다.
“네 검에 원래 달려있던 붉은색 끈, 기억해? 검은 다행히 멀쩡했지만 그거랑 검집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어. 방금 네가 만진 건 묶여 있던 마지막 부분이야.”
유더는 말없이 손끝에 닿은 거친 감각에 집중했다. 그 끈은 이전에 이논이 주었던 물건으로, 기운이 흔들리는 걸 막아 준다는 둥 하는 말을 하며 강제로 안겨준 이래 줄곧 검에 묶어두었었다.
검집이야 새로 만들면 되니 상관없지만, 끈은 낡아 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여태 한 번도 불이나 물 앞에 손상된 적이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망가졌다는 게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검이 이렇게 될 정도로 네가 엄청나게 위험한 싸움을 한 거야. 알겠어?”
“…….”
그는 칸나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이나 끈이 묶여 있던 자리를 매만졌다.
“유더 님. 깨어나셨나 보군요.”
“사제님.”
얼마 지나지 않아 루산 사제가 방으로 들어왔다. 유더는 지금만큼 그의 존재에 감사했던 적이 없었다. 루산이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칸나는 그를 방 안에 영원히 감금해 버리겠다는 말을 할 듯한 기세였다.
“보자……. 아프지는 않으세요?”
“네.”
“감각은 어떠신가요.”
루산이 유더의 팔과 얼굴 곳곳을 살짝 매만지며 물었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만지는 건 알겠지만 아픔은 없습니다.”
“…….”
아프지 않다고 하면 다행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루산은 어쩐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색이 몹시 어두워 유더는 조심스레 물었다.
“제 상태가 뭔가 이상한 겁니까?”
“아주 이상하죠. 신성력을 그렇게 부었는데, 차도가 없으니까요.”
루산이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 몬스터가 독성을 품고 있었다는 건 아셨을 거예요. 그런 몬스터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쓰셨으니 당연히 상태가 어떨지는 짐작이 되시겠죠?”
“보기 좋지는 않았겠군요.”
피를 뒤집어쓴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 꼴을 보고도 단숨에 안아 올린 키시아르 쪽이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신성력을 부으면 잠깐 차도가 생기는 것 같다가도 금세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얼룩진 범위가 더 커지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일단 약초를 바르고 붕대로 감아둔 상태입니다.”
루산이 걱정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감각이 거의 안 느껴지는 건 피부를 뒤덮은 독성과 진통성 약재 때문일 거예요. 둘 중 어느 쪽이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통제 때문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감각이 돌아오면서 고통이 느껴지시겠죠. 제 실력이 부족한 탓에 여기까지밖에 해드릴 수가 없네요…….”
“아닙니다.”
유더는 빠르게 대답했다. 몬스터에게 약한 건 그가 지닌 약점이자 당연한 한계였다. 몬스터에게 입은 상처는 이전 생에서도 다른 상처보다 느리게 낫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번에도 그런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젊은 사제는 스스로를 향한 탄식을 거둘 기세가 아니었다. 한참 동안 울적하게 무어라 중얼거리던 루산이 힘없이 그의 눈 근처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기운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단장님이 유더 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그 부분도 확인해 보라고 하셨으니 한번 보겠습니다. 유더 님. 지금 힘을 쓰실 수 있으시겠어요?”
힘이라. 유더는 천천히 손바닥을 뒤집어 가슴 앞에 놓고 힘을 살짝 써 보았다. 손바닥 위에 고일 정도 되는 양의 물을 불러낼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흘러도 느껴지는 감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현되었습니까?”
“……일부러 한 방울만 불러낸 거야?”
곁에 있던 칸나가 반문했다.
“…손 안에 고일 정도로 불러내려고 했는데.”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라면 아직 그 부분도 전혀 회복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루산이 무거운 목소리로 판단을 내렸다. 유더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이전처럼 힘이 예상보다 과도하게 발현되는 쪽이 나았다. 그 반대의 경우는 제게 일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
“이제 무모하게 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좀 들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유더. 다 나을 수 있을 거야. 단장님이, 그리고 우리가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나는…….”
유더는 무어라 말하기 힘든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칸나가 그의 손등을 토닥이는 동안 바깥에서 또다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더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돌리자마자 루산이 별안간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더 님. 일찍 깨어나신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휴식을 위해 가장 좋은 건 잠이라는 걸 아시리라 믿습니다. 상태는 다 확인했으니 이제 이걸 드시고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보다 바깥쪽이…….”
“유더. 마셔.”
칸나까지 합세하여 그의 입에 무언가를 털어 넣었다. 유더는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의식이 다시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