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언제나 여유롭고 침착한 줄로만 알았던 키시아르가 잠시 내보였던 그 표정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칸나는 어쩐지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이후에는 일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에제인 왕자는 부하들이 떠날 준비를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키시아르와 함께 마을 출입구 쪽에서 간단히 이별을 앞둔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나그란의 별이 만든 마을을 떠나자마자 귀국하려던 예정을 접었다. 본래의 목적지였던 산장에서 부상이 다 낫지 않은 부하들을 위해 조금 더 머물다 갈 생각이라 밝히는 젊은 왕자의 얼굴 위로 홀가분한 감정이 어른거렸다.
“더 머물다 가시겠다니, 이 위험한 곳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서부터의 귀국 루트는 제3국을 경유하는 방식이라 위험 요소가 적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저도… 음. 아직 실감은 잘 안 나지만 각성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에제인 왕자가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빛나는 돌 하나를 낯설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게 절 지켜주는 힘이라 느끼니 뭔가… 마음이 놓였다고나 할까요. 어쩐지 이전만큼 초조해지지가 않습니다. 주변의 희생을 감내하며 빨리 귀국하는 것보다 제 곁에 남아준 이들을 보호하는 쪽이 지금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다른 이들을 채찍질해 당장 돌아가려 했던 제가 부끄러워지는 말씀이군요.”
“아뇨. 입장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단장님의 입장이었다면 단장님처럼 했을 겁니다.”
키시아르의 농담에 마주 웃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한 에제인의 눈빛이 단호하게 변했다.
“아무튼 귀국하는 데 예정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습니다만, 돌아가는 대로 약속은 반드시 이행할 테니 걱정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설령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첫 번째 사항만큼은 지킬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습니다.”
“약속 이행 부분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해 주십시오. 사실 갑작스러운 각성을 겪고 나면 크게 놀라는 이들이 많기에 걱정했습니다만, 한결 여유를 되찾으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그건… 아마도 저의 새 친구가 되어준 단장님의 보좌가 나누어 준 말들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순간 키시아르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잠시의 침묵 뒤 얼굴을 가린 모자 아래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습니까?”
“그는 제게 어느 날 갑자기 큰 힘을 가지게 되어 주변의 모든 난국을 떨쳐내고 나면 더 많은 이들이 저를 따르리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었죠. 제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 부분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처음에는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존재감을 죽이고 이동하는 일 이외에 할 일이 없는 상황에서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잡념에서 도피하려면 그 말에 대한 생각이라도 계속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에제인은 문득 여태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다양한 방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을 느꼈다. 넬라른의 미래나 눈앞에 닥친 위기, 손에 쥘 수 없는 인재와 원해도 얻을 수 없었던 힘에 대한 생각은 그동안 수도 없이 했지만 순수하게 스스로의 내면만을 응시해본 적은 없었다. 그 순간 비로소 눈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주변의 상황을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는 힘 따위가 아니라 그저 저 자신에게 달렸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성한 순간에도 제일 먼저 떠올랐던 생각이 그것이었으니까요. 마치 그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제게 미리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정말이지 놀라운 통찰력이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칸나는 그 말에 내심 몹시 놀랐다. 그동안 유더가 에제인 왕자와 몇 번인가 붙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그런 말까지 나누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친구라니? 솔직히 말해 그녀는 에제인 왕자가 마병단원과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 마병단원이 유더 아일이라는 게 더 믿기 힘들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번 제국행을 통해 오르 제국의 황제 폐하와 단장님, 그리고 새로운 친우에게 정말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넬라른인은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지요. 다음에 연락드릴 때는 서로 손을 잡은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좋은 소식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에제인 왕자는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부드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멀리서 기다리던 그의 부하들과 시종 멜번이 정연한 모습으로 주군을 맞이했다. 그들은 마병단을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가 몸을 돌렸다. 마병단원들은 떠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을 느꼈다. 드디어 그들이 이곳까지 와야만 했던 첫 번째 임무가 완수된 순간이었다.
“이후에 우린 펠레타 기사단과 헤어져 이곳으로 돌아왔어. 다들 그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참 좋았었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걸어야 했지만 불만을 표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의 단장이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가 올 때와 달리 몹시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단원들이 눈치채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겉만 보면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지만 칸나는 그의 시선이 목적지가 있는 동쪽에 자주 머무른다는 사실을 알고 몰래 웃었다. 언제나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던 단장이 이토록 서두르는 건 주변을 걱정한 탓이 틀림없었다.
‘돌아가면 유더에게 넬라른의 왕자님과 정말 친구가 되었느냐고 물어봐야지. 아, 그리고 그분이 각성했다는 사실도 말해야겠구나. 그건 아무리 유더라도 깜짝 놀라겠지?’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들이 서부 마법사들이 머무는 거점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였다.
“……단장님. 벌써 다섯 마리째입니다.”
가케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그림자 분신이 찢어발긴 몬스터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이름 모를 검보랏빛 몬스터의 몸집은 몹시 작았지만, 가시가 달린 꼬리는 무척 길고 컸다.
“약한 몬스터라 해도 이렇게 자주 나타나는 게 뭔가 심상치 않게 느껴집니다. 지나친 걱정이라면 죄송합니다만…….”
“아니. 지나친 걱정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이지.”
키시아르가 검은 체액으로 젖은 땅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군. 모두 조금 더 속도를 올릴 수 있겠나?”
“예.”
마병단원들은 지친 발걸음에 힘을 주어 이동 속도를 높였다. 그들은 거점에 들어서기 직전, 그들이 여태 해치우며 온 몬스터와 똑같이 생긴 몬스터를 처리하느라 애를 먹고 있던 마법사들과 마주쳤다.
엘더 남매가 일부 변형시킨 거대한 팔로 몬스터를 때려 부수자 마법사들은 지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맙다는 말을 내뱉는 말에도 기력이 없었다.
“무슨 상황입니까. 그사이 또다시 몬스터가 이상발생한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재앙 같은 놈이 나타났어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한 마법사들을 보며 마병단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싸늘한 감각이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키시아르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거점 안쪽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모두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하나 남아 있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손이 피투성이가 된 루산이 뛰쳐나와 그들을 반겼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다른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루산 사제. 유더 아일은 어디에 있나.”
주변을 짧게 둘러본 키시아르가 서늘하게 물었다. 사제 루산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서는… 몬스터를 처리하러 나가셨습니다.”
“몬스터라니.”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공격을 할수록 점점 커지고 강해지는 성질을 지녔다고 하는데…….”
루산은 그간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일을 최대한 간략히 설명하려 노력했다. 말재간이 없어 몇 번이나 더듬거렸지만 키시아르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래서, 유더 님은 그 몬스터를 잡으러 가셨고 다른 마법사분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 이곳을 지키다 부상을 입은 분들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만…….”
루산의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을 보며 마병단원들이 느끼던 초조함은 한층 더 강해졌다.
“조금 더 일찍 와 주셨다면 함께 가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요…….”
칸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보자 그런 기분을 느낀 게 저만은 아니었던 듯, 다른 동료들도 일제히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오싹한 기분의 끝에는 그들의 단장이 존재했다.
잠시 후 얼굴을 가린 검은 망토 속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병단 전원, 이곳에서 대기하며 주변 상황을 살핀다.”
“…….”
“위층에 있는 마법사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방금 들은 이야기에 기반하여 모두 파악하라. 정보 수집은 칸나 완드가 책임을 지고 담당한다.”
“…아, 알겠습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 했으나 피부를 찌르는 저릿한 기운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입술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칸나가 이를 악물자 키시아르의 시선이 위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루산을 향해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